Perhaps love...
르루
*입헌군주제입니다.
“…엄마 이게 뭐야?”
“그게…, 너희 할아버지가 이런 약속을 하셨다지 뭐니….”
정환이 손을 바들바들 떨며 노려보자 부모님이 일제히 시선을 피했다. 제 앞에 곱게 개어 놓여진 교복은 누가 봐도 왕립고등학교의 교복이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히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던 정환에게 왕복 4시간에 달하는 왕립고등학교로의 전학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아, 여기까지 어떻게 다녀! 나 학교 다니다가 죽을 일 있어?”
“그건 걱정마시지요. 이제부터 왕실에서 통학하시면 됩니다.”
끼기긱. 경직된 정환의 목이 삐걱대며 돌아갔다.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여자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기…혹시 누구신지?”
“오늘부터 세자빈 마마를 모시게 된 남상궁입니다.”
“…뭐요?”
“남상궁입니다.”
“아니, 그거 전에….”
“마마. 서두르시지 않으시면 지각입니다.”
세자빈…? 정환은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밝고, 인자하고, 언제나 정환을 사랑해주고, …온갖 사고는 다 치고 다니던 할아버지를. 정환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노망난 노친네. 내가 이번 설에 무덤에 팥 뿌리고 만다, 꼭!
Perhaps L.O.V.E(?)
입헌군주제가 도입된 지 약 15년. 지금의 왕실은 군주라기보다는 연예인 같은 느낌으로 자리 잡았다. 거기엔 왕실의 빼어난 외모도 한 몫 했다. 타고나길 한량이었던 정환의 할아버지는 정환이 태어나기 수 년 전 길에서 바둑을 두다 친해진 어떤 노인과 손주끼리 결혼을 시키자며 증서를 썼는데, 그 노인이 현재 왕의 아버지란다.
고삼인데 전학 미쳤냐고
주말에 노친네 무덤 파묘하려고
지랄ㅋㅋ 너 원래 공부도 안 하잖아
친구의 카톡에 정환이 인상을 찌푸렸다. 틀린 말도 없어서 더 짜증이 났다.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되도 않는 약속을 한 할아버지도 문제지만 왕실도 왜 이제 와서 이러는 지 이해가 안 갔다. 증서를 분실했다가 최근에서야 되찾은 것도 아니고, 십구년을 증서가 있는지도 모르게 살아왔으면서.
“…왜 이제 와서 이러냐고.”
“아. 그건 말이죠, 제가 빈의 얼굴을 몇 주 전에 처음 봤기 때문입니다!”
혼잣말에 돌아온 대답에 정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까맣네. 그리고 음….
“잘생겼죠?”
잘생겼네. 제 속마음을 읽힌 정환이 놀라 벌떡 일어났다. 제 착각이 아니라면 눈 앞에 있는 남자가 왕세자, 김도훈이었다. 정환이 입술을 달싹였다. 말문이 턱 막혔다. 도훈이 정환의 손을 잡아 제 뺨에 갖다댔다. 정환의 몸이 움찔거렸다. 도훈이 정환의 손에 뺨을 느리게 비비며 정환과 눈을 맞췄다.
“잘 부탁해요, 빈.”
순간 정환은 느꼈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다.
/
정환은 매 쉬는 시간마다 제발 수업이 시작되길 빌었다. 도훈이 다녀간 1교시 쉬는 시간 후로 종만 치면 자리로 반 애들은 물론이고 다른 반, 다른 학년 애들까지 달려드는 탓에 정신이 없었다. 대부분 어쩌다 도훈을 만나게 된 거냐는 둥, 어떻게 왕세자비가 된 거냐는 둥, 도훈과 제 관계를 묻고자 하는 애들이었다. 정환은 빽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나도 몰라. 쟤 오늘 처음 봤다고! 개중엔 정환의 얼굴을 보려고 몰려온 애들도 더러 있었다. 처음엔 적당히 받아줬지만 나중엔 잘생겼다는 말이 듣기 싫을 정도로 짜증이 치솟았다.
“집 가고 싶어….”
수업이 끝나고 교문을 나서면서도 계속 집이 가고 싶었다. 왕실 말고, 원래 내 집. 남상궁이 또 신하들을 대동하고 와 이목을 끌 걸 생각하니 벌써 숨고 싶었다. 그 와중에 도훈은 이미 조퇴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하교는 같이 할 줄 알았는데. 멀쩡히 살던 사람 갑자기 전학까지 오게 만들어놓고 하교 할 때 보이지도 않는 게 왠지 심통이 났다. …허락도 안 받고 손까지 잡고 말이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가시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요.”
“안 됩니다.”
“대중교통 타고 등하교 하면 안 되겠죠?”
“네.”
정환이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아니, 까놓고 말해서 세자빈 이런 건 간택쇼? 같은 것도 좀 하고 그래야 되는 거 아니냐고. 통보받은 지 12시간 됐는데 왜 대중교통도 못 타게 하는 거야! 혼례도 안 올렸으니까 정식 세자빈도 아닌데! 이글거리는 정환의 눈빛을 읽었는지 남상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환이 흠칫 몸을 떨었다. 저 사람은 말을 안 해도 눈빛만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다 아는구나. 역시 왕실 권력 암투에서 살아남아 상궁까지 된 사람들은 장난이 아니구나 싶었다.
“마마께서는 아직 정식으로 혼례를 올리시지 않으셨으니 꼭 왕실의 율법을 따르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다만?”
“마마께서 대중교통을 이용하신다면 세자저하께서도 그리 하시겠다고 우기실 게 뻔하기에. 양해 부탁드립니다.”
정환이 눈을 깜빡였다. 우긴다고? …저런 말 왕세자한테 써도 되는 건가. 생각보다 왕실의 법도가 지엄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것보다, 뭔가 내용이 이상했다.
“세자저하께서 왜요?”
“…저하께서 오늘 무슨 일을 저지르시지 않았나요?”
정환이 몇 시간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제 손등에 얼굴을 부비며 애교 부리던 도훈이 떠오르자 다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혹시 그거… 저하께서 남상궁님께 예고하시고 하신 건가요?”
“아뇨. 그저 제가 이제껏 보아온 저하시라면 무조건 사고를 치실 분이시라.”
“아하….”
이쯤 되니 남상궁 머리 속에 김도훈은 어떤 이미지인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잠깐 봤을 때도 장난끼가 넘쳐 보이긴 했다만. 머쓱해진 정환은 차에 타며 망설이던 질문을 꺼냈다.
“근데 저하께서는 어디에 가셨는지…?”
“CF 촬영 가셨습니다. 마마와 혼인하게 해준다는 조건으로 거부했던 CF 및 공익 광고 15편 촬영을 하기로 하셨거든요.”
“네? 저랑 결혼하려고요? 그냥 왕명이면 해야 되는 거 아니였어요?”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전하께서도 마마께서 그 증서 하나 때문에 원치 않는 혼인을 하게 되시는 걸 원치 않으셨습니다. 순전히 세자 저하께서 우기신 거지요.”
속으로 왕실을 매도하고 있던 정환은 속이 쿡쿡 찔렸다. 전하께서는 상당히 상식적이신 분이었구나. 왕실모욕죄라도 저지른 기분이 들어 괜히 창밖만 쳐다봤다. 그것과는 별개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오늘 도훈이 했던 말, 그리고 남상궁이 했던 말을 합쳐보면 딱 한 가지 결론이 나왔다.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은 사실 증서가 아니라, 도훈이 정환에게….
/
“첫 눈에 반했습니다!”
정환이 눈을 질끈 감았다. 밤 10시까지 CF 촬영을 하던 도훈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겨우 퇴근을 할 수 있었고, 곧장 정환의 처소로 향했다. 누워서 유튜브나 보고 있던 정환은 제 처소 쪽으로 다가오는 시끄러운 발소리를 듣자마자 도훈임을 직감했고, 문을 벌컥 연 도훈이 뱉은 첫 마디가 저것이었다.
“…진심?”
“네!”
초롱초롱한 눈을 보자 거짓말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도훈의 까무잡잡한 피부가 약간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뛰어오셨어요?”
“네!”
“왜요…?”
“보고싶어서요!”
말문이 턱 막힌 정환이 아무 대답도 못 하는 새 도훈은 정환의 침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정환을 올려다봤다. 도훈이 조심스레 정환의 손을 잡아 제 뺨에 가져다댔다. 정환이 애써 시선을 돌렸다. 무슨… 강아지 같네….
“…왕세자가 이렇게 무릎 막 꿇고 그래도 돼요?”
“부인이니까….”
“부, 부인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졸지에 오늘 처음 만난 남자의 부인이 된 정환이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질러놓고도 혹시 왕실모욕죄로 잡혀가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오히려 도훈은 더 울망하게 정환을 바라보며 애교를 부려댔다.
“그럼… 형?”
도훈과 눈이 마주친 정환의 목덜미가 눈에 띄게 붉어졌다. 정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음…. 정환을 바라보던 도훈이 눈을 접어 웃었다.
“오빠?”
정환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아무래도, 이 나라의 왕세자는 미친놈인 것 같다.
/
남상궁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도훈은 열흘 가까이 점심 즈음에 조퇴를 해서 열 시까지 촬영을 하고 돌아오는 스케줄에 시달렸다. 덕분에 도훈은 다크서클이 턱끝까지 내려올 지경이었다. 이 살인적인 스케줄의 또다른 피해자는 정환이었는데, 또래가 아무도 없는 궁에 갇혀지내자니 좀이 쑤셔 죽겠는 와중에 그나마 말을 튼 도훈까지 없으니 심심해서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평소엔 보지도 않는 만화책을 방에 쌓아두고 보는 것도 사흘만에 질려버렸다. 이쯤 되니 도훈이 돌아오는 열한시만을 은근히 기다리게 되었는데, 그게 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형. 우리 혼례는 언제 올릴까?”
“올릴까는 반말이고.”
“언제 올릴까요?”
“저 죽을 때쯤에….”
도훈이 우는 소리를 냈다. 놀리려고 하는 말인 걸 알면서도 매번 낑낑대며 리액션을 하는 게 귀엽긴 했다. 손 타는 강아지 같기도 하고. 왕세자인 걸 아는데도 너무 위엄이 없어서 불쑥불쑥 반말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근데…저랑 결혼하시면 후사는…?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가 애를 낳을 수는 없잖아요?”
“아 그건 걱정마세요.”
별 일 아니란 듯 태연한 도훈의 말에 정환은 마른 침을 삼켰다. 설마 당연하다는 듯이 후궁을 들이면 된다든가 하는 망발을? 처음 보는 남자애랑 결혼하는 것도 싫은데 일부다처제의 본처가 되긴 싫었다.
“형님께서 작년에 출산을 하셨기 때문에 상관 없습니다!”
“네? 형님이요?”
“아. 보실래요? 정말 귀여워요….”
도훈은 정환에게 불쑥 휴대폰 사진첩을 들이밀며 조카를 자랑했다. 확실히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긴 했지만…내 말 뜻은 그게 아닌데…. 원래 막 권력 다툼 그런 거 없나? 세자로 간택받지 못한 형의 자식이 왕이 돼도 되는 거야? 사극으로 수집한 왕실 암투에 대한 정보로 정환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 형님분의 자식이 왕이 돼도 되는 거예요?”
“네? 왜 안 돼요? 다 같은 핏줄인데.”
“아니, 막 왕위 두고 다투고 그런 거 없어요?”
“에이…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애초에 형님은 세자로 간택 못 받은 게 아니라 본인이 거부하신 거예요.”
“그게 막 거부하고 그럴 수 있는 거예요?”
“네. 원래 성인돼서 자기의사결정권이 생기면 그때 거부할 수 있어요. 저도 그렇긴 한데 뭐, 저는 거부할 생각 없지만요.”
천연덕스러운 말에 정환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참…현대적이고…상식적이어서 놀랍네. 도훈은 정환이 혼란스럽든 말든 은근슬쩍 정환의 손을 잡고 급기야 손깍지까지 끼는 데 여념이 없었다.
“…손 잡고 싶으셨어요?”
“아. 허락 없이 잡아서 죄송합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눈에 있다보니.”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부끄러운 말을 해대는 것도 열흘쯤 되니 적응했다. 왕족이면서 허락 받고 손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웃기고, 그래놓고 또 결혼은 마음대로 밀어붙인 게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귀여웠다. 그래, 내가 미친 거지. 귀엽다는 생각이나 하고.
“혹시 제가 결혼 안 하고 싶으면 거부할 수 있어요?”
“네. 한 달 후에 의사를 다시 묻고 그때 결정할 예정이에요.”
“한 달? 왜 한 달이에요?”
“…한 달 안에 꼬시라고 하셔서….”
“…누가요?”
“아바마마께서….”
허. 정환이 세모눈을 뜨자 도훈이 헛기침을 하며 눈을 피했다. 기한이 1/3이나 날아갔는데도 초연한 태도를 보면 꽤나 자신 있는 듯 싶었다. 괜히 눈도 못 마주치고 우물쭈물 대는 도훈에 왠지 모르게 심통이 난 정환이 아까부터 도훈이 꽉 잡고 있는 손을 제 뺨에 가져다댔다. 도훈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맨날 자기만 할 줄 아나. 나도 이 정도는 할 줄 안다고.
“자신 있으신가봐요?”
“솔직히… 없진 않습니다.”
“…그래요?”
“저 잘생기지 않았나요?”
“네?”
“아니면 여자 쪽이 취향이신가…. 그러면 조금 곤란하긴 한데… 씁….”
풉. 인상까지 찌푸리고 진지하게 고뇌하는 도훈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래도 뒷조사라도 좀 했을 줄 알았는데 정환이 헤테로가 아니라는 것도 모를 정도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뭔 놈의 왕세자가 이렇게 애교가 많고, 어리고, 순진한지. 고작 열아홉 먹은 정환의 눈에도 훤히 보이는 속에 이따금 귀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혹시 내가….”
정환이 무심코 도훈의 입술 옆에 묻은 속눈썹을 떼려 손을 뻗자 도훈이 뒤로 몸을 크게 물렸다. 도훈의 목덜미부터 귓불까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아. 미안….”
“아니, 아뇨. 그냥 조금 놀라서….”
도훈이 머쓱하게 뒷목을 문질렀다. 정환의 손이 허공에서 움찔대다 이내 거둬졌다. 왼손은 여전히 꽉 붙잡은 채였다. 왠지 모를 정적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이전에도 두 차례 연애를 해본 정환은 이 기류가 뭔지 알고 있었지만 애써 모른 척을 했다. 평균 나이 18세 둘이 한 방에서 마른 침을 삼키고 있다면 그게 뭐겠는가. 뻔하지. 그래도 만난지 열흘밖에 되지도 않았고,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물론 약혼한 사이이긴 하지만, 첫 키스도 아니지만…………. 정환의 작은 머리통 안에서 오만 생각이 오가는 동안 멍하니 정환을 응시하던 도훈이 바싹 몸을 붙였다.
“잠깐….”
정환이 도훈의 어깨를 급하게 잡아 멈췄다. 정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열흘…열흘밖에 안 됐잖아요….”
이게 무슨 쌍팔년도 순정만화 여주인공 같은 대사냐. 정환은 뱉어 놓고도 후회했다. 왠지 도훈의 눈은 초점이 풀린 것만 같았다. 그것마저 정환은 뭔지 알 수 있었다. 그래. 약 1년 전에 첫키스를 할 때 정환의 눈이 딱 저랬을 것이다. 혈기왕성한 이차 성징 완료한 청소년 답게 정환 또한 발끝부터 열기가 올라오는 걸 꾹 참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는 사람과 몸만 가까워져도 아래로 열이 몰리는 게 남고딩이니까. 정환은 속으로 인내의 반야심경을 외웠다. 도훈과 눈이 마주치기 전까지는.
“…진짜 안 돼요?”
“…어….”
“우리 열일곱, 열아홉인데….”
열흘이면 충분하잖아요…. 말꼬리를 흐리며 입술을 가까이 하는 도훈에 정환의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런가?
호르몬으로 흐물흐물 녹아내린 이성이 결국 작동을 멈추고, 정환은 도훈의 목에 팔을 감고 뒤로 몸을 뉘였다. 도훈의 입술이 허겁지겁 붙어왔다.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혀에는 어떠한 기교도 없이 조급함만이 가득했다. 요령 없이 입속을 헤집는 통에 입술을 타고 턱으로 타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호흡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해 방 안에 헉헉대는 소리가 가득 찼다. 정직하고 순진한 움직임이였으나 도훈의 몸은 그렇지 못했다. 정환은 어느새 제 다리 새로 들어온 도훈의 다리가 아래를 꾹꾹 누르는 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 씨발… 설 것 같아. 아니, 솔직히….
“섰네….”
“…그러는 저하께서도 서셨는데요.”
정환이 입술을 소매로 훔쳤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 해도 몸은 빳빳하게 굳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도훈의 손이 허공에서 자꾸 움찔대는 걸 보면 도훈의 녹아버린 이성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듯 했다.
“아무리 그러셔도 이 이상은 안 돼요.”
“그렇겠죠….”
“우린 아직 만난지,”
“역시 그런 건 초야에….”
“….”
*초야: 첫날밤
정환이 할 말을 잃고 입술을 꾹 닫았다. 아무래도 도훈을 따라가기엔 열흘은 모자란 듯 했다.
/
그 뒤로 시간을 빠르게 흘러갔다. 밀린 촬영도 다 끝난 터라 도훈은 정환과 등하교를 같이 했고, 하교한 후에는 정환의 방에 누워 같이 영화를 보거나 유튜브를 봤다. 그러다가 눈이 맞으면 입술을 맞붙이기도 했는데, 문제는….
“흐, 숨 좀….”
“아. 죄송해요…….”
그게 거의 매일이었다는 것이다. 둘은 어디서 키스 못해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는지 조금만 정적이 흐르면 스파크가 튀었다. 그게 얼마나 잦았으면 다과를 건네러 온 궁녀가 그 장면을 목격한 이후로 정환의 처소 근처에는 궁녀들의 발길도 싹 끊겼다. 도훈이든, 그 아버지이든 누군가의 명령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런 걸 깨달을 때마다 여기서 더 말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다가도,
“너무 좋아서…, 형이 너무 좋아요….”
제 품에 안겨오는 도훈을 보면 다시 열이 오르는 게 문제였다. 이 놈의 호르몬이 문제였다. 호르몬 때문에 열이 오르고, 흥분하고, 그러다보니 또 김도훈이 귀여워 보이고…. 이제 기한이 며칠 남지도 않았다. 정환의 마음은 분명했다. 김도훈이 좋다. 좋은 건 좋은 건데…, 그런 얄팍한 감정으로 결혼을 해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울 엄마가 결혼은 사계절은 보고 해야 한다고 했는데.
“형은 나 안 좋아요?”
“…음….”
“형…. 저랑 결혼 안 할 거예요?”
울망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마음이 동했다. 정환이 도훈의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이런 질문에 어물쩡 넘기는 것도 이제는 그만 둘 때가 됐다. 문제는 아무리 정환이 두 살이 많다고 해도 정환도 민증도 안 나온 애새끼라는 점이었다. 이런 대소사를 결정짓게 두어서는 안 되는 미성년자. 정환은 정환도 모르는 새에 녹아내리는 이성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형.”
“…어?”
“저 먹버하는 거예요?”
제 가슴팍에 머리칼을 부비는 도훈의 말에 정환의 이성은 그만 K.O 되고 말았다. 정환은 결국 인생을 건 도박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래, 이 김에 잘생긴 왕세자랑 인생 새출발하는 거야. 솔직히 마다할 이유가 없잖아…? 잘생겼고…음…. 정환은 얼굴 이외의 이유를 찾아보려 했지만 머릿속에 다른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맞닿아있는 가슴팍에 느껴지는 심장박동과 자연스레 제 아래를 꾹꾹 누르는 도훈의 다리 때문에 저도 모르게 그 놈의 초야를 빨리 가지고 싶다는 본능이 날뛰고 있었다. 까짓거 아니다 싶으면 그때 그만 두면 되는 거니까.
“그래, 결혼해요.”
“정말요?”
도훈은 마음이 벅차오르는 지 벌떡 일어났다. 그 꼴이 웃겨서 웃음이 새어나오려는데 도훈이 남상궁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상궁. 증서 가져오세요.”
에? 정환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모르는 채로 멍하니 앉아있는 사이 방으로 들이닥친 남상궁과 궁녀 네댓은 순식간에 정환의 앞에 1미터는 되는 것 같은 족자봉을 펼쳐놓았다. 정환은 눈 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제 1항 갑은 을과의 결혼을 파기하지 않는다, 제 2항 갑은 왕립고등학교를 자퇴하지 않는다, 제 3항 갑은 을이 만 18세가 되기 전 초야를 치루지 않는다 등등의 정신 없는 조항들이 길다란 족자봉을 빼곡 채우고 있었다.
“마마. 여기 지장을 찍으시면 됩니다.”
전에 없던 환한 미소를 띈 남상궁이 정환에게 인주를 들이밀었다. 정환의 움직임이 고장난 로봇처럼 삐걱였다. 어색한 미소를 띈 정환이 남상궁에게 넌지시 물었다.
“혹시, 미성년자인 제 동의는 효력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제 78항을 봐주시지요.”
[제 78항 갑은 금일, 11월 7일을 기점으로 만 18세가 되었으므로 해당 계약은 법적 효력을 지닌다.]
어느새 엄지에 짙게 묻은 인주와 아직 민증에도 못 찍어본 지장이 선명히 찍힌 족자봉을 보며 정환은 무언가에 단단히 잘못 걸렸다는 걸 느꼈다.
“서방님. 잘 부탁드려요.”
그래, 저 어리숙한 미소를 짓는 김도훈한테 말이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