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뼘의 바다

산호

 

 

 

세차게 요동치는 파도의 끝으로 망설임 없이 뛰어들며 가라앉을 때 나는 니가 살려고 발버둥 치지 않아서 좋았다. 물보라가 피어나는 물결 사이로 부옇게 흐려지는 얼굴을 기억했다. 우리는 서툴고 풋내나는, 아직은 미완(未完)의 입술과 가슴 사이의 짧은 손 한마디쯤의 거리에 우리를 가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손을 내밀어 꺼내주지 않으면 기꺼이 갇혀서 투명한 서로의 속을 영원히 유영하고 싶었다.

 

 

한뼘의 바다

김도훈 X 신정환

 

 

 

 

 

*****

 

머리꼭지가 타들어 갈 것 같은 한낮의 태양을 견디며 도훈이 빠르게 뛰었다. 외곽 쪽으로 뛰어 공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공을 따라 흙먼지가 일어나며 둘 셋이 뒤엉켜 있는 틈을 타 손을 흔들었다. 여기로 차라는 표시였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주룩 흘러내리는 통에 그늘이 없는 스탠드에는 사람이 없었다. 쨍하게 내려 쬐는 햇볕에 바람도 한 점 없는 이 날씨에 뛰고 있는 도훈과 친구들이 미친놈 소리를 들을 정도 였다. 눈이 부셔 찡그린 도훈의 시야에 걸린 그에게 시선이 걸린 것은 찰나였다.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로 눈을 감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 얼굴이 날아 오는 공보다 슬로우 모션 처럼 천천히 흘렀다. 퍽 소리와 함께 눈가에 둔통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입으로 소리가 흘렀다.

 

"악-"

"야, 김도훈 정신 안 차리냐!"

 

얼굴로 받아낸 공에 눈가가 화끈거렸다. 제대로 맞은 것 같았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 얼굴이 묘하게 웃은 것도 같았다. 쏟아지는 고통에 머리통이 빙글거렸다. 정신 못 차리는 사이 공은 뺏기고 상대팀에게 점수도 내주었다. 친구들에게 목이 졸리면서도 얼빠진 표정으로 스탠드에 다시 시선을 급하게 쫓으면 헛것이었나 싶게 아무도 없었다. 귀신 봤냐고 타박을 주는 소리에 고통이 뒤늦게 몰려왔다. 눈탱이가 밤탱이 된 거냐고 놀리는 반응에 힘입어 울상으로 대꾸하는 도훈의 지갑을 털어간 친구들이 먼저 매점으로 뛰어갔다. 야! 나는 밀키스!

 

얼마 남지 않은 점심시간에 얼른 수돗가로 뛰어간 도훈이 공에 맞아 시뻘게진 얼굴을 찬물이 쏟아지는 수도 밑으로 들이밀었다. 얼얼한 감각이 눈가에 쏟아졌다. 미끌대는 목에도 찬물을 끼얹으며 떠오르는 하얀 얼굴의 잔상을 애써 지워낸다.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티셔츠를 끌어올려 닦아내며 돌아서서는 다시 멈췄다. 헛 것인 줄 알았던 그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마치 저를 관통하는 듯 내려다 보는 눈이 방금 얼굴에 쏟아부은 찬물 보다 서늘했다. 고요한 여름밤의 바다 같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곧게 마주쳐왔다.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만이 시간이 멈추지 않았다는 걸 알려왔다. 멀리서 흙먼지 냄새와 햇볕의 더운 열기가 서서히 꺼져가며 볼륨을 줄였다. 이내 시선을 거두고 기다란 손가락이 수도를 틀어 느릿하게 손을 씻을 때까지 도훈은 그 자리에 박혀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선이 가늘어 뼈가 불거진 손등에 물이 흐르며 적셔지는 장면이 꽤 느리게 흘렀다. 바닷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유려하게 쏟아지는 물 사이를 가로지르고는 손을 터는 것까지 도훈의 눈이 바짝 쫓았다. 그대로 돌아서는 어깨를 붙잡아 세우며 제 교복 셔츠를 급하게 들이밀었다.

 

"이걸로 닦아!"

 

코끝에 들이밀어진 도훈의 교복 셔츠가 흩날리며 흐릿하게 섬유유연제 향이 풍겼다. 충동적으로 내민 것이 분명한 손에 들린 셔츠와 도훈의 벌게진 얼굴, 정확히는 터진 눈가를 번갈아 보던 정환이 입꼬리를 희미하게 끌어올렸다.

 

"내가... 왜?"

 

도훈의 입이 둥그렇게 벌어져 다음 말이 나오기도 전에 돌아선 정환이 스탠드 계단을 두 개씩 올랐다. 완전히 계단 끝으로 그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참았던 숨이 쏟아진다. 욱신거리는 눈가의 통증도 그제야 느껴지기 시작했다. 손에 쥔 교복 셔츠가 잔뜩 구겨졌다. 찡그린 도훈의 얼굴처럼.

 

작은 항구를 끼고 있는 어촌마을에는 대다수가 바다로 벌어먹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살았고 근래에 생긴 공장으로 외지인들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도훈은 이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라 익숙한 바다를 제집처럼 뛰어들었다. 성적에 쫓기지도 쫓는 사람도 없는 이상하게 한가한 고3에게는 어른의 경계선을 앞둔 그 어느 계절은 느리게만 흐른다.

 

동남아 날씨를 닮아가는지 아침부터 높은 습도에 자전거를 탄 도훈의 등이 진하게 젖어 들었다. 언덕을 향하는 길에서는 제법 세게 구르는 발에 안장에서 몸이 들렸다. 건강하게 햇빛에 그을린 목덜미에는 땀이 스며 반들거렸다. 앞서가는 무리의 친구들이 도훈을 아는 체 하며 속도를 늦춘다. 여상하게 흐르는 풍경에서 이질적인 건 얼마 전에 마주쳤던 그 마른 어깨선이었다. 빠르게 지나가려던 도훈의 자전거가 급하게 멈췄다. 끼익- 마찰음을 내며 시멘트 바닥에 정지한 도훈이 돌아보고는 유리알 같은 눈이 더 커다래졌다. 느긋하게 걸어오던  그 하얀 얼굴이 저를 그대로 지나치는 것은 예상하지 못해서.

 

다시 도훈을 부르는 무리의 목소리에 움직여 페달을 밟았다. 단추를 채우지 않은 도훈의 교복 셔츠가 펄럭이며 지나가는 자리에는 그때의 그 섬유유연제 향이 코 끝으로 스며들었다. 이어폰을 뺀 정환이 자전거가 사라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표정 없이 하얀 얼굴이 조금 찡그린 채로 한참을 서 있다가 뛰어가는 애들 곁으로 다시 걸음을 옮긴다. 이르게 작열하는 해가 내리쬐는 아침의 온도가 평소보다 높았다.

 

길게 이어진 담벼락이 끝나는 지점에는 액자처럼 바다가 보였다. 계절과 함께 풍성해진 풀들이 담장 밖으로 우거져 지나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기도 했다. 그 끝에 쪼그려 앉은 마르고 솟은 등을 그냥 지나치기에는 눈에 아찔하게 채워진 푸른 풍경에 도훈이 자전거를 세웠다. 골목에서 불어오는 후덥지근 한 바람에 매캐한 냄새가 함께  뒤섞여  쏟아졌다. 인기척에 돌아보는 살짝 찡그린 하얀 얼굴과 마주치자 도훈이 그대로 골목 끝에서 멈췄다. 표정 없는 시선이 도훈의 머리끝에서 부터 천천히 떨어지다 눈가에 든 푸르딩딩한 멍에 잠깐 머무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세상 지루하다는 듯한 머리꼭지는 골목에 서 있는 도훈을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도훈은 투명하게 제 앞으로 그어진 선을 한참이나 내려다 보다 돌아선다.

 

몇 번을 더 마주치고 나서야 그가 옆 반에 전학 온, 두 살 많은 형이란 걸 알게 됐다. 무슨 사정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외국에서 살다 왔고 두 살이나 많다는 사실은 조그마한 학교를 한참이나 술렁이게 했다. 그래서 인지 담배를 피거나 편의점 앞에서 가끔 맥주캔을 까는 모습을 목격해도 모두가 그러려니 했다. 도훈도 그 형에 대한 무수한 소문을 어렵지 않게 접하고 나서는 자꾸만 솟아오르는 호기심 같은 감정을 꾹꾹 눌러냈다. 가끔 마주쳤던 서늘한 눈빛 같은 건 달갑지 않아서. 그 건조한 눈이 저를 담아낼 때면 몸 어딘가를 벅벅 긁어야만 할 것 같았다. 

 

담벼락쪽으로 지나가면 오늘도 그 형을 볼 수 있을까? 공 차러 운동장으로 모이라는 친구들의 말도 가볍게 무시하고는 책가방을 한 쪽 어깨에 둘러멘 도훈이 자전거의 머리 방향을 고민해본다. 보면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자꾸만 궁금해져 도훈은 오늘도 페달을 열심히 굴렀다.

 

담배를 물고 담벼락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 보던 정환의 눈이 소리 나는 쪽으로 급하게 떨어져 마주친다. 담배 끝의 빨간 불똥이 떨어질 듯 말 듯 아슬하게 맺혀 있었다. 위험했다.

 

"왜... 너도 피워보고 싶어?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불온한 것을 사납게 노려보다 고개를 저었다. 도훈의 모난 반응에 셔츠 주머니를 뒤적거린 정환이 모서리가 구겨진 말보로레드 각을 꺼냈다. 여전히 어색하게 서 있는 도훈을 올려다보고는 통째로 던져준다. 나이스 캐치- 어울리지 않는 새빨간 담뱃갑을 쥔 채로 애매하게 서 있는 도훈앞으로 일어나자 제법 눈높이가 비슷했다. 매캐한 담배 냄새가 조금 짙어지고 얼굴이 가까워지는 속도가 조금 빠르다고 느꼈을 때 도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코 끝으로 바짝 다가온 열기가 어른거렸다.

 

"멍... 색깔 예쁘네.."

"......"

 

여전히 심하게 멍이 들어 뭉개진 얼굴을 아 맞다- 하며 손으로 가려 감추는 도훈을 가만히 보다가 이내 눈가를 찡그리고는 웃는다. 정환이 웃었다. 웃기다 너- 눈은 왜 감아. 바람 빠진 소릴 내며 웃는 얼굴을 멍한 눈으로 쳐다보다 멈추어 섰다. 도훈은 그 순간을 시간이 흘러도 영원히 잊어서는 안될 것 같았다. 괜찮냐고 덧붙이는 그 말이 아주 느릿하게 들리고 그 형 얼굴 주위로는 다 뿌옇게 흐려지고 귀가 먹먹해진 그 순간을.

 

첫사랑의 징후 같은 게 있다면 좋았을까? 예를 들어 냄새나 온도가 달라진다던가, 갑자기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진다 하는 것들.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첫사랑 같은 것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럴 것인지 아니면 흠뻑 뛰어들어 맞이해도 좋을 것인지 아무래도 계획을 세워두면 좋았으려나. 아니, 계획 같은 건 언제나 틀어지니까 마음가짐이라도 바꿔 장착할 수 있게 언제쯤 찾아오겠다 예고 같은 것을 해도 좋겠다. 지금 이 간지러운 마음이 적어도 첫사랑인지 호기심인지, 아니면 그저 찾아오는 정신병 같은 것인지 가늠할 수 있을 테니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지금 제 마음의 두근거림 만으로도 족히 3일 정도는 굶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고 일어나면 형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빨리 잠들고 싶은 날들이 계속되었다.

 

꼭 도훈을 기다린 것처럼 그 자리에는 정환이 있었다. 웃을 듯 말 듯 한 묘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멈춰 선 그림처럼 늘 도훈보다 먼저 거기에 서 있다가 자전거가 도착하는 소리에 맞춰 돌아 봤다. 가끔 한대도 피우지 않은 말보로 레드가 손에 쥐어지기도 했지만 끝내 도훈의 입술에 담배가 물려지는 일은 없었다. 그냥 단순히 맛이 없을 것 같아서. 그저 도훈은 정환의 그 어떤 기다림 같은 시간이 끝나기를 조용히 견디다가 같이 걸었다. 어느 날은 자전거 뒤에 타기도 했는데 그런 날은 왠지 잠이 오질 않았다. 허리께에 조심스레 와닿던 저보다 좀 더 낮은 체온 같은 게 밤새 도훈을 뒤척이게 만들었다.

 

 

****

 

 

도훈의 자전거가 해안가 도로를 빠르게 달렸다. 뒤에 매달린 정환이 몸으로 부대끼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손에 감긴 셔츠 자락을 더 꼭 쥐었다. 도훈의 등에 귀를 대면 작게 둥둥 울리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소라껍데기에 귀를 댄 어린아이처럼 한참을 눈을 감고 그의 박동을 느끼다가 자전거가 멈추면 현실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쿵쿵대는 심장은 저에게서 난 건지 도훈의 등에서 나는 건지 헷갈려 주먹을 괜히 쥐었다 폈다 하면 까무잡잡한 얼굴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웃었다. 정환은 어쩌면 이 애를 좋아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어렴풋이 들었다.

 

정환의 대부분의 기억은 외로움에서 파생되었다. 외국인이라 배척당하고 한인사회에도 강박적으로 끼지 않으려 하는 어머니와 단둘이 자란 타지 생활을 오롯이 홀로 이겨내야 했다. 학교에서도 존재감 없는 정환에게 관심을 주는 이는 별로 없었고 본인도 그걸 원하지 않았다. 필요한 게 있으면 대니가 도와줬다. 대니는 어느 날 옆집으로 이사 온 교포였는데, 먼 한국 땅에서 이민 와 숨죽여 사는 모자를 살뜰히 보살펴주었다. 집에 무언가 고장이 나면 대니가 달려왔고 축제 같은 걸로 타운이 떠들썩해지면 달콤한 파이를 구워서 왔다. 온종일 파이나 먹으며 게임을 하거나 영화를 봤다. 대니는 살아가는데 필요한 많은 걸 알려줬다. 열일곱에 처음 면허를 땄을 때 대니가 옆에 있었고, 깊이를 알 수 없어 무서워 하던 호수에서의 첫 수영도 그가 가르쳐 줬다. 물론 좋은 것만 배운 건 아니었고, 지금 손에 들린 담배나 첫 키스 그리고 첫 섹스 같은 기억도 모두 그에게서 시작했다. 대니는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나던 날 정환을 불러 한국행 티켓을 손에 쥐여주었다.

내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갈 시간이라고.

 

대니의 얼굴에서 흐릿하게 초점이 맞춰지며 시야에 멀리 닿아있는 수평선이 가득 들어찼다. 돌아보면 도훈이 턱을 괴고 제 손을 올려다봤다. 형 그거 맛있어요?- 대니와 닮은 그 얼굴은 제가 가졌던 어느 날의 호기심을 달고 순수하게 돌진하는 것 같았다. 단순히 대니와 닮은 얼굴에 호기심이 생겼을 뿐이었다. 조금은 건조하고 차가운 대니랑 다르게 한국말로 뭐라더라. 잡종? 아, 똥개... 시골 똥개 같았다. 저만 보면 꼬리는 흔드는데 어쩔 줄 모르고 안절부절못하고 달려와도 되는 건가 머뭇거리는 사람 손을 많이 안 탄 똥개. 그래서 가끔은 손을 올리려다 놀라서 떨어트리곤 했다. 대니와 닮았지만 온도가 전혀 다른 그 애는 밀려오는 파도 같기도 했다가 어떨 때는 부서지는 포말 같기도 했다. 감정의 시작과 끝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도훈을 보고 있으면 바닷물을 퍼마신 사람처럼 갈증이 났다.

 

정환의 귀국은 15년 만이었다. 대니는 티켓을 쥐여주고는 한국에서 개통된 핸드폰을 건네며 조금 쓰게 웃었다. 숨죽여 사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알 수 없는 말을 섞어 아프게 키스했다. 그리고 조금 슬픈 얼굴로 헐떡이며 제 위에서 흔들리는 얼굴이 끝이었다. 대니는 정환이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총기 난사 사건의 피해자로 뉴스에 나왔다. 진짜로 죽어버렸는지 대니의 흔적이 완전히 지워지기도 전에 정환은 그가 시키는 대로 한국으로 도망치듯 떠밀려왔다. 이유도 모른 채 미국 집은 빠르게 처리되었고 이미 서류정리가 된 후여서 핸드폰 메모에 저장된 주소를 들이밀며 택시에 탔다. 한참을 망설이던 택시 기사가 내려준 곳에 도착하자 그 머뭇거림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뒤늦게 알게 되었다. 공항에서 한참을 달려 도착한 어느 작은 바닷가에 내린 정환은 저를 두고 죽어버린 어머니와 대니가 미워졌다. 바다에 주저앉아서 그들을 원망하며 악을 지르고 울어도 보고 별 짓을 다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

 

대니가 마련한 작은 빌라의 3층에 들어갔을 때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겠다고 결심한 정환이 항공권을 검색했다. 온통 얼굴을 적신 눈물을 훔치며 씩씩대는 그의 시야에 제 이름이 새겨진 하복 셔츠가 걸려있었고 대니의 글씨체로 삐뚤삐뚤하게 써진 한글 메모가 결국 정환을 무너져내리게 했다.

[ 잘 어울리겠다 ]

 

 

***

 

 

구겨진 말보로 레드가 도훈의 손에 잡혔다. 몇개비 비워지지 않은 새것 같은 담뱃갑이 손 끝에서 머뭇거리다가 도훈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그렇게 빈손이 되면 정환이 그날은 더 이상 담배를 찾지 않았다. 언젠가 담배를 왜 피우냐는 도훈의 물음에 지루해서- 라는 대답을 하는 정환에게 피우지 말라는 소리는 할 수 없었다. 그 지루하다는 말을 혹시라도 저에게도 내뱉을까 봐. 정환은 나타날 때 처럼 언제든 저 마르고 버석한 표정으로 여기를 떠나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언제나 초조한 마음은 도훈의 몫으로 남겨져 손톱 끄트머리를 쥐어 뜯었다.

 

"형, 보여줄게 있어."

"...으응?"

 

느릿하게 이어지는 음성에 조급해진 도훈이 그의 팔목을 잡아당겨 일으켰다. 이끄는 대로 자전거에 올라타서는 평소에는 가지 않던 소나무 숲 뒤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여기 오고 나서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곳이라 정환의 눈이 잠깐 동그랗게 떠졌다. 아무래도 믿을 건 지금 땀이 조금 스민 도훈의 등뿐이라 조금 힘을 줘서 붙잡았다. 잡혔던 손목 부근이  뜨끈했다. 소나무 숲을 빠져나와 오래된 도로를 더 달렸을 때 얼굴에 닿은 소금기가 버석하게 느껴져 끈적거렸다. 오래된 페인트칠이 벗겨진 작은 방파제에서 멈춘 도훈이 여즉 제 허리춤을 붙잡은 손을 톡톡 두들겼다.

 

"다 왔어."

 

도훈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던 등대는 시간의 유속을 견딘 흔적을 오롯하게 보이며 바다를 등지고 서 있었다. 한참을 올려다보는 정환의 셔츠 자락을 끌어다가 등대에 세운 도훈이 손끝으로 작은 프레임을 만들어 장난스레 얼굴에 가까이 대고는 활짝 웃었다. 오- 그림이다. 그림.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얼굴에 정환도 조금 따라 웃었다.

 

"보여주고 싶었어."

"등대?"

"아니, 저기."

 

손끝으로 가리킨 방파제 아래쪽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투명한 바다가 일렁였다. 파도가 밀려왔다 부딪히는 거품이 사라지면 시푸른 바닷물이 안쪽에서 소용돌이 치는 듯 울컥거리며 솟아 오르기를 반복했다.

 

"내가 아홉살 때였나, 친구들이랑 학교 끝나고 여기까지 와서 놀았던 적이 있거든. 근데 어떤 형들이 다이빙을 하면서 놀길래 앉아서 구경했어. 수영할 줄 안다니까 자꾸 우리도 뛰어보라는 거야."

 

방파제 끝에 걸터앉은 둘의 다리가 물결 끝으로 흔들거렸다. 파도 소리에 도훈의 목소리가 감겨서 듣기 좋았다. 가만히 눈을 깜빡이는 정환의 얼굴 한번, 투명한 물 깊은 곳을 한 번씩 돌아보며 말하는 도훈의 얼굴은 꼭 울 것만 같았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손끝이 붉어진 눈가 언저리까지 닿으려다 이내 내리고는 팔을 포개 무릎 위로 올린 정환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무서워서 안 뛴다고 하니까 형들이 엄청 놀리는 거야. 근데 그때 솔직히 나도 무서웠거든. 그래도 바다에서 자란 놈이 바다 무서워서 못 들어가는 건 좀 창피했어. 내가 대표로 뛰겠다고 팬티 바람으로 여길 뛰었다? 어떻게 됐게?"

"....어떻게 됐어?"

"음... 죽을 뻔했어."

"안 죽어서 다행이네."

 

순간 정환은 비슷한 장면을 떠올렸다. 집 근처에 있던 호수의 나무 선착장 끝에 서서 망설이던 저를 껴안고 호수 위로 풍덩 빠졌던 그 장난기 가득했던 그를. 호수가 무섭다고 울었던 그 어느 날의 정환을 위해 대니는 기꺼이 함께 뛰어들었다. 자연스레 수영을 가르쳐줬고 물속에서 아가미를 연 듯 부드럽게 움직이며 키스했었다. 그 얼굴이 순간 파도 끝에 겹치며 부서졌다.

 

"저기가 와류가 심한 부분인데 그땐 모르고 뛰어든 거지. 갑자기 아래로 쭉 빨려 들어가는데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제자리 인 거야. 꼭 바다 안에 갇힌 기분이 들었어. 수면 위로는 분명히 해도 보이고 하늘도 보이는데 유리 벽인 것처럼 꽉 막힌 기분. 아, 이렇게 죽는구나 싶고 그냥 몸에 힘이 탁 빠지더라. 근데 숨 쉬는 것도 까먹을 정도로 그때 물속에서 본 하늘이 예뻤던 기억이 나."

"무서운데? 이미 그때 죽은 거 아니지."

"아마 그럴걸?"

 

눈이 동그래진 정환이 제법 진지한 표정의 도훈의 얼굴을 보고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야 진짜 하나도 안 웃기다.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던 정환이 아 안 웃기다- 중얼거리더니 이내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참아내는 소리도 없이 턱 끝으로 맺힌 눈물이 시멘트 바닥으로 물 자국을 내며 툭툭 떨어졌다. 물끄러미 정환을 그리고 소용돌이 치는 맑은 물속을 한 번씩 돌아본 도훈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형, 수영할 줄 알아?"

 

울면서도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정환의 손목을 끌어내려 얼굴을 손바닥으로 벅벅 닦아낸 도훈이 웃다가 우는 거 금지- 하더니 제 쪽으로 급하게 끌어당겨 안았다. 마주 닿은 가슴이 파도보다 크게 두근거린다는 생각이 들었고 순간 몸이 붕 떠올랐다.

 

정환을 안고 요란하게 바닷속으로 뛰어든 도훈이 끓어오르는 물보라 속에서도 손을 잡았다. 아래로 가라앉는 정환을 당기고 수면위로 끌어올렸다. 참았던 숨을 맞닿은 파도 위에서 거칠게 내뱉으며 쪼그라든 폐를 크게 부풀려 공기를 마신다. 콜록대고 허우적거린 저와 다르게 팔을 저어 여유를 부리며 떠 있는 도훈을 보고 진짜로 웃음이 터졌다.

 

"너 미쳤어?"

"울다가 웃는 것도 금지."

 

입으로 들어오는 짠 바닷물을 푸푸대고 내뱉으며 짙어진 얼굴로 다가오는 도훈에게 손에 모아쥔 물을 뿌려 응징했다. 숨참으라는 말에 크게 눈이 떠지고 있는 힘껏 공기를 담았을 때 도훈이 아래로 당기는 힘에 수면 아래로 잠겨 물보라를 일으켰다. 

 

조금만 가라앉아도 아래로 깊숙하게 빨려 들어갈 것 같아 도훈의 손을 힘주어 꽉 잡았다. 팔을 저으며 가리킨 손끝에는 말한 대로 투명하게 펼쳐진 수면 너머의 하늘이 푸르게 쏟아졌다. 일렁이는 물살 위로 빛이 부서지는 장면에 눈을 감고 휩쓸리는 모든 것이 편안했다. 유리로 만든 투명한 관에 갇힌 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순간 바닷속의 산호초가 된 것처럼 모든 기억이 발끝에서부터 퇴화하길, 대니도 엄마도 스쳐 지나가 무감각해지기를 바랬다. 굳어져서 그 언젠가 파도에 부서져 버리는 딱지가 되기를 바랬던 것 같기도 하다. 포말을 태운 바다가 끝도 없이 밀려왔다.

 

 

**

 

여름의 끝을 알리는 비가 온종일 쏟아졌다. 자전거 없이 한 우산을 쓰고 나란히 걸어온 도훈의 한쪽 어깨가 잔뜩 젖었기에 빌라 입구에서 돌아서려는 팔뚝을 붙잡았다. 동그래진 눈으로 되묻는 도훈을 비 좀 그치면 가라 했더니 귀 끝까지 붉어졌다. 바닷속보다 투명해서 정환이 작게 웃었다.

 

 우산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현관에 크게 울렸다. 정말 들어와도 되는지 고민하는 듯한 표정의 도훈이 망설이다가 신발을 벗고 서 있는 동안 정환이 익숙하게 수건을 꺼내와 건넸다. 꿔다놓은 보릿자루 처럼 서 있던 도훈을 끌어다가 소파에 앉혀놓고 초점이 나간 시야에 하얀 손을 휘휘 저었다. 정환이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비 냄새와 희미하게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도훈의 표정이 심각하게 구겨졌다. 미약하게 에어컨이 돌아가며 바람 소리와 창밖으로 멀어지는 빗소리 같은 게 꼭 꿈처럼 몽롱해졌다. 시야에서 흔들리는 하얀 손가락을 저도 모르게 쥐어버린 도훈이 멈췄다. 창밖의 장대비가 세상에서 둘을 가린 듯이 세차게 쏟아지기만 했다. 멸망해버린 지구에서 둘만 남은 것처럼 한참을 시선을 맞대고 피하질 못했다. 남겨진 유일한 인류라도 보는 눈으로 쳐다보던 눈은 너무 축축했는데 목구멍은 갈증으로 타는 것 같았다.

 

서있던 정환이 고개를 숙여 가까워지고 느릿하게 이어지던 장면이 가득 채워졌다. 조금만 움직여도 닿을 것 같아서 도훈은 숨을 참았다. 내리 깐 속눈썹이 흔들리고 있었다. 홀린 듯이 가느다란 목덜미를 끌어당긴 도훈의 눈도 마저 감겼다. 감각을 하나 차단 하자마자 다른 감각이 무섭게 치고 올라와 끌어당겼다. 부드럽고 뜨거운 것이 갈라진 입술 사이를 훑고 지나간다. 말랑하고 미끄러운 살덩이가 축축하게 다가와서 엉겨 붙었다. 데일 정도로 뜨거운 도훈의 손이 정환을 조금 더 안으면서  쇼파로 깊숙하게 무너져내렸다. 반쯤 무릎으로 걸터앉은 정환이 도훈의 목으로 팔을 두르면 두근대는 가슴이 맞닿았다. 입술을 댄 채로 조금 웃는 정환을 올려다보며 도훈이 셔츠 안쪽의 허리를 당기며 올려다본다. 무언가 말하려는 도훈의 벌어지는 입술로 기다렸다는 듯 침범하는 혀가 점막 안쪽을 문지르고 핥아내며 움직였다. 습도 높은 소리가 섞이며 헤집는 살덩이에 도훈이 허리께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앓는 듯이 끙끙대는 작은 소리마저 정환에게 삼켜졌다. 현실과는 다르게 숨에서는 바싹 마른 햇볕의 냄새가 쏟아졌다. 고개를 살짝 틀며 아랫입술을 느릿하게 빨고 삼키기를 반복하던 정환이 머뭇대는 도훈의 혀뿌리까지 휘감아 올리며 코끝을 문대온다. 틈 없이 맞닿은 살이 끈적하게 부딪히며 흡착하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귀 끝까지 빨개진 도훈이 입을 크게 벌리고 정환이 한 것보다 더 거칠게 혀를 빨아올려 감았다. 뭐든 빨리 배우는 도훈이 머뭇대면 정환은 손을 기꺼이 내밀었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입술도 뜨끈한 숨도 참지 않고 쏟아내면 도훈이 끌어내어 같이 헐떡여주었다. 안쪽의 여린 살을 초조하게 훑어나가던 도훈의 망설이는 손끝이 티셔츠 안쪽의 맨살에 닿았다. 뜨거운 숨이 쏟아지며 떨어진 입술 새로 투명하게 타액이 실같이 이어졌다. 일렁이는 눈으로 정환을 올려다보는 도훈이 뜨거웠다. 

 

"형.."

"하아- 왜.."

"저 혹시... 너무 못해요?"

"...."

".. 처음이라서요."

 

짙은 눈썹이 구겨지며 제법 진지한 말투로 처음을 고백하는 도훈에 웃음이 터진 정환이 끕끕대다가 결국 이마를 어깨에 묻으며 한참을 들썩였다. 마른 등을 끌어당기며 그래서 잘한 건지 모르겠다는 도훈의 중얼거림에 그제야 고개를 들어 마주 본 정환의 눈가가 붉었다. 누군가의 처음은 이런 기분이었구나... 꼭 눈물을 참는 표정으로 도훈을 내려다 봤다. 조심스레 도훈이 입술을 맞대고 쪽- 쪽쪽. 몇 번 더 꾹꾹 누르고는 혀를 내어 핥았다. 

 

"형. 정환이형... 좋아해요."

"....."

"좋아해요."

 

정환은 그 입속으로 한 번 더 풍덩 빠져들며 누군가의 처음을 받아들였다. 도훈의 서툴고 풋내나는, 아직은 미완의 입술과 가슴 사이의 짧은 손 한마디쯤의 거리에 자신을 가둘 준비가 되어있었다. 이번에는 도훈이 손을 내밀어 꺼내주지 않으면 기꺼이 갇혀서 그 애의 투명한 속을 영원히 유영하고 싶었다.

 

 

*

 

 

짙게 선팅된 세단이 골목 입구를 비집고 어울리지 않게 서 있었다. 차 앞에 서 있던 1층 아주머니가 급하게 손을 흔들어 지나치려던 정환을 불러세웠다.

 

"학생!! 학생!! 여기 분들이 학생 찾아온 거 같어."

"...저요?"

 

짙게 선팅된 창문을 반쯤 내린 남자가 타라는 듯 무심하게 손을 흔들었다. 손끝에 흐르는 불안한 감각을 애써 주머니에 넣어 숨기고 머뭇거리자 아주머니가 학생 맞다며 정환을 끌어 당겼다. 여러 번 고개 숙여 인사한 아주머니가 좌석 문까지 닫아주고 차 안에는 적막감이 흘렀다. 추울 정도로 세게 틀어진 에어컨 탓에 일어난 살갗을 움츠렸다. 

 

"학생이 신정환 맞는 것 같네."

 

제 교복 셔츠의 이름에 시선을 둔 남자의 눈매가 어디서 본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익숙하게 휘어졌다. 어디서부터 무례한 건지 가늠도 안돼서 눈썹 근처를 살짝 긁는 정환을 샅샅이 훑는 눈길에 내리려 문고리에 손을 옮기다 멈췄다.

 

"아버지... 궁금한 적 없었나?"

 

그제야 돌아보는 정환에 남자가 마른세수를 하며 시트에 몸을 깊숙하게 눕힌다. 아버지라는 낯선 단어에 얼어붙은 정환이 되물었다. 아버지요? 

 

"정확히 말하자면 생부."

"아버지... 없는데요."

 

비슷한 사람. 대니 말고는 없었는데- 떠오르니 저도 모르게 또 웃음이 비식거렸다. 표정을 살피던 남자가 손을 내밀자 앞좌석에서 서류뭉치가 넘어왔다. 영문으로 된 친자확인서에는 제 이름과 처음 보는 아마도 저 남자일 것이 분명한 낯선 이름이 쓰여 있었다. 

 

누군가의 내연녀인 줄로만 알았던 어머니는 이 남자의 첫사랑이었고 정환을 임신하자 미국으로 도망쳤다. 그래서 한참을 헤맨 끝에 찾았을 때는 어머니가 돌아오길 끝내 원치 않았다고 했다. 성인이 될 때까지 그의 도움으로 별 어려움 없이 지냈던 게 맞았다. 그리고 대니를 시켜 한국으로 오게 한 것도, 다시 찾아온 이유도 명확했다. 알지도 못하는 형이라는 사람의 부재로 급하게 빈 자리를 채워야 한다고.  별 웃기지도 않은 이유라서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이제 그만 같이 가자."

"찾아오지 마세요."

"지키고 싶은 게 있으면 이제 네 손으로 지켜야지?"

"......."

"여태 아무것도 지켜낸 게 없지 않나."

 

한결같이 부드럽게 웃던  그가 순간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본다. 지키고 싶은 게 뭐가 있더라- 이제는 어머니도 대니도 없는데. 자존심보다는 이제는 손아귀에 없는 것들을 먼저 떠올렸다. 그런 거 없다고 말하려는 입술 끝에 그 애의 웃는 얼굴이 걸렸다. 흔들리는 제 팔을 단단하게 쥐던 도훈의 체온이나 바닷물을 뒤집어쓰고 해맑게 웃으며 다가왔던 표정이 생생하게 밀려와 눈을 질끈 감는다. 

 

"그런 거 없어요."

 

거칠게 닫은 문짝을 등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도망쳤다. 한참이 지나도 건물 앞에 머물러있던 세단이 한밤중이 되어서야 사라졌다. 블라인드 틈새로 차가 사라질 때까지 노려보던 정환이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지키고 싶은 게 남아있을 리 없잖아. 자꾸만 차오르는 눈물이 일렁이는 시야에 바닷속에서 가라앉는 저를 끌어 올리던 도훈의 얼굴이 흐릿하게 흩어졌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런 게 있을 리 없다고 머리통을 흔들 때마다 후두둑 눈물이 쏟아졌다. 물 밖으로 튕겨져 나온 물고기처럼 숨쉬기가 힘들어 가슴을 움켜쥔다. 손아귀에 잡히는 게 거칠게 뛰는 심장인지 도훈인지 몰라 흐느끼는 소리가 커졌다.

 

 

-

그가 준다던 아들이 되는 기회는 제법 허무하게 찾아왔다. 그건 우리가 절대로 원했던 방식은 아니었다. 

빌라를 통째로 산 그가 고의로 방화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고 연기에 질식해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났을 때는 우리의 여름은 이미 강제로 끝난 뒤였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희미하게 웃으며 다음은 내가 살던 빌라가 아니라 걔네 집일 거라는 말을 흘리며 돌아섰다. 수액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울음을 삼켜냈다. 나는 걔가 도훈이 아니기를 바라고 바라면서 숨을 죽였다. 정환의 뜨거운 계절은 그 뒤로 찾아오는 법이 없었다.

차를 세운 정환은 교복 셔츠를 펄럭거리며 뛰는 애들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목을 조여오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코트 위의 누군가에게 필터를 덧씌운다. 꼭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입꼬리가 올라가며 호선을 그리는 입매로 드러낸 가지런한 치아가 반짝이며 그 애의 건강함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야에 선명하게 그어졌다. 내리쬐는 해를 등진 인영의 머리 꼭대기에서 빛이 부서져 흩어진다. 시린 눈가를 손등으로 비비며 예고 없이 떠오른 잔상을 지워냈다. 손끝에 들린 담배가 재를 툭 떨어트리며 고요를 깨운다. 꽤 오랜 시간 상념에 젖어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흐리게 웃는 정환은 이제 시간이 지난 일로 더 이상 울지는 않았지만 표정은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바닥에 비벼끈 꽁초를 털어 주머니에 넣고는 돌아서서 차 문을 소리 나게 닫았다. 산뜻하게 차단된 공기가 서늘하게 피부에 닿는다. 짙게 선팅된 세단이 정환의 무표정을 숨기고 도로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마음 어느 한쪽에 자리 잡은 그 애를 밀어낼 생각이 전혀 없었고 영원히 닫아 둔 채로 가두는 게 나았다. 언젠가의 여름은 결국 가라앉아 바닷속 깊은 곳의 빈 조개껍데기 처럼 뒹굴고 있을 것이다. 정환은 제가 선택한 그 어딘가에서 아직도 여전히 유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손 한마디의 짧은 거리에서 기꺼이.

 

여름은 아직도 힘이 드는 계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