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올 리 없다

수평선

형은 사람들에게 우리를 정의해보라고 하면 다들 입을 모아 '더럽다'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겨울에는 튼 지 5분도 안 돼서 온수가 끊기는 집에 살면서도 우리는 늘 꼬박꼬박 씻었고. 싸구려 벽지 한쪽이 곰팡이로 물들지언정 쓰레기는 곧장 갖다 버렸고. 볕 드는 구석이 없어 물비린내 나는 옷을 입고 다니기는 했어도 빨래 당번을 잊은 적은 없다. 도대체 뭐가 더러운 거냐고 묻자 형이 말했다. "우리."


아니 올 리 없다

 

숨만 쉬어도 등줄기가 젖는 계절에 매일 같이 비탈길을 오르내려야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형 따라다니면서 구한 원룸은 집주인이 관리 안 한 티가 군데군데 역력했고 없느니만 못한 작은 창문이 어설프게 달려있어 환기도 통풍도 잘 안됐지만 불만 따윈 없었다. 그런 감정은 품어봐야 결국 내 손해가 된다는 걸 우리 형제는 잘 알았다.

나보다 먼저 시설을 나간 형은 내가 나올 때까지 2년 가까이 쪽방에서 지냈다. 계약금을 입금한 후 형은 한 칸짜리라는 점은 쪽방과 같지만 방 안에 싱크대도 있고 세탁기도 있고 화장실도 따로 있어서 좋다고 했다. 사실 그래봐야 태어났을 때부터 살던 집과는 비교도 안 될 크기라는 걸 우리는 알았다. 그러나 돌아가지도 못할 과거에 머무르는 건 미련한 짓이었다. 애초에 우리 형제는 시설에 들어갈 때 그 시절을 기억에서 과감히 지웠다. 서로가 있어서 금방 순응하고 적응할 수 있었다. 물론 형이 했던 말은 뼈에 새기듯 오래오래 기억하기로 다짐했다. 형은 쪽방에서 지내는 2년간 보증금이며 생활비를 착실히 모았고 그 와중에도 나를 만나면 꼭 맛있는 걸 사 먹이고 용돈도 챙겨줬다. 나보다 고작 두 살 많으면서. 형이 내게 해준 것보다 몇 배는 크게 돌려주어야지. 나는 매일 다짐했다.

이사 첫날. 형이 준 용돈으로 산 치킨을 나눠 먹으면서 다음 집은 두 배 넓은 곳으로, 그다음 집은 세 배 넓은 곳으로, 나중에는 한 열 배 넓은 데서 서로 용건 있으면 전화로 얘기하면서 살자고 도란도란 꿈을 펼쳤다. 그러다가 좀 지겨우면 각자 한 채씩 장만해서 윗집 아랫집에 살자고 부풀리기도 했다. 간만에 한자리에 누운 밤. 우리는 기어코 집안을 말아먹은 아빠에게 딱 한 가지 고마운 게 있다면 남다른 단순함이라고 결론지었다. 아빠의 천성은 좋게 말해 단순함이고 정확하게는 대책 없음이어서 조금 나사 빠진 연결고리였지만 우리는 그 또한 파고들지 않고 단순하게 넘겼다. 

물론 누군가는 같은 상황을 고작 열아홉에 닥친 시련이라고 서술할지도 모르고 처지를 아는 어른들 대부분은 연민 가득한 눈으로 어깨를 다독였으나 내 생각은 달랐다. 열아홉은 별일 없다면 또 운이 좋다면 살날이 훨씬 많이 남은 나이였다. 내 인생은 결국 내 것인데 고작 시선 따위에 휘둘릴 필요 없었다. 쓸데없는 감정 낭비는 질색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또한 근사하고 낭만적인 추억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합법적으로 주류를 살 수 있는 나이가 되기 전부터 독립이라니. 어른스러운 수준이 아니라 진짜 빠르게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게다가 나는 열아홉이 된 지 고작 3개월 만에 10cm가 훌쩍 더 자랐다. 맥없는 전등이 달린, 층고가 낮은 단칸방에서도 그렇게 잘만 컸다. 형은 혹시 다른 집에서 뭐 얻어먹고 다니는 거냐고 장난스레 물으면서도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열아홉에 10cm가 자란다는 건 정말이지 끝내주는 일이었다. 내게 열아홉이라는 나이는 더 어린 시절부터 단어만으로 로망이었다. 나는 소년에서 청년이 되기 직전의 내 모습이 늘 궁금했는데, 길을 가다가 문득 비치는 유리 속 나는 내가 기대했던 열아홉의 나보다 더 멋있었다. 크리스마스에 다 같이 보았던 애니메이션처럼 시간을 달려 스물아홉의 나를 보고 오고 싶을 만큼. 열아홉, 스물아홉……. 혀를 굴리는 감각까지 좋았다. 

골목 초입에서 30년간 미용실을 운영한 이모가 은퇴 기념이라며 에너지 소비 효율 2등급짜리 선풍기를 양도해 줬다. 실상은 잔짐 처분이었지만 나를 불러세우는 목소리에 분명 애틋함도 느껴졌다. 빛이 바래 연식이 좀 되어 보여도 체온 높은 우리 형제에게 선풍기는 단비와 같아서 넙죽 인사하고 감사히 받았다. 이모는 급하게 끼니 챙길 때 꺼내 먹던 도시락 김도 몇 통씩 챙겨주었고 박카스가 잔뜩 든 냉장고 옆에 덕지덕지 붙여둔 치킨집 쿠폰도 모조리 떼주었다. 은퇴한다고 해서 손이 굳는 건 아니니까 한 번씩 머리 자르러 오라고 전화번호도 알려줬고 여자 친구 생기면 쓰라고 왁스와 스프레이 그리고 안 뜯은 꼬리빗도 줬다. 일단 주는 대로 받다 보니 짐이 많아졌다. 키가 자란 만큼 힘이 세진 건 아니었으나 안 도와줘도 되겠냐는 걱정 어린 말에 젊어서 괜찮다고 웃어 보일 넉살은 있었다. 열아홉이니까. 나는 열아홉이 된 내가 좋았다.

호기롭게 미용실을 나서긴 했는데 오래된 선풍기에 잡다한 짐들을 들고 오르막을 타는 건 꽤 고된 일이었다. 힘들 때마다 어깨에 짊어진 선풍기를 고쳐 들었다. 계단에서 하품하던 고양이가 기지개를 켜고는 다가왔다. 다리에 몸을 비비며 치대는데 만져줄 손이 없어서 가만 보고만 있었더니 기분이 상했는지 홱 도는 게 귀여워 웃음이 터졌다. 웃고 나니 힘이 나서 계단을 두 칸씩 올랐다. 발밑에 짐들을 하나씩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 평소답지 않게 에어컨 냉기가 훅 끼쳤다. 형의 낡은 운동화 옆에 낯선 운동화 한 켤레가 있었다. 형이 힉,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김또또 짐이 왜 이렇게 많아. 선풍기는 뭐야?"

"미용실 이모가 가게 정리한다고 그래서 받아왔어."

"잘했다. 더운데 고생했네."

"복지사 선생님 오셨어?"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화장실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형이 씩 웃으며 고개 저었다. 나는 의외의 답에 긴장해 서둘러 침을 삼켰다. 시야에 들어온 인물 또한 의외였다. 

"정환아. 도훈이. 너 정환이 형 기억하지? 형 중학교 때 친구."

"안녕. 도훈아. 키 많이 컸네."

"…안녕하세요."

정환이 형을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같은 중학교에 다닌 시절도 있었고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도 했고 방학에는 형과 함께 피시방에 가기도 했으니까. 애초에 정환이 형은 친분의 유무를 떠나 유명인사였다. 사람들이 정환이 형을 기억하는 키워드는 세 가지였다. 하얗고 잘생기고 착한. 사람들이 하도 남발해서 촌스러운 표현이 됐지만, 전형적인 엄친아.

그리고 살인자의 아들.

정환이 형의 아버지는 1년 전 벌어진 살인 사건의 가해자였다. 가해자 신상이 공개된 후 정환이 형은 다니던 대학에서 퇴학 처리되었다. 가해자와 가해자 아들은 엄연히 다른 인물임에도 세상의 기준은 그들을 분리하지 않았다. 동창들이 인터넷에 몇 차례 형의 선함을 증명하는 글이 올려주기는 했지만 늘 같은 댓글이 달린 후 삭제 처리되었다.

'사건의 피해자도 누군가의 가족이었습니다. 유가족의 일상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데 가해자의 가족이 평범한 일상을 영위해도 될까요?'

사건 이후 형은 내게 단 한 번도 정환이 형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나 또한 형에게 묻지 않았다. 그건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나는 형이 독립을 앞두고 있던 시절, 큰 누나 방이 비었으니 동생이 나올 때까지 함께 지내도 된다던 정환이 형의 호의를 기억하고 있었다. 형이 그 말을 전했을 때 나는 고민할 필요가 있냐고 했는데 형은 친구한테 신세 지긴 좀 그렇다며 벌써 거절했다고 말했다. "이미 걔한텐 고마운 게 너무 많기도 하고." 형은 애틋한 표정으로 덧붙여 말했다. 나는 형을 따라 끄덕였다.

그리고 가해자 신상이 밝혀진 날. 정환이 형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형이 쪽방에 들어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환이 형이 형을 얼마나 잘 챙겨주었는지 빤히 보고 들었음에도. 나 또한 그 덕을 봤음에도.

그날이 떠올라서 정환이 형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어색함을 읽어낸 형이 내 팔을 툭툭 흔들었다. 

"야. 또또. 너 왜 존댓말 하냐. 갑자기 낯 가리네."

"아니. 너무 오랜만이라서…."

내 말에 악의라고는 없었지만, 작은 목소리로 "그치." 하며 끄덕이는 정환이 형은 좁은 원룸에서 길을 잃은 얼굴이 되었다. 아차 싶었다. 우리 사이의 공백은 사유가 분명했다. 횡설수설 있는 그대로 뱉어낸 말이 정환이 형에게 힘든 기억을 불러오는 듯했다.

"그럼 다시 말 놓는다?"

나는 부러 철딱서니 없는 투로 말했다. 형이 씩 웃었다.

"그래. 김또또 하던 대로 해야지. 씻고 나와. 아이스크림 먹자."

"지금 먹자. 집 시원해서 땀 다 말랐는데."

"야. 그건 네 생각이고."

"진심. 만져 봐. 지금 완전 뽀송한데? 방금 태어난 수준인데?"

"까불지 말고 인마."

"하하."

우리 형제의 말장난은 정환이 형의 웃음에 가볍게 멎었다. 인사를 건넬 때도 은은하게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이었는데 그건 연습한 듯 가지런한 표정이었다면 이번엔 긴장이 완전히 풀린 입매였다. 생각해 보니 누나만 둘인 정환이 형은 우리 형제가 노는 방식을 신기해하곤 했다.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나도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씻고 나와 아이스크림을 퍼먹었다. 정환이 형이 대체 뭘 먹고 그렇게 쑥쑥 컸냐고 물었다. 그래봐야 두 형보다는 작았지만, 누군가 내 성장을 인지할 때마다 비실비실 입꼬리가 올라갔다. 게다가 누가 봐도 멋진 외관을 가진 정환이 형의 칭찬이라니 더 뿌듯했다. 심드렁한 척 "가족력 무시 못 하지~" 답하려다가 도로 꿀꺽 삼켰다. 말이 앞서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막 이러다가 형들보다 커지는 거 아니야?"

너스레 떨자 형들이 웃었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후에는 살이며 날개에 먼지가 잔뜩 낀 선풍기를 해체했다.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날개에 물을 끼얹던 형이 "또또." 하고 불렀다. 짧은 사춘기를 겪을 때도 형이 그렇게 부르는 건 좋아했는데 갑자기 좀 창피해졌다. 나는 정환이 형을 흘끗 보았다. 정환이 형은 선풍기 기둥에 붙은 KC 라벨을 읽고 있었다.

"또또 대답."

"왜!"

"정환이 당분간 여기서 지낼 거야."

나도 모르게 고개를 홱 돌려 형을 보았다. 형은 깨끗해진 날개를 수건으로 닦고는 킁킁대었고, 코를 찡그리고 일어나 휴지를 뜯었다. 웃돈 주고 산 실내 건조용 세제도 환기 안 되는 방에선 딱히 활약하지 못했다. 형은 다시 날개를 닦았다.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그럼 셋이 사는 거야?"

"응. 재밌겠지."

"어. 완전."

나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고개를 돌려 정환이 형을, 울렁이는 목울대를 보았다. 그제야 방 한구석에 놓인 짐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정환이 형은 긴장한 표정으로 입술까지 달싹였다. 

"잠깐만 신세 질게. 잘 부탁해."

"형 근데 손님이어도 빨래 당번은 얄짤 없어."

정환이 형이 또 하하, 소리 내 웃었다. 그렇게 웃는 걸 보니 정말 더 실감이 안 났다. 우리 사이의 공백을 만든 게 눈앞에 있는 사람의 아버지라는 게. 문득 쓴웃음이 났다. 사업을 번번이 말아먹고 알코올 중독자가 된 아빠나 동업자를 살해한 정환이 형 아버지나 갇혀있는 신세라는 건 같았다.

에어컨 덕이 크겠지만, 깨끗하게 닦고 조립한 선풍기 바람은 쾌적하다 못해 싱그럽기까지 했다. 우리는 선풍기 앞에 모여 앉았다. 회전 버튼을 누르고 어린 애들처럼 번갈아 가며 아- 소리를 내다가 한참을 웃었다. 형이 웃는 얼굴은 너무 익숙해서, 나는 자꾸 정환이 형을 볼 수밖에 없었다.

저녁으로는 정환이 형이 시켜준 피자를 먹었다. 지극히 평범한 집인데 꼭 어딘가에 놀러 온 것처럼 느껴졌다. 자꾸 기시감이 들어 생각해 보니 지난 여름 방학에 형과 묵었던 바닷가 근처 민박과 우리 집 분위기가 비슷했다. 물론 그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내가 다소 아담한 열여덟일 때. 키가 큰 우리 형이 쪽방에서도 씩씩할 때. 정환이 형은 최악의 여름을 보내고 있었을 테니. 

"이렇게 셋이 있으니까 좋다."

"진짜."

우리 형제의 말에 정환이 형은 양 볼에 가득 찬 피자를 급하게 씹어 넘기고는 "나도." 하고 끄덕였다. 스물한 살 정환이 형은 열여섯 살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성인 티가 물씬 났다. 어깨도 넓고 잘생기고 손도 크고 정말 멋있어서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괜히 목이 탔는데 종이컵이 비어있었다. 두 형 사이에 콜라병이 있었다. "형!" 하고 부르자 둘 다 나를 쳐다보았다. 그게 웃겨서 "누구 불렀게요~" 장난스럽게 묻자 정환이 형이 "정훈이겠지?" 했다. 김정훈. 신정환. 나는 형과 정환이 형의 이름이 많이 비슷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형의 이름엔 정환이 형도 있고 나도 있었다. 

"아닌데. 정환이 형인데. 나 콜라 좀."

콜라병을 건네달라는 뜻이었는데 정환이 형이 선뜻 뚜껑을 열길래 얼른 종이컵을 갖다 댔다.

"많이 먹어. 도훈아."

형은 항상 나를 '또또', '김또또'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 집에서 이름 그대로 불린 기억은 손에 꼽았다. 애정이 느껴져서 좋아하는 별명이었는데 정환이 형이 나를 '또또'라고 부르면 조금 싫을 것 같았다. 정환이 형만큼은 항상 나를 '도훈'이라고 불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걸 바로 말해버리면 형이 놀릴 게 뻔해서, 혹시 정환이 형조차 나에게 "또또야~" 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정환이 형이 또 "도훈아." 하고 불렀다.

"받아줘서 고마워."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걸까. 물론 같이 지낼 거라는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혹시 걸리면 어떡하지?' 걱정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정환이 형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받아줘서' 고맙다는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건 영 내키지 않았다. 내가 뭐라고. 형이 뭐라고. 그리고… 정환이 형이 뭐라고. 나는 그새 빈 종이컵을 손안에서 돌리며 정환이 형을 빤히 보다가 말했다.

"와줘서 고마워."

"핫소스 어디 있냐?"

참 이상하게도. 형이 대뜸 끼어들지 않았다면 나는 그 순간 정환이 형과 단둘만 있다고 착각했을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나와 정환이 형은 형이 알아서 핫소스를 찾을 때까지 서로 눈을 피하지 않았다. 열아홉의 나는 자신했다. 근사하진 않더라도 아늑한 이 집에서 함께 지내다 보면 정환이 형도 우리 형제처럼 과거를 깨끗하게 잊어버릴 수 있을 거라고.

"우리 또또가 공부하는 고3이었으면 내가 좀 고민했을 텐데. 공부엔 취미나 재능이 없는 친구라서 참 다행이야. 그치. 또또야?"

비집고 들어오는 형이 조금 얄미웠다. 하지만 그 또한 형딴의 배려라는 걸 알았다. 나는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그니까. 누구 동생답게."

"오늘 김또또 타율 괜찮네. 야. 한 조각 더 먹어라."

"형이 쐈냐? 정환이 형이 쐈지."

"많이 먹어. 도훈아."

그 순간. 정환이 형은 절대 나를 '또또'라고 부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입가가 간지러웠다.  

셋이 함께 잠드는 첫 번째 밤. 나는 장유유서 운운하면서 정환이 형에게 베개를 양보했다. 몇 번씩이나 괜찮다고 하는 걸 못 들은 체하고 냅다 가운데에 드러눕자 정환이 형은 또 작게 "고마워. 도훈아." 했다. 180cm가 넘는 두 형과 180cm 조금 안 되는 나까지. 남자 셋이 누우니 방 크기가 체감되었다. 만약 내 키가 더 컸거나 형들만큼 어깨가 자랐다면 살짝 난처했겠다고 생각하니 비실비실 웃음이 나왔다.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했다. 잠들기 전 생각했다. 정말이지, 끝내주는 열아홉이라고. 

  

우리는 한 칸짜리 방에서 참 사이좋게 지냈다. 사이가 나빠지면 곤란한 크기여서도 있지만, 함께 지내면서 느낀 바로는 우리 셋은 원래 같이 지냈던 것처럼 합이 잘 맞았다. 사실 딱히 부딪칠 일이 없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형들은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일하러 가거나 늦은 밤에 나가 이른 새벽에야 돌아오곤 했다. 미리 깔아놓은 침구에 형들이 조용히 앓는 소리를 내며 누울 때 느껴지는 사부작거림이 좋았다. 환기가 되다 말아 항상 습기가 남아있는 욕실도 싫지 않았다. 세 개의 칫솔과 두 개의 면도기 그리고 셰이빙 폼 한 통을 보면 괜히 웃음이 나왔다. 나더러 수염도 안 나는 꼬맹이라고 놀리는 것치고 둘 다 수염이 그렇게 많이 나는 편도 아니어서 더 웃겼다. 

형들이 밤에 출근하는 날에는 항상 저녁을 함께 먹었다. 형은 일하면서 생긴 일을 사소한 것 하나하나 이야기해 주었다. 입담 좋은 형은 어릴 때부터 무슨 이야기든 재미있게 했고, 정환이 형은 원래 웃음이 헤픈 건지 같이 겪은 일이어서 그런 건지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들으며 맞장구쳤다. 종일 끼고 있던 마스크를 벗고 홀가분해진 탓일지도 몰랐다. 나는 형이 타고난 입담으로 풀어내는 일화를 듣는 것보다 정환이 형을 지켜보는 일이 더 즐거웠다. 나는 정환이 형이 아주 걱정 없는 사람처럼 웃는 게 너무 좋았다. 내가 보기에는 형도 그런 눈치였다. 그래서 자는 내내 코를 골 정도로 피곤해도 잠들기 직전까지 시시콜콜한 농담을 멈추지 않는 것 같았다.

정환이 형은 가끔 애처럼 손뼉도 쳤고 옆 사람 허벅지를 탁탁 내리치기도 했다. 정환이 형이 큰 손으로 내 무릎을 주무를 때 나는 긴장했고 몸에 힘이 들어갔고 입술을 깨물었다. 간지럽고 뜨거웠다. 한 번은 정환이 형이 그렇게 행동할 때 형은 어떻게 반응하는지 슬쩍 보았다. 형은 몸에 손이 닿든 말든 연체동물처럼 늘어져서 웃기 바빴다. 딱딱해 보이지도 않았고 더워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형은 정환이 형의 어깨를 붙잡고 탈탈 흔들면서 웃어대었다. 

하루는 정환이 형이 배에 쥐가 날 만큼 오래 웃었다. 아프다며 드러누운 납작한 몸이 꼭 바닥처럼 보였다. "바닥이세요?" 내 말에 정환이 형은 웃다가 울기까지 했다. 처음엔 우리도 따라 웃었다. 울음소리가 점점 숨 가쁘고 서러워지자 형은 웃음을 멈추었다. 나도 웃음을 멈추었다. 형이 입 모양으로 불을 끄라고 했다. 나는 얌전히 말을 들었다. 어두운 방에 누워 정환이 형이 우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세상이 너무 새까맣게 느껴졌다. 함부로 달래줄 수 없어서 그저 눈을 감았다. 한참 울던 정환이 형은 조심히 일어나 욕실에 들어갔고, 또 한참 뒤에 나와 조심히 누웠다. 나는 자는 척했다. "힘들지. 정환아." 형이 정환이 형에게 작게 말을 걸었다. 정환이 형은 "도훈이 놀랐겠다." 하고 말을 돌렸다. 

그날은 정말 오랜만에 네 가족이 함께 살던 시절이 꿈에 나왔다. 아빠는 취해있지 않았고 엄마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 또한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아빠는 엄마가 죽었다고 했지만 나와 형은 엄마가 살아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빠 딴엔 헛된 희망 품지 말라는 배려였으나 퍽 투박한 방식이었다. 간만의 꿈은 거창하지 않았다. 멀쩡한 아빠와 평온한 엄마가 작은 가구를 조립하고, 형과 나는 바닥에 드러누워 번갈아 가며 만화 주제가를 부르는, 정말 평범하고 시시한 꿈이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눈을 떴다. 정환이 형이었다. 품 안에서 조금 오래 울었다. 

어느 날, 정환이 형이 씻고 있을 때 형에게 말했다. 이렇게 오래오래 셋이 살면 좋겠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고 형이 되물었다. 한 번 더 긍정했더니 형이 씩 웃으며 말했다. 정환이한테는 정말 고마운 게 너무 많다고. 근데 도훈이 너한테는 고마운 게 더 많다고. 근데 더 고마운 사람이 더 더 고마운 말을 해주니까 더 더 더 고맙고 고맙다고. "형 혹시 고구마 장수가 꿈이야?" 장난치며 넘어갔지만 궁금했다. 정환이 형에게 뭐가 그렇게 고마웠던 건지. 그러면 혹시 이건 갚아나가는 일인 건지. 다 갚고 나면 어떻게 되는 건지. 정환이 형이 나왔다. 형이 씻으러 들어갔다. 

"정환이 형. 우리 계속 같이 살자."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진심이야."

"진심이야?"

"응. 진심."

"아. 도훈이 때문에 눈물 날 것 같다."

정환이 형은 젖은 수건을 들고 눈물 닦는 시늉을 했다. 수건에서 물비린내가 났다. 빗발이 내리치는 창문을 가만 바라보던 정환이 형이 분명 씻고 나왔는데도 계속 샤워하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장마철이었다. 정환이 형에게 비극이 찾아왔던 시기이기도 했다. 장마철을 맞이한 정환이 형은 종종 언제 멎어도 이상하지 않은, 아주 오래된 초침처럼 보였다. 

"정훈이 도훈이 만나서 다행이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작년 여름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올해 여름 정환이 형은 좁은 원룸이 아니라 해외 어느 호텔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텐데.

정환이 형과 우리 형제의 만남은 비극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정환이 형의 아버지가 동업자를 죽이지 않았다면, 형은 몰라도 나와 정환이 형이 이렇게 애틋한 대화를 나눌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떤 만화처럼, 정환이 형에게 시간을 돌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정환이 형은 망설임 없이 작년 여름밤으로 돌아갈 것이다. 동업자랑 술 한잔하고 오겠다는 아버지를 붙잡고 나가지 말고 아들이랑 술 한잔하시라고 조를 테고……. 형은 가끔 정환이 형을 만나 고마움을 축적했겠지. 때때로 나도 함께 만났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집에 정환이 형이 발 들일 일은 없었을 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고마워. 도훈아."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돌이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현실은 만화도 영화도 아니니까. 넓은 집에서 살던 정환이 형이 좁은 원룸에서도 적응한 것처럼. 떵떵거릴 수준은 아니어도 친구들 부르는 데 망설임 없는 집에 살던 우리 형제가 좁은 원룸도 감지덕지하며 선뜻 호의를 베푼 것처럼. 우리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과거를 돌아보는 건 쓸모없는 일이었다. 죽지 않는 한 내일은 항상 오니까. 앞으로 나아가야 하니까.  

 

형과 달리 정환이 형은 잠귀가 어둡고 잠이 많은 편이었다. 형이 씻고 나와 나지막하게 정환이 형을 부르면, 정환이 형은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정환이 형이 비척대며 욕실에 들어가고 나면 형은 이불을 개어놓고 현관에서 맥반석 계란 네 알을 꺼냈다. 둘은 말없이 계란을 꼭꼭 씹어먹은 후 마스크를 끼고 나갔다. 형들은 먼지 많은 곳만 골라 다녔고 자다가도 잔기침을 했다. 그러면 나는 조금 조급해졌다. 시간이 착실히 흘러가는데 혼자만 아주 오랫동안 10대라는 특권을 누리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미안한 마음과는 별개로, 열아홉의 나는 마냥 어린애는 아니어서, 아침이든 밤이든 형들이 없을 때면 가끔 혼자 손이 바빠졌다. 이전에는 그저 배설 같은 행위였는데 어느 날부터 자꾸 머릿속에 잔상이 피어났다. 하얗고 넓은 손바닥. 곧고 길게 뻗은 손가락. 웃을 때 뒤로 휙 젖히는 고개. 긴 목과 불거진 울대. 윤곽이 분명한 어깨. 그런 것들이 아른거렸다. 

궁금했다. 정환이 형이 어떤 표정을 지으며 새하얘질지. 정환이 형도 사람이니 참기 힘들 때가 있을 테고. 형제에게 얹혀사는 좁은 방 욕실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한 날에는 웃는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어김없이 손이 닿을까 봐 무릎을 세워 앉게 되었다. 정환이 형이 "도훈아. 무슨 일 있었어?" 하고 물어오면, 나는 고개를 저으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복지사 선생님이 간만에 방문하는 날이었다. 나는 늘 그랬듯 한 개의 칫솔과 한 개의 면도기를 잘 숨겨두었다. 모 기업에서 후원해 준 생필품을 한가득 들고 온 선생님은 우리 형제가 시설을 나간 후에도 씩씩하고 밝게 지내서 보기 좋다고 했다. 걱정이 안 된다는 말이 듣기 좋았다. 지원 물품을 좁은 찬장에 차곡차곡 정리한 후에는 형들이 올 때까지 취업 지원 사업 책자를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별로 구미가 당기는 건 없었다. "도훈이는 모델 해도 되겠다." 선생님이 했던 말이 자꾸 떠올랐다. 사실 전에도 종종 들었던 말이지만 키가 훌쩍 자라고 나니 또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애들은 나를 더 이상 '귀엽다'는 표현으로 꾸미지 않았고 남자애들은 나를 은근하게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교복 안에 기본 티셔츠를 돌려 입고 다니는 모습마저 평가의 지표가 되었다. 여자애들은 내가 단정하다고 했고, 남자애들은 그게 가난의 증명이라고 했다. 수업을 마친 후 마라탕이나 탕후루를 사 먹으러 다니지 않는 것도. 저가형 프랜차이즈 카페에 죽치고 앉아 형형색색의 스무디를 사 먹지 않는 것도. 코인 노래방에 가지 않는 것도. 피시방에 가지 않는 것도. 두 장에 사천 원짜리 사진을 찍으러 다니지 않는 것도. 전과 달리 사소하고 자잘한 것들이 내 점수를 오르내리게 했다. 물론 아무렴 상관없었다. 모든 애들이 그러는 것도 아니고 학교생활이 과하게 따분해지지 않을 정도로 어울리는 친구들은 있었다.

"또또! 또 키 커또?"

"난 이제 진짜 멈춘 것 같은데 도훈이는 쑥쑥 크네."

"백날 커봤자 신정환 어깨 못 따라잡지. 센터 삼촌들이 정환이 보면 어릴 때 수영했냐고 그래. 가로 폭 좀 넓은 거 들어오잖아? 무조건 들고 부른다니까!"

"진짜 한두 번 그러시다 말 줄 알았는데."

"봐라. 니 딱 대라!"

"와. 방금 진짜 똑같았다."

내 기분을 오르내리게 하는 건 또래 애들의 숙덕거림이 아니라 형들과의 대화였다. 종일 같이 있는 형들이 일터에서 있던 일을 들려줄 때, 나는 쓸쓸해졌다. 둘이 나란히 목격한 일이니 서로 눈만 봐도 웃음이 번지는 게 당연한데 그걸 지켜보고 있으면 왠지 나만 다른 공간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세 개의 칫솔과 두 개의 면도기 그리고 셰이빙 폼 한 통을 보면 괜히 짜증이 나기도 했다. 둘 다 수염이 그렇게 많이 나는 것도 아니면서. 

"도훈이 얘기도 좀 들어보자. 학교 어때."

"그냥 맨날 똑같은데."

"에이. 도훈이 인기 엄청 많을 것 같은데. 여자애들 수업 안 듣고 도훈이만 쳐다볼 거 같은데."

"…어제 편지 받긴 했는데. 뭐 별로."

"편지? 야. 또또! 그런 건 같이 봐야지!"

"너는 무슨 편지를 같이 보자고 그래. 근데 도훈아. 뭐라고 적혀있었는지 알려줄 수 있을까?"

"지금 너랑 나랑 뭐가 다른 거야?"

기분이 좋다가 말았다. 나는 입을 꾹 닫고 아이스크림만 퍼먹었다. 형들 눈에는 종잡을 수 없는 감정 변화가 어리게 보일 거라는 걸 알면서도 좀처럼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었다. 

"정훈이도 인기 진짜 많았잖아. 인기 많은 형제네."

"소신 발언으로 나는 솔직히 셋 중에 우리 또또가 제일 잘생겼다고 본다."

"그만 먹을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기분이 순식간에 오르락내리락했다. 형이 나를 또또라고 부르는 것도 짜증 났고, 먼저 일어난 형이 정환이 형을 깨우는 것도 짜증 났고, 정환이 형이 씻는 동안 달걀을 까는 것도 짜증 났고, 형과 정환이 형의 이름 가운데에 나란히 '정'이 들어가는 것도 짜증 났다.

계속 그사이에 있다가는 헛소리하게 될 것 같아 습기가 남은 욕실에 나를 가뒀다. 여자애들이 내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투로 말을 걸어오든 동하지 않았다.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편지봉투는 열어보지도 않았다. 남자애들이 은근하게 비꼬는 것만큼이나 감흥 없는 일이었다.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 몸이 눅눅해지는 욕실이 싫었다.

갓 열아홉이 된 겨울의 나는 어엿한 어른이 된 듯한 기분에 우쭐해했다. 거울 속 나는 앳되고 설익은 모습이었지만 거침없이 그 너머로 달려갈 준비가 돼 있었다.

열아홉 봄의 나는 갑자기 자란 키를 주체하지 못하고 자주 삐끗했다. 물론 그중 대부분은 내 모습이 궁금해 가게 유리문들을 보며 걷다가 앞을 잘 살피지 못한 탓이었다.

열아홉 여름의 나는 남들보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순식간에 더워졌고, 삽시간에 식곤 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혼자 열 오르고 혼자 허무해졌다. 셋이 꽉 채워 사는 좁은 방에서 자꾸 혼자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머리가 자꾸 무거워졌다. 학교 운동장, 체육관 앞 트랙을 몇 바퀴씩 달렸다. 목에서 피 맛이 올라올 때까지 달리고 달려도 내 나이는 그대로였다.

 

여름 방학 동안 백화점 지하에 있는 의류 브랜드에서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시즌오프 기간에 고용 인원을 늘린 거라 급여가 주 단위로 들어왔다. 대기업이어서 그런지 시급도 세고 초과 수당도 쏠쏠했다. 덕분에 형들에게 밥을 사줄 수 있어 뿌듯했다. 쪽방에 살던 시절 틈틈이 나를 불러내 밥을 사 먹이던 형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형은 종일 옷을 정리하고 또 정리하느라 잔기침하는 버릇이 생긴 나를 보며 미안해했다. 형은 참 미안해할 것도 많았다. 그러는 자기는 파스를 달고 살면서.

정환이 형은 항상 식사하기 전, 식사하는 중에 대뜸 "많이 먹어. 도훈아." 하며 나를 챙겼다. 한 번은 "정환이도 많이 먹어." 했는데 정환이 형이 정말 얼빠진 표정으로 보는 게 웃겨 웃다가 사레가 들렸다. 등을 툭툭 두드리고 쓸어주는 큰 손바닥이 따뜻했다. 아니. 뜨거웠다. 뒤로 손을 뻗어 장난스레 손목을 움켜쥐었다. 정환이 형이 "어쭈." 하며 손목을 비틀었다. 놓아주고 싶지 않아 힘을 주었다. "아파. 도훈아." 앓는 소리가 눅눅했다. 그렇게 들렸다. "치킨 내가 다 먹는다." 형의 목소리가 들린 후에야 손목을 놔주었다. 치킨을 뜯는 손목에 붉게 자국이 나 있었다. 밤에 몰래 욕실에 서서 내 손목을 세게 쥐어보았다. 나라고 봐주는 거 없이 우악스럽게 잡았는데도 정환이 형 피부에 남았던 것만큼 붉지 않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쉬는 시간에 매니저 형이 따로 불러내었다. 식품관 팝업 스토어에서 산 도넛을 나눠주길래 넙죽 받아먹는데, 매니저 형이 혹시 대학에 안 갈 거면 계속 같이 일하자고 했다. 일머리가 좋고 손이 빠르다는 칭찬을 들으면서 딴생각을 했다. 나는 돈을 정말 많이 벌고 싶었다. 매장 앞에는 지상층과 연결된 에스컬레이터가 있었는데, 그 측면에는 브랜드 모델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여기저기 많이 나오는 연예인인데 내 눈에는 정환이 형이나 우리 형이 더 멋있었다. 그리고 몇 살 더 먹고 몸을 좀 키우면 내가 훨씬 멋있을 것 같았다. "저는 여기 모델 하고 싶은데요." 내 말에 매니저 형은 허, 웃음을 터뜨리며 도넛 하나를 더 들이밀었다. 

"넌 헛소리해도 미운 구석이 없어서 잘될 것 같다."

집에 돌아와 형들 앞에서 매니저 형 성대모사를 했다. 형은 역시 내 동생이라며 웃었고, 정환이 형은 작게 "헛소리 아닌데. 우리 도훈이 멋있는데."라고 했다. 유대 관계가 끈끈한 형들 사이에서 때때로 소외감을 느끼는 내가 아주 가끔 정환이 형과 단 둘뿐이라는 착각에 빠지는 까닭은, 과할 정도로 작게 말하는 정환이 형 때문일지도 몰랐다. 웅얼거리는 소리는 곤두세워 듣지 않으면 놓치기 마련이었다. 정환이 형의 말은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가끔 정환이 형의 성대를 열어보고 싶었다. 태어날 때도 조용히 응애… 했을까. 아기 시절 정환이 형이 궁금했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모습도 초등학교에 입학해 긴장한 모습도 처음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모습도 다 보고 싶었다. 조금만 일찍, 정환이 형 옆집에 태어날걸. 그런 허무맹랑한 생각을 다 했다. 

 

알바생 누나와 친해졌다. 누나는 내가 또래 남자애들과 달리 조용하고, 불필요하게 장난을 치거나 먼저 말을 걸지 않아서 편하다고 했다. 나 또한 누나가 학교 여자애들처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사사로이 말을 붙이지 않는 게 편했다. 누나는 나와 마찬가지로 매니저 형에게 정규직 제안을 받았으나 개강하면 지방으로 내려가야 해서 거절했다고 했다. 나란히 퇴근하던 중 어쩌다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냐는 누나의 질문에 돌리지 않고 내 이야기를 해주었다. 누나는 배가 고프다며 나를 대뜸 고깃집에 데려갔고, 잘 익은 고기를 접시에 올려주며 말했다. "많이 먹어. 도훈아." 정환이 형 생각이 났다. 사람 많은 식당에서 얼굴을 내놓고 밥을 먹을 수 없는 정환이 형 생각이 났다. 누나에게 미안할 정도로 많이 먹지 못했다. 헤어지기 전, 누나가 물었다. 

"괜찮으면 가끔 따로 볼래? 나 주말에 올라올 때."

불편한 제안은 아니었으나 바로 응하자니 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서 일단 미루어보려고 "성인 되면요." 짧게 대답하자 평소답지 않게 얼굴이 빨개진 누나가 팔뚝을 가볍게 때리며 웃었다. 또 정환이 형 생각이 났다. 하지만 나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고 맞은 부위는 하나도 뜨겁지 않았다.

"야! 내가 너무 좀, 그런 사람 같잖아!"

"어떤 사람이요?"

"됐어~ 성인 되면 연락해! 간다~"

"잘 가요. 누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제자리에 서 있었다. 누나가 싫은 건 아니었다. 누나는 항상 좋은 향기가 났고 일이 바빠도 늘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목소리도 그랬다. 조금 옅은 머리칼도 피부도 눈에 띄었다. 나이 차이는 정말 별생각 없었다. 누나는 형들과 같은 스물하나였다. 그러니까 나는 누나를 정환이 형 만큼 좋아하지 않았을 뿐이다. 문득, 한 달 남짓 사회생활을 해봤다는 이유만으로 스물하나가 그리 멀지 않게 느껴졌다. 지하철 유리에 비친 나는 그새 조금 더 자라있었다. 

오르막길을 부지런히 올랐다. 짐을 한가득 들고 땀을 흘리던 초여름을 회상했다. 미용실이 있던 자리에는 독립 서점이 들어왔다. 종종 귀염 떨던 고양이는 초록 대문 집에 사는 할머니네 정착했다. 3개월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나는 더 자랐고, 열아홉의 시작보다 끝에 가까워졌다. 방학이 시작되었을 때 셋이 약속한 게 있었다. 열아홉 마지막 여름 방학은 꼭 함께하는 여행으로 마무리하기. 계곡과 바다 중에 고민하다가 정환이 형이 해산물을 좋아한다는 말에 곧장 바다로 결정했다. 여름의 끝이자 가을의 시작을 앞두고 떠날 여행이 기대되었다. 발걸음이 점점 가벼워졌다. 

"이런 데 산다는데 어떻게 모른 척해?"

"너 그거 잘하잖아."

정환이 형의 목소리였다. 점점 가벼워지던 발걸음이 아주 무거운 추를 매단 듯 지지부진해졌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럼 그때 내가 어떻게 해야 했던 건데? 네가 나라면 뭐 달랐을 거 같아?"

"주영아. 나라도 그랬을 거야. 그러니까 마음 쓰지 말고 가." 

하얗고 마른 여자가 내려왔다. 울고 있었다. 나는 마저 계단을 올랐다. 주머니에 대충 넣어두었던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아무 영상이나 틀고 음량을 높였다. 당연하게도 빌라 앞에 정환이 형이 서 있었다. 형이 먼저 "도훈이다." 하고 말을 걸었다. 정환이 형은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나는 아무것도 못 들은 사람처럼 웃었다. 이어폰을 빼며 다가갔다.

"왜 나와 있어? 설마 나 마중 나온 거야?"

"맞지. 우리 도훈이 밥은 먹고 오나…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지."

"나 고기 냄새 많이 나지?"

정환이 형이 불쑥 고개를 빼고는 가슴께를 킁킁대었다. 동물 같았다. 씻고 내려온 건지 시원한 향기가 났다. 머리칼도 조금 덜 말라 있었다. 나는 입안 여린 살을 꾸욱 깨물었다. 박동이 거셌다. 집이 오르막길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키 큰 아기 꼭꼭 씹어서 많이 많이 먹었나요?"

"잘 못 먹었어. 영 안 넘어가서."

"아이고."

"형. 나 그거 해줘. 많이 먹어. 도훈아."

"갑자기?"

"응. 해줘. 듣고 싶어."

"많이 먹어. 도훈아아~?"

씩씩하게 끄덕이자 정환이 형이 웃었다. 머리칼을 가볍게 쓰다듬는 손길이 기분 좋았다. 

"정환이 형. 우리 나중에는 진짜 훨씬 더 좋은 데서 살자."

정환이 형이 웃음을 거두고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못 들은 사람처럼 굴었어야 했는데 결국 생채기를 못 숨기고 뱉어버렸다. 

"들었구나."

"골목이 좁잖아."

나쁜 말을 부정하지 않는 정환이 형에게 섭섭했다. 화까지는 못 내더라도 지적 정도는 해주지. 엿들은 대화와는 별개로 요즘 정말 집이 좀, 숨 막히게, 작게 느껴지곤 했다. 그래서 설움을 숨길 수 없었다. 정환이 형의 고요한 눈을 응시하면서 속으로 호소했다. 아직 어리니까 이 정도 투정은 감내해 달라고.

"…도훈아. 무슨 생각을 하든 형이 사과할게."

"여자 친구야?"

"그랬지."

"이제 안 사귀어?"

"응."

"절대 사귀지 마. 형이 아까워."

"알았어. 올라가자."

배려심은 부족하지만 한때 정환이 형과 가장 친한 사이였을 여자가 부러웠다. 앞장서서 계단을 오르는데 자꾸 주저앉고 싶었다. 바닥에 이불을 깔던 형이 왔냐며 인사했다. 왠지 어색한 투였다. 나는 열려있는 창문을 보았다. 낮고 작은 정환이 형의 목소리는 늘 바닥을 맴돌다 말지만, 힘 있고 또렷한 여자의 목소리는 층고 낮은 원룸 빌라 3층까지 충분히 치솟을 법했다. 정환이 형도 열린 창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머리에서 고기 냄새가 너무 많이 난다고 중얼거리며 욕실 문을 열었다. 습기가 훅 끼쳤다. 정말 푹 꺼지고 싶었다.

매일 매일 옷을 사러 오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부쩍 옷에 관심이 생겼다. 어차피 유니폼으로 갈아입는데도 출근할 때 입는 옷이 괜히 신경 쓰였다. 사람들은 옷을 정말 많이 쉽게 샀다. 당장 안 맞을 것 같긴 한데 옷에 몸을 맞춰보겠다고 결심하며 사 갔다. 시간 때울 겸 들어온 티가 역력한 사람들도 대강 훑어보고 뭐든 사서 나갔다. 교복 안에 기본 티만 돌려 입는 걸 까 내리던 남자 애들 목소리가 귓바퀴에 맴돌았다. 그 애들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내 출신지에 한 줄을 더한 아빠가 미웠다. 같은 맥락에서 정환이 형네 아저씨도 미웠다. 마음이 쉽게 불안해졌다. 

어린 시절부터 승부욕이 강했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음이 괴로울수록 욕심을 키우는 것으로 극복해 왔다. 누구도 함부로 떠들어댈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지. 치밀하고 객관적인 평가조차 저급하고 치졸한 질투로 느껴지게 인정받아야지. 더 자라서. 정상에 서서. 서글픈 눈을 빛내며 나를 올려다보는 이들을 꺼내줘야지….

캄캄한 어둠 속에서 형이 말했다.

"내일 못 일어나면 두고 간다~ 특히 신정환~"

"아… 자신 없는데…."

"야. 너 진짜 혼자 일어나는 습관 좀 들여야 돼. 우리 또또 봐. 너처럼 입 벌리고 자기는 해도 얼마나 잘 일어나냐. 그치. 또또야?"

"도훈이 자나 보다. 잘 자. 도훈아."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저씨는 대체 왜 사람을 죽인 걸까? 왜 그딴 짓을 해서 아무 잘못도 없는 아들을 이 작은 집에 숨어 살게 하는 걸까? 왜 가뜩이나 작은 머리통에 모자를 푹 눌러쓰게 하고, 왜 찌는 듯한 더위에 마스크를 끼고 다니게 하고. 내가 따로 보고 싶은 건 향기 나는 알바생 누나가 아니라 쉽게 붉어지고 작게 말하는 정환이 형이었다. 도대체 아저씨는 왜 가족들이 쉽사리 고개조차 못 들고 다닐 흉악한 짓을 벌인 걸까? 대체 왜? 속에서 굵직한 갈고리가 울컥울컥 올라왔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걸 삼키느라 괴로운 밤이었다. 방심한 틈에 정환이 형에게 죄다 쏟아낼까 봐, 또 어린 티를 못 숨기고 품에 파고들까 봐, 뒤척이는 척 등을 돌렸다. 

 

가을을 앞둔 바다는 생각보다 많이 차가웠다. 한바탕 놀고 나니 입이 짰다. 소금기를 씻어낸 후에도 괜히 미련이 남아 백사장에서 달리기 내기를 했다. 수산시장에 들러 회를 잔뜩 샀다. 아주 훌륭하지는 않지만 집보다는 좋은 숙소에서 부지런히 우물거렸다. 형들은 내가 성인이 되면 술을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원래 회에는 소주 먹어야 되거든."

"어차피 몇 달 안 남았는데 지금 알려주면 안 돼?"

괜히 눈을 빛냈다가 느릿느릿 훈계를 들었다. 형들은 몇 살 때 처음 마셨냐고 묻자 둘이 눈을 마주치고 하하 웃어대었다. 또 혼자가 되는 기분이 썩 달갑지 않았지만, 그래도 정환이 형이 웃는 걸 보니 기뻐서 깐족거렸다.

"밤바다 보고 싶다."

작은 목소리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일어났다. 밤바다를 보며 불꽃놀이를 했다. 타닥타닥 튀는 불꽃을 멍하니 보는데 형이 중대 발표를 하겠다며 목을 다듬었다. 물류 센터에서 친해진 삼촌이 일자리를 소개해 주었는데 조건이 괜찮아서 듣자마자 응했다는 얘기였다. 지방 몇 곳을 번갈아 가며 한두 달씩 합숙해야 한다는 점이 아쉽지만 혼자 두고 내려가는 게 아니라 마음이 놓인다고 형은 덧붙였다. 지난밤, 형이 정환이한테 했던 잔소리는 다 이유가 있는 거였다.

"몇 달 바짝 고생하면 더 좋은 집 갈 수 있어. 그때까지 정환이 말 잘 듣고. 정환아. 우리 또또 잘 챙겨줘."

가운데 앉아 있던 형이 백사장에 불꽃을 꽂고는 우리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지난밤을 생각하니 '더 좋은 집'이라는 말의 주변에 거스러미가 일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나는 나를, 그리고 형을 믿었다. 셋이 있어도 혼자인 것 같은 방에 둘만 남게 된다니 조금 설레기도 했다. 반면 정환이 형은 굳은 얼굴로 입술을 뜯고 있었다. 합숙이 필수이니 정환이 형에게는 혹여나 부담될까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와. 그럼 나 이제 정환이 형이랑 형이랑 안 나눠서 불러도 되겠다."

"좀 갑작스럽긴 하다…."

정환이 형은 그렇게 말하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형이 미안하다며 정환이 형의 어깨를 툭툭 쳤다. 

"춥다. 들어가자."

여름 끝물의 밤. 바닷바람은 시원하다 못해 쌀쌀했다. 나는 형들 사이에서 걸으며 스무 살이 되는 첫날에 일출을 보러 바다에 오고 싶다고 말했다. 형은 곧장 그러자고 했는데 정환이 형은 잠에 들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서글서글한 친구 없이 혼자 근무할 생각에 캄캄해졌거나 지난밤을 회상하면서 자책하는 걸까. 전자일 확률이 더 높아 보였다. 정환이 형의 인생에 우리의 좁은 방은 그 여자의 말마따나 '이런 데'에 해당하는 장소가 맞을 테니까. 딱히 부정하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되었다. 갑자기 기분이 또 곤두박질치는 것 같아서 애써 털어내고 잠을 청했다.

 

형과 달리 정환이 형은 일터에서 있던 일을 풀어주지 않았지만 형이 없다고 해서 식사 자리가 어색한 건 아니었다. 나는 개학 후에도 주말 알바를 계속했고, 매니저 형은 내가 퍽 믿음직스러웠는지 웬만하면 미성년자에게 안 맡긴다는 카운터 업무까지 알려주었다. 그리고 세상에는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진상 고객을 흉내 내면 정환이 형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도 했고, 넓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치며 탄식하기도 했다. 나는 나와 연을 이어가지도 않을 사람들이 부리는 객기에 풀 죽지 않았기 때문에 딱히 스트레스랄 건 없었지만, 정환이 형의 반응을 보면 피로까지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정환이 형은 늘 "많이 먹어. 도훈아."라고 했다. 그러면 나도 "많이 먹어. 정환아."라고 하고 싶었다. 정환이 형과 동갑이 되고 싶었다. 혹시 내가 형이고 우리 형이 동생이었다면 어땠을까? 궁금해졌다.

"형. 내가 친구면 어떨 거 같아?"

"음… 귀여울 거 같네."

"형만큼 친해졌을 거 같아?"

"음…… 료수 좀 줄래?"

"난 형이랑 친구면 좋겠는데."

"도훈이 귀엽지."

썩 마음에 드는 대답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형을 따라 하게 되었다. 여전히 잠귀가 어두운 정환이 형을 깨웠고 맥반석 달걀을 함께 먹었다.

아주 가끔 형이 올라오면, 나는 형이 그랬던 것처럼 정환이 형과 있었던 일화를 풀었다. 배달 음식을 다 먹고 정환이 형이 정말 괴상한 방식으로 그릇을 치운 사건이라든지. 빨래를 개는 건지 빨래로 만드는 건지 모를 어설픈 손짓이라든지. 특히 나는 정환이 형 특유의 표정을 잘 따라 했다. 그렇게 실컷 놀려대다 보면 정환이 형은 진작 뒤로 드러누운 지 오래였고, 형은 "야. 둘이 형제고 내가 놀러 온 거 같아." 하면서 시원하게 웃고 있었다. 쓸쓸해하지 않는 형을 보면 안심이 되었다. 

 

점심시간이었다. 전날 마감 후 회식까지 하는 바람에 귀가가 늦어졌다. 급식이고 뭐고 졸려서 잠이나 자고 싶었다. 엎드려서 잘 자고 있었는데 문이 소란스럽게 열렸다. 어떤 무리일지 뻔해 고개 들지 않았다. 다만 심기가 불편해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야. 니네 세성 전교 회장이었던 형 알지?"

이어폰을 꺼내려다 말았다. 정환이 형 이야기인 것 같았다.

"그 존나 잘생기고 어깨 개 넓고 얼굴 좆만 한데 머더러 아들이신 분?"

"이 새끼 개웃기네. 그 형 대학 썰리고 호빠 취뽀한 듯. 그저께 존나 부내 나는 아줌마 차 타고 돌아다니는 거 봄."

"근데 솔직히 내가 그 와꾸여도 여기저기 빨대 존나 꽂고 꿀 쪽쪽 빤다."

"응~ 닌 그 와꾸 될 일 없으니까 꿈 깨~ 병신아."

"시비야. 호로새끼가."

"야."

터져도 안 아까울 얼굴을 주먹으로 쳤다. 복부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쪽수에 밀려 금방 제압당했다.

"니 부른 것도 아닌데 호로새끼에 버튼 눌렸냐? 씨발! 꼬우면 니도 따라서 취뽀하든가."

"안 돼. 이 새끼 요즘 어서 오세예~ 에엥엥입니두~ 이 지랄 하잖아."

그대로 돌려받았다. 이를 악물고 얌전히 얻어맞았다. 밖에서 잘 것도 아니고 정환이 형이랑 같이 자야 하는데. 꼼짝없이 얼굴을 보여줘야 하는데. 정환이 형이라면 내가 누굴 상처 입히는 것보다 내가 상처 입고 돌아오는 게 낫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 순순히 발길에 차였다. 점심 먹고 온 여자애들이 소리를 질렀다. 그대로 뛰쳐나가는 애들도 있었다. 선생님이 올라왔다. 

"저더러 호로 새끼래요."

내 말에 선생님은 무어라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역사 왜곡 지린다. 선생님. 김도훈이 선빵 쳤어요."

멀쩡히는 아니더라도 멀쩡해지려고 노력 중인 아빠 덕에 나는 더 혼나지 않아도 되었다. 보건실에 누워있다가 말없이 하교했다.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여기저기 시큰거렸다. 그나마 월요일이라 다행이었다. 주말 직전이었다면 오지랖 넓은 매니저 형이 꼬치꼬치 캐물을 테니까. 초록 대문 앞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힘을 내서 올랐다.

욕실에서 나온 정환이 형은 상기돼있었다. 문소리에 급하게 나온 티가 역력했다.

"너 얼굴이 왜 이래."

"…형 얼굴 엄청 빨갛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

"형. 나 키스하는 거 알려줘."

"뭐?"

"형은 다 해봤을 거 아니야. 나 나중에 안 창피하게 형이 좀 알려주라."

"…도훈아. 편한 거랑 무례한 건 다른 거야. 너 묻는 말에 대답도 안 하고 이렇게 다짜고짜 예의 없이,"

"좋아해."

꾹 닫혔던 선생님의 입과 달리 정환이 형의 입은 조금 벌어진 채로 굳었다. 형은 사범대생이었다. 그 일이 없었다면 형은 아주 좋은 선생님이 되었을 거다. 잘 못 챙겨 먹는 애들을 다정하게 다독여주고. 없는 고민을 만들어내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귀 기울여 들어주고. 낯을 많이 가리고 체력이 부족해서 수학여행을 앞두고 내가 꼭 가야만 하나 괴로워하는 선생님이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학교에서 남녀 불문하고 가장 인기 있는 선생님이 되었을 텐데.

"내가 형 좋아해. 그래서 그냥 얻어맞았어. 형 좋아해서."

"…누가 이랬는데."

"있어. 내가 형 좋아하는 거 모르는 애들. 교복 안에 기본 티만 입는 거 무시하고. 교복만 입는 거 무시하고. 그냥 좀, 나 별로 안 좋아하는 애들."

형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도훈아."

"응."

"다 형 잘못이야."

아린 입가에 닿은 입술이 따뜻했다. 가만가만 등을 쓸어주고 품 안의 머리통을 달래주던 손처럼. 많이 먹어. 도훈아. 한결같이 다정한 말처럼……. 물론 첫 키스의 기억을 터진 뺨을 달고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많이 속상했다. 형을 좋아해서 그냥 얻어맞았다는 나의 붕 뜬 말을, 형은 대체 얼마만큼 알아들은 걸까. 다짜고짜 예의도 맥락도 없이 뱉어내는 설익은 고백을, 정환이 형은 왜 잠잠하게 받아주는 걸까. 언제부터 알고 있었길래 하품할 때는 얼굴의 반만큼 벌어지는 입이 뻐끔 벌어지다 만 걸까. 처음부터 알았을까. 그래서 밤바다를 보면서 입술을 물어뜯은 걸까. 자꾸 슬펐다. 한편으로는 위로가 되었다. 얻어맞을 때의 고통은 기억도 안 날 만큼 달았다. 형 잘못 아니야. 형은 잘못한 거 하나도 없잖아. 혀에 새겨주고 싶었다.

약국에 다녀온다는 형을 기다리다가 까무룩 잠들었다. 형이 약을 발라주는 손길이 좋아 계속 자는 척했다. 눈을 감은 채로, 지난 주말에는 뭐 했냐고 물었다. 형이 말했다. 토요일에는 어머니랑 같이 아버지를 뵙고 왔다고. 일요일에는 어머니를 따라 동물 보호소에 봉사 다녀왔다고. 가만히 맞지 말고 그냥 더 때릴걸. 마음이 아팠다.

"도훈아. 사실 형은… 아빠한테도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 그런 생각을 해."

형이 덧붙였다. 정환이 형이 그렇게 말하니 나도 그렇게 믿고 싶어졌다. 당시 형네 아저씨는 순순히 혐의를 인정했다. '사업 운영 과정에서 극심한 갈등을 못 이기고 충동적으로 저지른 행위'로 정리된 사건이었다. '가해자 아들이 사범대생이라는데 절대 교단에 못 서게 해주세요' 그런 댓글이 주렁주렁 달렸다. 그해 여름. 나는 그런 댓글들을 신고하느라 밤을 새우기도 했다. 당시 그건 내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우리 형에게 좋은 친구였던 정환이 형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행위였다.

"그리고 도훈아."

"응."

"오늘 일은 다 잊자."

"…어디부터 어디까지?"

"다."

물어보고 싶었다. 얻어터지고 온 내가 그렇게 불쌍했냐고.

 

내가 깨워주지 않아도 정환이 형은 곧잘 일어났다. 내가 학교에 가 있을 시간에만 집에 있고, 하교할 즈음이면 집을 비웠다. 혼자 밥을 먹는 시간이 늘어갔다. 그건 괜찮았다. 정환이 형이 통 안 챙겨 먹는 것 같아서 걱정되었다. 푹 꺼진 뺨이 눈에 밟혔다.

형이 올라온 주말에도 정환이 형은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형이 아빠 차도를 전하는 와중에도 딴생각에 잠겨있다가 한 소리 들었다. 빠르면 올해 말에 퇴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소식이었다. 

"그럼 여기서 넷이 사는 거야?"

"얼른 새로운 데 알아봐야지. 정환이한테도 물어봐야 하고."

"근데 정환이 형은 왜 안 와?"

"그건 네가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형 친구잖아."

"따로 말 없었는데."

정환이 형이 없는 틈을 타 형에게 물었다. 어떻게 친해졌는지, 뭐가 그렇게 고마웠는지. 형은 덤덤하게 말했다. 키 때문에 새 학기부터 맨 뒤에 나란히 앉았고, 대화하다 보니까 친해졌고, 애들이 시비 걸 때마다 정환이가 막아줬다고.

"한 번은 선배들이 긁어서 친 적이 있는데. 부모님 불러오라는 거야. 근데 아저씨가 대신 와주셨어. 처음 뵌 거였는데 나보고 그러시더라. 네 잘못 없다."

"……."

"이런 말 하면 네가 어떻게 들을지 모르겠는데. 형은 아저씨한테도 이유가 있었겠지 싶어. 가신 분한테 예의가 아니긴 한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모르겠다. 나는."

"나도 그렇게 믿고 싶어."

원래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었다. 정환이 형의 팔을 울타리 삼아 잠든 밤도 있었기에, 나도 정환이 형을 감싸주고 싶었다.

노골적으로 나를 피하는 정환이 형은 매일 나를 서글프게 했다. 그렇게 피하면서도 정환이 형은 종종 새까만 새벽, 천천히 내 머리를 쓰다듬다가 나와 거리를 두고 누웠다. 분명 좁은 방인데 형 하나 빠진 게 꽤 컸다. 온기가 그리웠다. 때로는 손을 덥석 잡고 싶었다. 잊고 싶지 않다고 호소하면서 두 번째 키스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형이 더 멀어지지 않게 잠귀가 어두운 척하는 것이 전부였다.

 

정환이 형의 생일이었다. 매니저 형의 도움을 받아 선물을 골랐다. 목이 길어서 그런지 유독 추위를 많이 타는 형에게 머플러를 사주고 싶었다. 형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 색과 패턴은 따로 있었는데, 좀 밝은 편이라 부담스러워할 것 같았다. 깔끔하고 어두운색을 골랐다. 식품관에서 먹음직스러운 케이크도 샀다. 

골목 초입 독립 서점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머뭇대다가 발을 들였다. 이달의 서적 코너가 눈에 들어왔다. 선반에 책 세 권이 있었다. 시집, 소설, 에세이였다. 독립 서점이라는 공간이 어색했던 나는 제목이 익숙한 시집을 집어 들었다. 표제작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

시집을 구매했다. 분명 언젠가 수업 시간에 접했을 때는 심드렁했던 것 같은데 달리 읽혔다. 정환이 형이 '나'이자 '나타샤' 같았다. 한편으로는 내가 '나'이자 '나타샤' 같았다.

형을 기다리면서 편지를 썼다. 시집에 끼워두었다. 정환이 형은 늦게까지 연락이 없었다. 걱정되었지만 올 때까지 기다렸다. 형을 기다리면서 방을 둘러보았다. 현관 쪽 벽에 핀 곰팡이. 툭하면 끊기는 온수. 작은 창문에 일어나는 결로. 이런 방을 빌려주면서 꼬박꼬박 돈을 걷는 집주인이 참 나쁘게 느껴졌다. 셋이 사는 걸 들키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점검 한 번 오지 않는 아저씨였다. 

형은 결국 생일이 지난 후에야 들어왔다. 훅 끼치는 술 냄새에 아빠 생각이 났다.

"생일 축하해. 정환이 형."

대답 없는 형에게 시집을 먼저 건넸다. 형은 표지를 가만 쳐다보고 있었다. 도로 가져와 표제작을 펼치며 말했다.

"형 이 시 알지. 읽는데 왠지 형이랑 내가 생각나서."

편지가 툭 떨어졌다. 형이 픽 웃었다.

"도훈이는 이제 시 읽을 여유도 있구나."

파리한 얼굴을 노려보았다. 정환이 형이 미웠다. 

"말은 안 해도 형이 나 사랑하는 거 알아."

"나도 열아홉일 땐 너처럼 착각이 습관이었어."

나는 열아홉인 내가 싫었다. 어떤 노력을 해도 그저 동생일 뿐인 내가 싫었다. 시간이 거꾸로 가지 않는 한 정환이 형을 앞지를 방법은 없었다. 

"형 왜 자꾸 사람 초라하게 해? 난 내 인생 재밌거든? 지금이야 좀 빠듯해도 나한텐 이런 거 다 밑거름이고 원동력이야. 난 나 믿어서 자신도 있어! 진짜 가끔 한 번씩 형이 너무 미울 때가 있는데. 딱 이럴 때야. 왜 사람 성의 짓밟고 멀쩡한 기분까지 곤두박질치게 말하냐고!"

"김도훈 너는 살아있는 게 죄악 같다고 느껴본 적 있어? 도훈아. 난 매일 나를 의심해. 그냥 죽어서 죗값 치를까 하다가도 왜 내가 죽어야 하나, 죽는다고 탕감되는 빚인가 계산하는 내가 역겨워. 누가 너 초라해지래? 내가 네 인생 폄하한 적 있어? 도훈아. 형이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은 그냥… 네 그 어리고 순진한 꿈에서 날 좀 배제하라는 거야. 이게 못 할 말이야? 근데 이 말조차 안 하면 내가 얼마나 뻔뻔한 사람이야…."

우는 형에게 입을 맞추었다. 온기로 달래주는 것 외에는 떠오르는 위로 방식이 없었다. 얽힌 혀가 짭조름했다. 같이 밤바다에 빠진 것 같았다. 나는 매일 침몰하는 정환이 형을 매번 끌어올리고 싶었다. 계속해서 열기를 나누며 형의 손을 가져왔다. 뺨을, 왼쪽 가슴을, 손가락 사이 사이를 훑게 했다.

우리는 태어나서 배운 게 키스밖에 없는 사람들처럼 굴었다. 나도 형도 멀쩡한 마음으로 멀쩡한 대화를 할 자신이 없었다. 번갈아 가며 호흡이 달렸다. 참지 못하고 바지춤에 불쑥 손을 넣었다. 황급히 밀어내는 걸 버텼다. 형을 더 많이 침범하고 싶었다. 형이 힘주어 고개를 저었다. 뒤통수를 쥐고 놔주지 않았다. 터지는 숨이 밭았다. 내가 안달할수록 형은 점점 무력해지고 뜨거워졌다. 한 번 크게 떤 후에는 형도 나를 만졌다. 

형은 사람들에게 우리를 정의해보라고 하면 다들 입을 모아 '더럽다'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겨울에는 튼 지 5분도 안 돼서 온수가 끊기는 집에 살면서도 우리는 늘 꼬박꼬박 씻었고. 싸구려 벽지 한쪽이 곰팡이로 물들지언정 쓰레기는 곧장 갖다 버렸고. 볕 드는 구석이 없어 물비린내 나는 옷을 입고 다니기는 했어도 빨래 당번을 잊은 적은 없다. 도대체 뭐가 더러운 거냐고 묻자 형이 말했다.

"우리."

"내가 형 좋아하는 게 더러운 거야? 아니면 좋아하게 한 형이 더러운 거야?"

형은 답해주지 않았다. 나는 울다 잠들었고 형은 자면서 울었다. 아니. 나는 자는 척했고 형은 모른 척했다. 그래서 나도 형을 모른 척했다. 형이 미워서 마음에도 없는 다짐을 했다. 반드시 형을 떠날 것이다. 낭만도 없고 우울하고 몸도 정신도 쇠약한 형을 떠날 것이다. 훗날 외로움을 못 견디고 내게 오더라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몰랐는데, 학교에 다녀오고 보니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집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욕실 문을 열었다. 정환이 형의 칫솔과 면도기, 셰이빙 폼이 없었다. 시집과 머플러, 편지를 담아두었던 쇼핑백도 없었다. 정환이 형이 아무 데도 없었다. 나는 작은 방에 혼자 남았다. 혼자 남은 채로 겨울을 맞이했다.

성탄절 연휴부터 형이 함께 있어 주었다. 아빠의 퇴원 일자는 미뤄졌다. 형은 혹시 많이 불편하지 않다면 반년만 더 이 방을 쓰자고 했다. 전세 사기가 무서워서 신중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하는 형의 얼굴은 푸석하고 까슬했다. 혼자 지내는 방이 불편할 건 없었다. 다만 밤마다 침몰하는 기분이 들었다. 정환이 형과 만났냐고 묻자 형이 고개 저었다. "이민 준비하느라 바쁘겠지."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스무 살 첫 새벽에는 형에게 술을 배웠다. 혀에 감기는 알코올 향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주량을 미리 알아두면 좋다고 해서 머리가 아플 때까지 마셨다. 결국 속을 게워 내고 나왔다. 가만히 누워있는데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침을 삼켜가며 버텼다. 문득 시계가 잘못 감긴 것 같았다. 분명 나는 스무 살이 되었는데, 정환이 형의 이름을 쉽게 꺼낼 수 없는 열여덟 여름에 돌아온 것 같았다. 

 

겨울 방학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다. 여전히 사람들은 옷을 정말 많이 쉽게 샀다. 집에 패딩이 몇 벌 더 있긴 한데 어차피 숨 죽으니까, 이 색은 흔치 않으니까, 하며 몇십만 원짜리 겉옷을 턱턱 샀다. 시간 때울 겸 들어온 티가 역력한 사람들도 대강 훑어보고 뭐든 사서 나갔다. 매니저 형은 나를 카운터에 세워놓거나 지점 매출 증진을 이유로 입구에서 종일 인사하는 인력으로 배치했다. 그러다가 정장 입은 여자한테 명함을 받았다. 모델 에이전시라고 했다. 쉬는 시간에 연락해 피팅 테스트 겸 미팅 일정을 잡았다. 매니저 형에게 말했더니 멀쩡한 곳인지 어리숙한 애들 등쳐먹는 곳인지 알아봐 주었다. 나중에 잘되면 배로 갚으라며 옷을 사주기도 했다.

촬영은 항상 즐거웠다. 적성에 잘 맞는다고 단언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경험을 쌓지는 못했지만, 지적보다는 칭찬을 자주 들었고 모니터링할 때 화면 속 나를 보는 게 부끄럽고 민망하지 않았다. 준비하는 동안 착장 목록을 쭉 훑어보면서 잘 어울릴 것 같은 표정과 포즈를 생각해 보는 게 재밌었다. 의류업계는 늘 몇 계절씩 앞질러 가야 했다. 성큼성큼 먼저 나아가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가끔 울컥했다. 속으로 읊조렸다. 거봐. 자신 있다고 했잖아. 

혼자 지내는 좁은 방에 업체에서 보내준 옷이 하나씩 들어찼다. 나는 추운 겨울에도 옷을 잔뜩 들고 골목 초입 코인 세탁방에 가서 세탁과 건조를 했다. 뽀송뽀송한 향기가 나게. 아무것도 들키지 않게. 초라해지지 않게.

 

졸업식에는 형과 복지사 선생님이 와주었다. 형이 사 온 촌스러운 꽃다발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에이전시에서 보내준 꽃다발과 확연히 비교되었다. 형도 느꼈는지 예쁜 거 들고 찍으라고 하길래 내 눈엔 형이 사준 꽃다발이 존재감이 분명해서 좋다고 했다. 표나게 뿌듯해하는 형이 웃겼다. 성년의 날에 꽃을 사주겠다고 말하던 정환이 형이 보고 싶었다. 어차피 졸업식에는 오지 못했겠지만 졸업 기념으로 셋이 함께 사진 찍는 모습을 몇 번씩 그려보곤 했는데. 전부 꿈처럼 느껴졌다.

모르는 애들까지 와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는 바람에 형과 복지사 선생님은 온갖 휴대폰을 들고 셔터를 누르느라 바빴다. 식사 후에는 형을 터미널까지 바래다주었다. 형은 3월부터 다시 같이 살 수 있으니까, 밥 잘 챙겨 먹으라고 거듭 잔소리를 했다. 스무 살이 벌써부터 볼 패이면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하면서. 많이 먹어. 도훈아. 그 말을 못 듣고부터는 밥이 정말 잘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일에는 도움이 되었다.

한숨도 안 쉬고 오르막길을 올랐다. 우편함에 시집 한 권이 꽂혀있었다. 바스러질 것 같아 조심히 꺼내 들었다. 신발도 벗지 못한 채 현관에 서서 홀린 듯 책장을 넘겼다. 표제작이 찢겨 있었다. 그를 대신해 자리한 편지를 꺼내 들었다. '정환이 형이' 사범대생치고는 조금 엉성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숨을 크게 삼키며 편지를 펼쳤다.

'도훈아. 네 이름을 부를 때마다 입천장에 혀가 닿는 게 간지러워서 자주 못 불러줬어. 이상하지. 입천장은 종일 혀와 붙어있는데 네 이름을 부르는 순간에만 그 당연함이 새삼스러웠어. 혼자 수십 번 불러보고 깨달았어. 입천장이 간지러운 게 아니라 네 이름을 부를 때의 울림. 혀와 입천장 사이에 차올랐다가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나지막한 숨이 간지러운 거였어. 어쩌면 네 이름이 내 안에서 나가는 게 아쉬웠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더 자주 불러줄걸. 많이 후회할 것 같네.

도훈아. 나는 너에게 얼룩이 되고 싶지 않았어. 너는 특별하고 눈부시니까. 우리 중에 더러운 건 나뿐이야. 우리라고 묶어서 미안해. 너를 치욕스럽게 해서 미안해.

도훈아. 나는 내가 무서워. 앞으로 이 두려움을 어떻게 딛고 나가야 할지 모르겠어. 너나 정훈이라면 잘 털어냈을 텐데. 아마 나는 평생 스무 살 여름에서 나아가지 못할 것 같아. 도훈아. 너는 내가 되지 마.

도훈아. 성인이 된 걸 축하해. 스무 살 첫날도. 성인이 되고 맞이한 첫 번째 생일도. 졸업도. 모두 직접 축하해주지 못해 미안해. 도훈아. 형 생일을 성심껏 챙겨주어서 고마워. 그날만큼은 내가 좀 더 가치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어. 너는 내가 한 번씩 밉다고 했지. 도훈아. 괜찮아. 마음껏 미워해도 돼. 네 미움은 기꺼울 거야. 평생.

도훈아. 씩씩하고 재미있는 도훈아. 유치하게 질투조차 못 할 만큼 해사한 우리 도훈아. 바랠 틈 없이 반짝이는 도훈아. 사랑스러운 도훈아. 찬란한 도훈아. 그늘이 되어주지는 못할망정 너를 자꾸 그늘지게 해서 미안해. 너에게 초라함을 가르쳐서 미안해. 내 삶을 물들이려 해서 미안해. 네 마음을 허기 지게 해서 미안해. 

도훈아. 너는 나아가야 해. 눈보라를 가르고. 꽃잎에 나부끼는 먼지들을 걷어내고. 내리쬐는 햇살 아래에서도. 폭우 속에서도. 젖은 낙엽이 발끝에 채이더라도. 늘 그래왔듯 씩씩하게 나아가야 해. 

도훈아. 나는 네가 되고 싶었어.'

나는 시집을 끌어안는다. 소리 없이 운다. 꼿꼿한 사방의 각이, 판판하고 얇은 시집이, 꼭 어깨만 넓고 깡마른 몸뚱이 같다. 병든 우편함 속에 잠든 옛 시집. 한없는 초라함이 꼭 우리 같다. 야속하고 불쌍해서 울음이 멈추지 않는다. 더 탕진할 감정이 없는 듯 애달프게 매달리던 열아홉의 나는. 시답잖은 걱정으로 꼬박 새벽을 지새우던 열아홉의 나는 겨우 스물의 문턱을 넘어왔다. 하지만 여전히, 어리고, 어리고, 어릴 뿐이었다. 형을 앞지를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다시 한번 다짐한다. 나는 반드시 형을 떠날 것이다. 사랑 하나 일깨워준 게 뭐라고. 내가 사랑한 열아홉에 생채기를 내놓고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자취를 감춰버린 무정한 그 형을. 운이 받쳐준다면 아직 살날이 훨씬 많이 남은 나를, 어쩌면 더 자랄지도 모르는 나를, 평생 열병 같은 열아홉에 가둬둘 나쁜 형을…… 나는 기필코 떠날 것이다.

그러니 정환이 형. 형은 돌아와야만 해. 내가 떠날 수 있게. 

나는 믿는다. 형이 아니 올 리 없다. 完.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1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