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Hk(A)
러브
전학생이 온다고 했다. 3학년 1학기라는 불충족한 시기에 전학이라니. 전학생에 큰 관심은 없었지만 그저 조금 불쌍하다고 동정했다.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한 건지 여기저기서 잡음이 한가득이다. 교내 분위기가 공중에 떠나니는 먼지마냥 부유했다.
시기 죽인다. 개애매하다 아님?
기생오래비처럼 생겼을 것 같지 않냐.
그럼 존나 잘생겼겠네.
미국에서 오는 거라던데?
헐, 진짜? 전에 있던 학교에서 사고쳐서 오는 거라고 들었는데. 아니었음?
집 존나 부자래.
키 존나 작다던데.
병신. 너보다는 크겠지 새끼야.
조폭 집안이라던데 문신 있으면 나 걍 지릴 듯.
여러 억측과 추측이 낭자하는 교실이 어수선했다. 전학생이 뭐길래. 눈에 불을 켜고 열심히 발발대는 행태가 조금은 꼴사납다고 혼자 생각했다. 말이 좋아 이팔청춘 열혈 남고생이지, 같은 공간에 있는 이들은 그저 냄새 나는 꼴통 집합소에 불과한 우매한 미성년들이었다. 자아가 불확실한 이들에게는 이렇게 작은 가십일지라도 큰 유흥이 된다는 사실을 늘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지금처럼 그것이 피부에 와닿을 때면 새삼 새로웠다. 남들이 보기에는 저도 같은 영역 안에 교집합으로 묶여 있는 우매한 학생1 중 하나겠지만.
지금 입을 열어 되는대로 아무 말이나 뱉어내는 이들 중에서 전학생을 직접 마주한 사람은 전무할 거다. 하지만 전학생은 수많은 추언들로 이미 그 형태가 잡혀 만들어져 가고 있는 게 확실해졌다. 그게 조금 많이 불쌍하다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대한민국 사람들의 기준으로 평균을 따져 봤을 때 일주일 중에서 가장 힘들어한다는 수요일을 고3 신정환은 좋아했다. 이유를 설명할만한 장황한 그건 아니고 그저 몇 가지의 단순한 이유로. 하나는 좋아하는 과목인 수학이 1교시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급식이 맛있으니까. 급식을 수급 당하는 굴레에 얽매인 학생이라면 모두가 공감할 이유였다. 뭐, 그게 수요일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고. 마지막에 뭐라도 하나 더 이유를 덧붙이자면 그냥. 기다림이 큰 만큼 인내는 비례해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사람들은 수요일이 오게 되면 '아직도 수요일이야?' 라는 탄식을 내뱉을 수 밖에 없다. 신정환은 수요일의 그 어중간함도 마음에 들어했다.
그러한 수요일임에도 신정환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 평소보다 15분이나 늦게 일어나 아침밥을 먹지 못한 게 첫 번째. 두 번째는 급하게 넥타이를 매는 자신의 앞에서 여유롭게 밥을 먹으며 숟가락을 흔들던 신지한이 얄미워서. 마지막은 학교에 오자마자 담임 호출로 인해 교무실에 불려가 1교시는 자습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교직원 평가 회의가 있다는 게 이유였다.
“정환아, 애들 떠들지 않게 주의 좀 잘 시켜 줘. 중간고사 태도 점수에 오늘 수업 반영할 거니까 떠들면 점수 깎는다고 해. 떠드는 애들은 정환이 니가 알아서 잘 보고 적고.”
“네.”
“아, 그리고 저번 주에 나눠 준 설문지 오늘까지 부모님 싸인 받아서 가져오라고 했으니까 그것도 좀 걷어서 6교시 시작하기 전까지 가지고 와 줄래?”
“네. 알겠습니다.”
“응, 그럼 수고해. 이제 교실로 가 봐.”
“네.”
어떠한 명제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란 쉽지 않다. 모든 사실은 객관적이지만 지극히 주관적이고 자세히 살펴 보면 타협점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하지 않은가. 논리가 생겨나지 않도록 우겨 넣은 사실이니까. 애초에 정의에 반발하는 무리가 나쁜이로 그려지는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확실한 정의를 내리는 것을 좋아하며 목표로 삼는다.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은 탐구 정신은 늘 명확한 사실을 기반으로 생겨나고는 하는데, 단순한 고찰에 질문을 던지고자 함은 당연하게도 능동적 발상이다. 우리는 공평하게도 같은 선상에 놓여있다. 답은 하나라는 전제하에. 그럼에도 누군가는 정답은 없다고 외친다. 끝까지 모순적이게도.
비슷하다면 비슷하고 다르다면 다른 맥락으로 수학은 딱히 어렵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점이 마음에 들어 좋아했다. 맞는 공식만 문제에 대입하면 어렵지 않게 답이 나오니까. 공식이 틀리지 않는다면 따라서 그 답도 절대 틀릴 이유가 없다. 답이 없는 문제는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다. 저건 인생을 살아오면서 겪은 날들이나 관계에도 해당되는 문장이다.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본인은 수학 문제 풀이처럼 단순한 게 좋았다. 공부도, 그 외 다른 부수적인 것들도.
다른 교과 과목들보다 조금 더 흥미를 둔 과목이기에 제법 열심히 듣는 수업이었는데 자습이라니 힘이 조금 빠졌다. 다른 애들은 어떨지 몰라도. 딱히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아침을 먹지 못한 배가 괜히 쓰라린 것 같다는 착각이 일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 약았다. 저도 모르게 배를 문지르며 앞문을 열고 들어선 교실은 소란스럽고 혼잡했다. 1교시 시작 종이 울렸지만 담임이 들어오지 않음에 의아해하던 눈들이 집중되며 만들어지던 소음들이 갑자기 소거됐다. 시선을 받으며 조용히 칠판 앞으로 걸어가 자습이라고 크게 적자 소음은 빠르게 다시 교실로 번졌다. 교탁을 크게 두 번 두드렸다.
“담임이 말한 공지사항 전달할게. 노는 건 자유인데 조용히. 중간고사 태도 점수에 반영해서 떠든 사람 점수 깎는다니까 놀 거면 좀 조용히 놀고. 안 그럼 나 진짜 명단 적을 거니까. 설문지 가지고 온 건 점심시간 전까지 줘.”
1교시부터 자습이라는 사실을 들은 낭랑 남고딩들이 으레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따를 리가 없다. 무리가 지어지는 교실은 금새 무법지대가 된다. 자리로 돌아와 펼친 영어 문제집 속 지문이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피곤함에 눈이 뻑뻑했다.
수요일. 분명 자신이 좋아하는 수요일이 틀림없는데. 앞에 놓여져 있는 급식판을 착잡하게 바라 봤다. 너비아니, 깍두기, 가지무침, 코다리튀김, 버섯탕수육, 미역국, 잡곡밥. 그리고 복숭아맛 요플레까지. 싫어하는 것들 투성이다. 미역국은 특히나 별로다. 요플레는 딸기맛을 더 좋아하는데. 평소에 집에서도 하지 않던 반찬 투정을 하고 있다. 입맛이 달아나 무성의하게 미끄덩한 미역을 숟가락으로 휘휘 저어댔다. 수요일임에도 기분 좋지 않은 이유 네 번째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신정환 왜 미역국 괴롭히냐.”
고개를 들자 산처럼 받아 온 버섯탕수육을 우걱우걱 씹고 있는 최한준이 보였다. 말하면서 버섯탕수육을 다 씹지도 않고 입을 벌려 밥을 우겨 넣는 바람에 그 장면을 여과없이 보고 말았다. 아, 존나 다 쳐먹고 말해. 눈을 찌푸리며 말하자 실실대며 미역국을 다시 떠먹으며 대꾸한다. 어쩌라고.
“최한준, 니 바지 줄인 거 허벅지 터질 것 같다. 아니면 아직도 키가 클 거라는 희망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
“뭐야. 미역국 괴롭히다가 왜 갑자기 타켓 바꿈? 존나 어이없을무. 내 키 작은데 니가 보태 준 거 있냐? 바지 터질 것 같은데 보태 준 거 있냐고, 이 새끼야."
“없지. 애초에 뭘 보태 줄 생각이 없어.”
“싸가지 없는 새끼. 니가 그러니까 안 되는 거야, 신정환. 그러지 말고 형님이 보탬이 될 기회를 줄게. 요플레 그거 안 먹을 거면 넘기시지. 싸게 딜 해 준다.”
예측 가능한 놈.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복숭아맛 요플레따위 아쉬울 것 없는 손동작으로 휙하고 던져 주니 고맙다며 촐싹댄다. 덩치도 작은 게 저러니까 그냥 초딩 같다. 이 말을 들으면 또 참새처럼 떽떽거릴 게 분명해 직접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귀찮아지는 건 이미 망한 수요일에 보탬이 될 게 하나도 없었으므로.
점심시간 이후의 5교시는 늘 그렇듯이 위험하다. 여과없이 졸음이 들이닥친다. 동시대에 태어나 수험이라는 과녁에 꽂혀야 하는 같은 처지의 총알 동지들은 이미 전멸했다. 그것을 이해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윤리 선생은 엎어져 무장해제 된 병정들을 깨우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윤리 의식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이다. 같잖은 동지애를 핑계로 나도 조금은 늘어져 본다. 아직은 더운 공기와 공자의 논어를 읊는 목소리를 백 노이즈 삼아 턱을 괴고 창문을 내다 보니 하루종일 뜻대로 되는 게 없어 저기압인 자신과는 다르게 좋기만 한 날씨에 괜히 또 심사가 뒤틀린다.
그렇게 창문에 두었던 무의미한 시선을 거두려던 찰나 교문으로 낯선 검은색 차 한대가 들어왔다. 등교시간이 한참 지나고도 모자라 점심시간 이후에 들어오는 차가 의아했다. 교칙 위반자의 얼굴이 궁금해져 거두려던 시선을 다시 한 번 창문에 뒀다. 평소라면 절대 관심 주지 않았을 균열인데 이상하게 흥미가 일었다.
차는 멈추고 한참을 지났음에도 내리는 사람이 없었다. 뭐야. 금새 흥미를 잃어 턱 괴고 있던 손 내리고 시선을 책으로 돌렸다. 얼굴이 빨갛게 익어가는 윤리 선생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부분에 필기를 했다. 줄을 죽죽 그어대며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윤리의 사상과 나는 맞지 않다고. 형광펜 뚜껑을 닫으며 무의식적으로 내다 본 창문 밖에는 검은 차의 주인공이 드디어 나와 있었다. 운전자로 보이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주인공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보이는 뒷통수가 동그랗고 반질거렸다. 그 아래 살짝 아래로 보이는 팔은 까맸다. 우리 아직 하복 혼용 기간 아닌데. 괜히 자신이 입은 셔츠를 한 번 내려다 봤다. 그 사이 이야기를 마친 건지 주인공은 신기루처럼 빠르게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5교시 이후 쉬는 시간은 다른 쉬는 시간에 비해 공기가 사뭇 다르다. 묘하게 낮고 조금은 그 모호한 온도에 자신도 모르게 몸이 아까보다 더 늘어진다. 그럴싸한 이유를 핑계로 6교시 시작 전 조금이라도 더 늘어져 있기 위해 책상에 엎어지려는 찰나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 공간을 침범했다. 신정환! 담임이 너 교무실로 오래. 수요일임에도 기분 좋지 않은 이유 다섯 번 째를 추가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는 걸음으로 교무실에 도착했다. 교무실에서 세어나오는 빛에 떠도는 먼지들이 느리게 번졌다. 짧게 쳐다 본 후 작게 한숨 쉬고 교무실 문을 열었다. 잔잔하지만 조금은 날카로운 교무실 특유의 분위기에 금방 잠식됐다. 익숙하게 담임에게 걸어가는 눈 앞에 보이는 동그랗고 반질거리는 뒷통수의 교칙위반자, 팔이 까맸던 검은색 차의 주인공.
"어, 정환아 왔어."
"네."
"우리반에 전학생이 있거든. 원래는 내일부터 등교하기로 했는데, 하루 먼저 와서 학교 좀 구경할 수 있냐고 부모님이 부탁을 하셔서 말이야. 6교시 담당 선생님한테는 내가 말할 테니까 전학생 학교 안내 좀 해 줄래?"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담임의 요구에 바로 대답할 타이밍을 놓쳐서 입만 벙긋댔다. 어차피 나에게 선택권은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이상하게 알겠다는 대답이 입에서 뱉어지지 않았다. 답지 않게 당황해 저도 모르게 옆에 있던 전학생을 바라 봤다. 전학생은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이 세상 무해한 얼굴로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갑자기 이런 부탁해서 미안해. 그래도 내가 이런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건 정환이 너밖에 없잖니. 해 줄 수 있지? 어려운 거 없어. 그냥 교실 위치 안내랑 학교 생활 불편하지 않을 사항들만 알려 주면 될 것 같아."
"아, 네. 그럴게요."
"고마워. 그럼 도훈이 좀 잘 부탁할게."
이름이 도훈이구나. 슬쩍 본 명찰에는 김도훈이라는 명찰이 달려 있었다. 그 사실을 인지했다는 걸 알리기라도 하듯이 까만팔이 눈 앞에 올라왔다.
"안녕, 내 이름 김도훈. 오늘 잘 부탁할게."
팔을 내밀며 악수를 권하는 김도훈의 등 뒤는 6교시가 시잘 될 즈음의 오후였음에도 노을의 경계마냥 붉게 비춰졌다. 여름에는 조금 더 머무르다 부서지는 햇빛과 겨울에는 생각보다 이르게 물러가며 번지는 노을처럼 김도훈은 내가 좋아하는 오후 5시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신정환이라고 해. 잘 부탁해."
잠시지만 어색하게 팔을 올려 맞잡은 손은 제가 생각했던 온도보다 뜨거웠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김도훈이 마주잡은 손을 한 번 더 꽉 쥐는 바람에 깜짝 놀라서 손을 떼어냈다. 웃겼던 건지 눈을 찡긋하며 웃는 게 조금 짜증 났다. 바보 같이 군 것 같아서. 괜히 혼자 심통 나서 담임에게 인사한 뒤 따라오는 말도 하지 않은 채 교무실을 벗어났다. 그럼에도 김도훈은 군말없이 나를 따라왔다.
"궁금했던 거나 가보고 싶었던 곳 있어? 교실은 수업 중이니까 빼고."
"음, 딱히 없는데. 매점?"
"매점?"
"응. 나 매점에서 컵라면 먹고 싶어."
그렇게 교무실에서처럼 따라오라는 말도 없이 방향을 틀어 매점으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이번에도 김도훈은 군말없이 내 옆에 붙어서 나를 따라왔다. 수업을 하고 있는 교실 밖 복도를 걷는 기분이 생소했다. 간간히 들려 오는 선생님들의 수업 소리, 창문 밖에서 넘어 오는 알 수 없는 소음, 엇박으로 엇갈리는 두 명의 발걸음 리듬감까지. 모든 것이 선명하지 않은 지평선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매점은 <자리 비움> 이라는 팻말이 걸린 채 문이 잠겨 있었다. 어쩌지 싶어 본 옆 얼굴에는 서운한 감정이 숨겨지지도 않은 채 내비쳐져 있었다. 어쩌지.
"매점 이모님이 잠깐 어디 가셨나 봐."
"그러게. 뭐, 이제 학교 다니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거 아냐? 괜찮아."
"또 가고 싶었던 곳 있어? 궁금했던 곳이나."
영화나 드마라 같은 거 보면 말 안 해도 학교 소개 잘만 해 주던데 자신은 그런 것들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해 보지 못했던 부분에서 오는 무지함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조금 침울해졌다. 괜히 그렇게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데 왼쪽 손으로 나보다 높은 체온의 무언가가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터치에 놀라 쳐다 보니 김도훈이 처음 봤던 교무실에처럼 눈을 찡긋거린 채 무해하게 웃고 있었다.
"우리 땡땡이 치자.“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 붙잡힌 손에 끌려갔다. 뒤늦게 야! 하고 불러 봤지만 김도훈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당당하게 넘어선 교문을 뒤로 하고도 김도훈은 빠른 걸음을 재촉했다. 그덕에 내 손을 잡은 사실도 잊은 것 같았다. 말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 언급을 포기하고 그대로 김도훈에게 몸을 맡긴 채 계속해서 이끌려갔다. 길은 알고 가는 건지 조금 불안해졌다.
김도훈에게 끌려가면서 본 풍경은 너무나도 익숙한 길이였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공원 위 언덕에 위치한 폐도서관으로 향하는 길이였다. 얘가 여길 어떻게 알지? 싶어 의아해졌다. 원래 여기서 산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제서야 제멋대로 끌려가던 발걸음을 조금 늦췄다.
"어디 가는데?"
"내가 좋아하는 장소. 아마 너도 잘 아는 장소일걸."
내가 잘 아는 장소인 걸 어떻게 아냐고 물어보고 싶었는데 김도훈은 웃으면서 다시 한 번 손을 잡아 끌었다. 손 잡고 있다는 걸 잊지는 않았구나. 다 큰 남자애 둘이서 손 잡고 있는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엄청 비웃을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계속 김도훈에게 붙들려 있었다.
도착한 폐도서관에는 생각한대로 아무도 있지 않았다. 아직 밝은 낮이었음에도 폐도서관 주변은 굉장히 어두웠다. 학교가 끝나면 독서실이 아닌 이 곳으로 늘 발걸음을 옮기곤 했다. 아지트 같이 거창한 공간은 아니었지만 혼자만의 공간으로는 아주 적격이었다. 무엇보다 조금은 서늘하고, 무거운 이곳의 공기를 나는 마음에 들어했다. 그렇지만 이 곳에 오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전무했다. 저도 이 곳에 온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린 적이 없는데 도대체 김도훈은 내가 잘 아는 장소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조금은 땀이 찬 손을 놓으며 김도훈은 익숙다는 듯이 폐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잡혔던 손바닥을 한 번 쳐다본 나는 바지춤에 손을 닦으며 먼저 들어간 김도훈을 뒤따라갔다. 먼저 들어갔던 김도훈은 버려져 있던 쇼파에 거리낌없이 몸을 던진 상태였다. 거기 먼지 많을 텐데.
"여기 되게 더럽다. 평소에 청소 안 했나 봐."
괜히 눈썹이 씰룩 올라갔다. 딱 봐도 '폐도서관' 아닌가. 청소가 안 되어 있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 나한테 청소 안 하고 사냐고 물어본 것 같아 찔려서 움찔한 거 절대 아니다. 그래서 그랬을까. 책상 의자를 빼 앉으면서 약간은 날카롭게 대꾸했다.
"폐도서관인 거 딱 보면 알지 않나."
"알지. 그래도 그 때는 이렇게까지 더러웠던 것 같지는 않은데."
주변을 둘러 보는 눈이 반짝인다. 표류하는 먼지들은 김도훈에게 별이라는 요소로 작용하는 것마냥 빛을 뿜어낸다. 창문을 투과하는 빛은 거침없이 김도훈에게 도달한다. 머릿속에서 생각을 읊자마자 이 곳은 더이상 폐도서관이 아니게 된다. 신성한 교회라도 된 것처럼 주변이 고요해진다. 김도훈이 눈꺼풀을 깜빡이는 것조차 신의 의도인 것처럼. 아무 말 없이 김도훈을 바라 보다 입을 뗐다.
"여기 온 적 있어?"
"응, 예전에. 아, 예전이 아닌가? 되게 어렵네. 그래도 재미있어. 그리고 너무 좋아."
당최 김도훈이 하는 말을 알아 들을 수가 없다. 더이상 문답을 이어갈 의지도 없어져 답문을 포기했다. 그제서야 학교 소개를 하다가 땡땡이를 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미쳤나 봐, 신정환. 담임은 당연히 학교 교내를 소개시켜 주는 걸로 알고 있을 거다. 들켰다가는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랐다.
"여기 온 이유는 됐고, 우리 이제 가야 돼. 담임이 알면 안 되니까."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가. 우리 땡땡이 치러 온 거 아니야?"
"내가 너 교내 소개해 주는 것도 충분히 땡떙이 사유로 칠 수 있어. 빨리 일어나."
치. 역시 졸라 범생이네. 라고 말하는 거 분명히 들었다. 한 마디 하려다가 괜히 힘 빼는 거 싫어서 모든 이유 차치하고 앞만 보고 김도훈 끌고 나왔다. 급해서 잡은 팔목은 손과 똑같이 높은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뒤에서 실실 웃는 김도훈 얼굴은 못 봤다.
아슬아슬하게 7교시 시작 전 학교로 돌아왔다. 땀 흘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뛰게 되어서 조금 짜증 났다. 수요일은 분명히 좋아하는 요일 중 하나였는데 싫어하는 이유가 벌써 초과치를 넘어섰다. 오늘 하루 원하는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교문 앞에서 머리에 맺힌 땀을 닦으며 쳐다 본 김도훈도 더운 건 마찬가지인지 얼굴 주변에 땀이 한가득이다. 땀에 젖어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려고 후후 부는 게 점심 때 본 최한준이랑 똑같이 초딩처럼 보여 속으로 조금 웃었다.
"들어가자."
"난 안 들어갈래. 담임쌤한테 학교 소개 끝나서 나 먼저 갔다고 말해 줘. 뭐라고 안 하실 거야."
"뭐? 아니, 그래도,"
"괜찮아. 갈게, 신정환! 내일 보자!"
김도훈은 그렇게 말하고 우리가 왔던 길을 그대로 다시 뛰어갔다.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는 아스팔트 위에 김도훈의 형상이 흐릿해지고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급하게 정신 차리고 학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교무실에 들러 김도훈 말 곧이 곧대로 전했다. 화낼 거라고 장담했던 생각과 다르게 담임은 그저 고개 끄덕이며 알겠다고 교실로 올라가라고 했다. 우려가 빗나가자 괜히 머쓱해졌다. 꿈인가. 어쩐지 오늘은 좋아하는 수요일인데 하루가 너무 안 풀리더라. 라고 생각하면서 올라와 엎어져 있는 최한준을 깨워 볼을 한 번 깨물어 달라고 했다. 미친놈 쳐다 보듯이 하던 최한준은 내가 재촉하자 깨물지는 못하고 마지못해 손가락으로 볼을 꾹 찔렀다. 음, 아프네. 꿈이 아니구나. 그리고 최한준한테 손톱 좀 깎으라고 소리 질렀다.
다음 날 목요일에는 아침부터 비가 왔다. 흐리다 못해 어두운 하늘 덕분에 세상이 암흑으로 다가왔다. 목요일 3교시에는 체육이 있다. 덕분에 오늘은 강당에서 자유시간을 줄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오늘은 늦잠 안 자서 아침밥도 여유롭게 먹었다. 셔츠를 입을 땐 갑자기 어제 하복을 입고 있던 김도훈이 떠올랐다. 혼용 기간 아니라고 말해 줬어야 하는데. 뭐, 알아서 하겠지. 여유롭게 넥타이를 매면서 생각했다.
늦잠으로 허겁지겁 고데기를 하는 신지한을 뒤로 하고 먼저 집을 빠져 나왔다. 우산이 있어도 젖을 신발 생각에 우울해졌다. 신발 말리려면 밤새 드라이기로 말려야 할 텐데. 세상이 멸망한 것처럼 비를 쏟아 붓는 하늘을 한 번 보고 큰 결심을 한 채 우산을 폈다. 걸음을 내딛으려는 순간 울리는 경적 소리에 깜짝 놀라 소리의 근원지로 시선을 뒀다.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검은색 차 한 대가 앞에 있었다. 설마, 하고 생각하는 순간 창문이 내려가며 역시나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김도훈의 얼굴이 나타났다.
김도훈이 타라고 하는 말이 빗소리에 섞여 웅웅 울렸다. 분명히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 것일 텐데도 문장과 단어가 모두 부서지듯이 느껴졌다. 느리게 다가오는 순간에 괴리감이 느껴지려는 찰나 김도훈이 우산도 없이 맨 몸으로 차에서 내리려는 게 보였다. 급하게 알겠다고, 내리지 말라고 소리치며 차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신발이 젖을 거라 걱정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거침없는 움직임이었다. 결국 신발은 젖었고, 비는 우산을 넘어 나에게 범람했다.
"타라니까 뭘 그렇게 가만히 있어. 내 목소리 안 들렸어?"
"들렸어. 갑자기 나타나서 놀라가지고. 여기 어떻게 왔어? 차 올라오기도 힘들었을 텐데."
"뭐, 그냥. 알고 있었어. 셔츠 많이 젖었어? 봐봐. 여분 있는데 갈아 입을래?"
생각보다 많이 젖지 않았지만 김도훈의 지대한 관심에 물에 젖은 옷 부분 하나하나가 무거워졌다. 괜찮아. 라고 어렵게 나온 대답에도 김도훈의 걱정은 계속됐다. 혹시 닦을 거 있냐는 질문에는 수건을 다섯 장이나 던져 줘서 난감했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으면서 본 김도훈은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하복 안 입었네. 까만 팔이 안 보이자 괜히 아쉬웠다. 고 생각만 한 줄 알았는데.
"오늘은 하복 안 입었네?"
"어? 응. 똑같이 입고 싶어서."
"뭘?"
"그냥. 애들이랑 교복 똑같이 입으려고. 전학생인 것도 튀는데 혼자 하복 입고 있으면 더 튈 거 아니야. 나 관종 아니야."
"아."
"하복이 잘 어울린댔는데. 나도 빨리 다시 하복 입고 싶어."
김도훈은 또 알 수 없는 자문자답을 이어갔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쳐다 보자 눈을 맞추며 웃어 주길래 어색하게 웃으며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는 그칠 기미가 안 보였다.
김도훈은 차에서 내리려는 나를 제지하고 반대로 먼저 내리더니 내 쪽으로 와서 문을 연 뒤 머리에 우산을 씌워줬다. 괜히 되도 않는 대우 받는 것 같아 내리는 걸 망설이자 김도훈이 얼른 내리라며 손목을 잡아 끌었다. 별수 없이 쓰게 된 우산은 두 사람이 함께하는 공간으로 변질됐다. 자연스럽게 내 어깨를 감싼 김도훈은 당연하게 발걸음을 이끌었다.
어색한데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애꿎은 입술만 물어 뜯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은 분위기가 조금은 견디기 힘들었다.
"고마워."
겨우겨우 짜낸 한 마디에 김도훈은 또 웃었다. 웃음 소리에 쳐다 본 김도훈 얼굴에는 거짓이 없었고, 어깨 한쪽이 엄청나게 젖어 있었다. 괜히 한 마디 하려는데 중앙 현관에 도착한 김도훈은 나중에 교실에서 보자며 우산을 접고 교무실로 뛰어갔다.
교실은 오전부터 아수라장이다. 동지애를 져버릴 만큼의 엉망진창에 휩싸여 있다. 여기저기 펼쳐진 우산을 헤치고 자리를 찾아가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진다. 사물함 위는 교복을 말린다고 젖은 교복들로 점령 당했다. 이따가 교복 싹 다 치우라는 담임의 말에 야유할 무리들의 모습까지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그렇게 자리에 앉자마자 최한준이 다가왔다.
"왜?"
"왜 뽀송하지?"
"뭐가."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왜 뽀송하냐고. 젖지도 않고. 순간이동이라도 했냐?"
"뭐래. 젖었잖아, 신발."
"그게 젖은 거냐? 그리고 너 신발이 그 신발의 뜻 맞아?"
"좋을대로 생각하고, 자리로 좀 가."
공중에 손 휘휘 저으며 최한준을 쫓아냈다. 주위를 둘러 보니 젖지 않은 사람은 정말 저 혼자다. 순간 어깨가 잔뜩 젖었던 김도훈이 떠올라 괜히 귓볼이 뜨거워졌다.
어수선함이 길어지며 정신이 유랑될 즈음 담임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뒤를 김도훈이 따라 들어왔다. 자신들의 근거 없는 추언으로 만들어졌던 전학생의 실태를 마주하자 교실은 순식간에 호흡만 남아 있는 무소음 상태가 됐다. 그렇게 긴장감과 경계심으로 가득한 현실을 가장 먼저 마주한 건 담임이었다.
”너네 오늘 이상하게 조용하다? 오늘 우리반에 전학생이 왔어. 3학년 1학기에 전학은 보통 없는데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됐으니 다들 이해해 줬으면 좋겠고, 많이들 챙겨 줬으면 좋겠다. 다 잘 할 수 있지? 너네 이제 다 컸으니까 되도 않는 서열질 할 생각은 말고. 자, 소개는 직접해.“
소개는 직접하라는 담임의 목소리에 단상 앞으로 올라 선 김도훈은 누가 봐도 잘생긴 남자의 표본이었다. 키도 어디가서 절대 작은 키로 꿀리지 않는 자신과도 언뜻 비슷해 보였다. 어제 봤을 땐 인지 못했던 부분이었는데. 김도훈은 또렷한 이목구비 마냥 또렷한 목소리로 소개를 내뱉었다.
“이름은 김도훈이고, 보다시피 잘생겼어. 는 장난. 미국에서 와서 모르는 부분이 많으니까 이것저것 잘 좀 부탁할게. 잘 지내 보자.”
여러 억측과 추측들 중 사실을 정통한 건 단 몇 가지에 불과했다. 그 몇 가지는 언급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만한 것들이라서 교실에 있는 모두가 수긍했다. 담임은 서열질 할 생각은 말라고 했지만 무법지대 정글 속에 서열이 없을 수 있을까. 소개 한 번으로 김도훈은 보이지 않는 서열 상위권에 안착했을 게 눈이 선했다.
"소개 깔끔해서 좋네. 조금이라도 익숙한 사람 옆에서 적응하는 게 편할 테니까 도훈이는 정환이 옆에 앉아. 얼굴 알지? 다들 아까 말한 거 잊지 말고, 도훈이한테 잘해 줘라. 1교시 준비 잘하고."
담임이 나가고 김도훈은 내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자신에게 꽂히는 시선이 몇 개인데 신경도 안 쓰인다는 듯이. 그러고는 담임이 말한 자리에 자연스럽게 착석했다.
"공부하는 건 매번 왼쪽에서만 봤는데 오른쪽에서 보는 건 처음이라 되게 설렌다."
"뭐?"
"공부 열심히 할 생각에 설렌다고."
이쯤 되면 질 나쁜 장난인가 싶어 기분이 살짝 안 좋아졌다. 그런 나를 예상했다는듯이 김도훈은 가방에서 초콜렛, 젤리, 마시멜로우 등을 잔뜩 꺼냈다. 먹을래? ABC 초콜렛을 입에 넣으며 김도훈이 물었다. 어이가 없어서 거절하고 싶었는데 나 신정환 너무나도 본능에 약한 동물 인간이었다. 응. 망설임없이 마켓오 브라우니를 까서 입에 넣었다. 당은 상쇄 작용을 착실히 이행했다.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 나를 김도훈은 귀엽다는듯이 쳐다 봤다. 그런 적응 안 되는 시선에 무시를 택했다. 그럼에도 김도훈은 이제는 엎드린 채로 나를 쳐다 보기 시작했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 김도훈이 내 팔을 톡톡 건드렸다. 이유 없는 관심에 살짝 짜증이 올라올 때 즈음이라 조금은 예민하게 대답이 내뱉어졌다.
"왜?"
"나 전학생인 거 잊지 마. 교과서 같이 봐야지."
맞다. 얘 전학생이었지. 당연한 이유에 정당한 이용 행위였지만 괜히 악용처럼 느껴져 기분이 요상해졌다.
"너 일부러 그래?"
"뭘?"
괜히 엄한 사람 나쁘게 만드는 것 같은 기분에 따지기를 포기했다. 와중에 김도훈은 또 실실 웃고 있었다. 왜 읏고 난리. 절대 정 안 떼 줄 거라고 다짐했다.
목요일은 1교시는 영어였다. 조금은 취약한 부분이라 집중이 필요한 과목이었다. 옆에 앉은 김도훈은 미국에서 왔다더니 여유가 있는 모양새였다. 재수없다. 삐뚤게 안 나가려고 하는데 괜히 쟤는 부족한 거 없이 다 가졌다는 생각에 잠겨 있던 자격지심이 떠올랐다. 교과서 보여 주기기 싫은데 사회적 시선을 무시할 수 없어 가운데에 교과서를 펼쳤다.
빽빽한 교과서 필기를 보고 김도훈이 감탄했다. 우와, 알고는 있었는데 공부 진짜 열심히 하는구나. 하고. 뭘 안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조금은 단순한 성격 때문인지 공부 열심히한다는 칭찬에 기분은 좋아졌다. 이랬다저랬다 표정 변화 퍼레이드를 감상한 김도훈이 펜을 들고 책에 뭔가를 끄적였다. 아, 내 책인데.
I Love You
머리 위에 물음표가 띄워졌다. 갑자기 I Love You? 영문을 몰라 쳐다 보니 김도훈이 또 웃는다.
"나 미국에서 살다 오긴 했는데, 영어 개못해. 이게 내 최대 영어. 알러뷰."
두 눈을 너무 빤히 맞추고 말하는 바람에 괜히 기분이 묘해졌다. 작은 감정의 변화를 들키기 싫어 또 퉁명하게 말이 나갔다.
"뭐래."
"진짠데. 내 볼 한 번만 눌러 봐."
"싫어."
"아, 제발."
"너 인형 흉내내면서 알러뷰 할 거잖아.”
"아니라고오. 제발."
김도훈이 책상에 얼굴을 마구 부벼대며 애원했다. 제바아아아알. 내 볼 한 번만 눌러 보라니까? 제발. 무시하고 싶어도 얼굴까지 눈 앞에 들이미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알았다고 대답했다. 대답만 하고 볼은 절대 안 누르려고 했는데 김도훈 눈이 폐도서관에서처럼 반짝이는 바람에 이건 정말 어쩔 수 없었다고 정당화하며 홀린 듯 볼을 눌렀다.
그러자 김도훈이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뭐라뭐라 답했다.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 너 영어 개못한다며. 배신 당한 기분에 김도훈이 써 놓은 I Love You에 분노로 화답했다. 말 걸지 마. 그거 보고 김도훈이 엎드려서 얼굴 가린 채 끅끅거리면서 웃기 시작했다. 울컥하려는데 김도훈이 웃음기 안 가신 얼굴 들고 다시 한 번 말했다.
"놀려서 미안. 대신 내가 비밀 하나 알려 줄까. 이건 진짜 거짓말 안 하고 무조건 진실로."
"뭔데?"
됐다고 거절하려고 했는데 김도훈 얼굴이 갑자기 결연해져서 홀린듯이 뭐냐고 물어봤다. 별거 아니기만 해 봐라. 가만 안 둘 거니까. 입을 달싹이던 김도훈은 큰 결심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정환이 형."
정환이 형?
I Love You.
ㄴ 말 걸지 마.
ㄴ 나 사실 형보다 두 살 어려. 17살. ㅋㅋ
세상이 불공평하다 생각하여 행동하는 전환점은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어렵지 않게 마주하게 되는데, 그것을 스스로 인지하게 되는 순간이 왔을 때는 이미 늦었다. 불공정에 사로잡힌 불공평함만 있을 뿐이다. 불만을 토로하고 내뱉고 싶으면 그렇게 하면 된다. 다만, 돌파구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신을 믿는 우리에게 가혹하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