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뽀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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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훈이 정환을 처음 본 것은 5살 여름이었다. 도훈아, 인사해. 옆집에 이사 온 정환이 형이야. 말간 얼굴, 조금 큰 키, 새빨간 얼굴. 형아 안녕-. 유치원에서 배운 대로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더니 결국 아주머니 옷자락 뒤로 숨어 꾸벅 인사하는 모습이 참, 형답지 못하다고 느꼈더란다. 아팠다던가. 1년을 병상에서 보냈다는 정환은 조금 야위어 보이기도 하고, 피부가 희어 보이기도 하고. 참 곱다. 그게 첫인상이었다.

 

정환과는 금세 친해졌다. 애들이 다 그렇지 뭐. 유치원에서 돌아오자마자 집에 가방 내팽개치고 옆집 문부터 두드리기를 일주일. 빨간 얼굴로 눈도 못 마주치던 정환이 도훈의 옆구리를 쿡 찌르기까지 이 주일. 놀이터에서 엉키고 구르고 온몸에 먼지를 묻힌 채 헤실헤실 웃으며 아주머니께 달려가면 누구 먼저라 할 것 없이 물티슈로 얼굴을 닦아주시곤 했다. 정환의 누나들이 함께할 때도, 도훈의 형이 함께할 때도 있었지만 둘이서 가장 가까이 지냈다. 비 오는 날에도,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화창한 날에도, 흐린 날에도 늘 함께였다. 맛있는 걸 먹어도 정환이 생각났고, 유치원에서 재밌는 놀이를 배워도 정환이 떠올랐다.

 

그맘때의 정환은 도훈의 세계였다. 풀꽃을 엮어다 반지를 만들어 나눠 끼우고, 아주 작은 체리 한 알을 한 입씩 베어 물어 나눠 먹었다. 도훈이는 정환이가 제일 좋나 보네. 어른들의 놀림에 늘 당연하다는 듯 웃으며 외쳤다. 형이랑 결혼할 거예요. 그럼 정환이 도훈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야- 하고 눈치 주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 얼굴도 예뻐서 그저 싱글벙글. 도훈의 눈엔 정환이 세상에서 제일 예뻤다.

 

당시의 도훈은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왕자님, 아기, 훈이, 또이-. 그중에서 도훈이 가장 좋아하는 별명은 또이였다. 아주 어릴 적, 기억도 안 나는 갓난아기 시절에 마찬가지로 어려 제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던 친형이 저를 부르던 것이 별명으로 굳혀졌더란다. 덕분에 가족끼리 모여있을 땐 늘 또이야-.

 

 

"왜 너희 가족은 너를 또이라고 불러?"

"그냥. 별명."

 

 

어느 무더운 여름이었다. 놀이터에서 놀고 올게요. 네? 한 시간만요-. 갖은 애교로 시간을 얻어낸 주제에 막상 땡볕에서 놀진 못하고 동그란 터널로 숨은 날. 어깨를 맞대고 쪼그려 앉은 채 정환이 툭 물었다.

 

 

"형은 별명 없어?"

"없는데."

"그럼 내가 붙여줘도 돼?"

"응."

 

 

5살 김도훈 인생 최대 난제였다. 하얗고 말갛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이 형에게 어떤 이름을 붙여줘야 하는가. 멋들어진 단어를 붙여주기에 도훈의 언어 세계는 얕았고, 흔한 이름을 붙여주기엔 어린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끙끙대며 고뇌한 끝에 벼락같이 떠오른 이름.

 

 

"쩡이 하자. 우리 또이와 쩡이 하자."

 

 

어때? 우리 짝꿍 같지? 몸을 불쑥 들이밀며 말하자 조금 뒤로 내뺀 정환이 눈알을 빙그르르 돌리더니, 이내 고개를 조심스럽게 끄덕. 그래. 그렇게 정환은 도훈만의 쩡이가 되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아직 목도리를 매어야 하던 날, 정환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나도 형이랑 같이 초등학교 갈래. 엉엉 울며 떼 써봐도 안 되더라. 결국 퉁퉁 부은 눈으로 유치원에 갔지만, 누구랑도 놀지 않은 채 팔짱만 끼고 앉았다. 안녕하세요. 도훈이 어머니 되시죠. 도훈이가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으려고 해요. 도훈의 소식은 도훈의 어머니로부터 정환의 어머니, 그리고 정환에게까지 전해졌다. 실은 엿들었다. 정환 엄마, 요새 도훈이가 통 친구들이랑 놀지를 않아. 정환이도 그래?

 

 

"또이야. 요샌 친구들이랑 안 놀아?"

"어. 재미없어. 형아랑 노는 것만 재밌어."

"그치만 형은 또이가 친구랑 잘 지내면 좋겠는데."

 

 

냉큼 친구를 사귀었다. 쩡이 형, 나 오늘은 민환이랑 친구 하기로 했다. 민환이가 누구냐면, 저기 옆에 아파트 사는 앤데-. 쉼 없이 조잘조잘. 그 모습이 귀여워서 볼도 콕 찔러보고, 곱실한 머리카락도 꼬아보고, 손도 조물딱대보고. 그래도 여전히 입은 환하게 웃으며 조잘조잘. 8살 초등학생이 된 정환의 눈에 6살 유치원생 김도훈은 퍽 사랑스럽고, 귀엽고, 예뻤더란다. 쩡이 형아, 그래서, 나는 형이랑 결혼할 거야. 얼렁뚱땅 건너뛴 결론에 그저 웃으며 그래-.

 

그 나이 땐 의례 그렇지. 예쁜 사람 볼에 뽀뽀도 하고, 입술에 뽀뽀도 하고. 그냥 애정 표현. 그러니까 그맘때의 도훈이 정환에게 뽀뽀하던 버릇은 그런 종류였단 뜻이다. 손바닥 붙잡고 쪽, 희고 말랑한 볼따구에 쪽, 방금 뽀뽀한 양 볼 부여잡은 채 입술에 쪽-.

 

 

"바보야, 입술에는 사랑하는 사람이랑만 뽀뽀하는 거랬어!"

"나는 형아 사랑하는데?"

"남자끼리는 뽀뽀하는 거 아니야."

"나는 우리 아빠랑도 뽀뽀하는데?"

 

 

8살의 논리는 6살의 무논리를 이길 수 없었다. 두 손 두 발 다 든 정환은 결국 그래라-. 포기하고 말았다. 새삼스러운 허락을 얻어낸 도훈은 신나서 그저 쪽. 그 어린 나이에 또 뭘 안다고, 다른 사람 앞에서는 낯간지러웠던지 둘만 있는 공간에서나 입술을 맞부딪혔더란다. 둘만의 장난. 또이와 쩡이만의 애정 표현. 꼭 껴안고 커서 결혼하자- 라는 기약 없는 약속을 나누던 시간들. 시간이 지나 초등학교 3학년이 된 정환은 이 관계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품속의 따뜻한 체온이 좋았고, 애정 가득한 목소리가 좋았다. 생애 첫 친구. 도훈에게 정환이 세계라면 정환에게 도훈은 법칙이었다. 유일한 동생. 사랑의 정의.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라던 미술 숙제에 도화지 가득 도훈을 그려가자 모두 남동생인 줄 알더라. 정환이는 동생을 정말 사랑하나 보네-. 아닌데. 그냥 옆집 동생 또이인데.

 

도훈이라고 이 미묘한 관계를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 어쩔 건데. 나는 형이 좋고 형도 나를 좋아하는데. 부러 모른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남몰래 손잡고, 껴안고, 입술에 뽀뽀하고. 쟤랑 쟤랑 뽀뽀했대요. 반 친구들끼리 놀리는 것을 보며 저는 절대 들키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것이 초등학교 1학년. 쟤랑 쟤랑 사귄대요. 손잡는 것도 들키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 초등학교 2학년. 쟤가 쟤 좋아한대요. 마음마저 들켜선 안 되나? 초등학교 3학년의 도훈은 세상의 부조리함에 화나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마음이 어때서? 고작 10살의 도훈은 잘 부푼 마음을 놀려대는 친구들이 싫었다. 그래서 더 정환에게 들러붙기 시작했다. 그맘때의 정환은 학원에 다니기 시작해 해질녘쯤에 귀가하곤 했는데, 도훈은 저녁마다 산책 나가자고 부모님을 졸라 정환을 데리러 나갔다.

 

 

"우리 엄마도 나 데리러 안 오는데."

"나는 형네 어머님 아니고 또이인데."

 

 

그건 그렇지. 정환은 제법 싫지 않은 표정으로 제게 딱 붙어 걷는 도훈을 피하지 않았다. 우리 도훈이, 이제 정환이랑은 그만 다닐 때 되지 않았니? 정환이도 또래 친구랑 놀아야 하지 않을까? 부모님의 말씀에도 묵묵부답. 그저 매일 정환을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고. 나중엔 부모님이 함께 와주시지도 않더라. 너 또 정환이 데리러 가지? 갔다 와. 오는 길에 두부 한 모 사와. 받은 카드로 두부도 사고 아이스크림도 사서 나눠 먹었다. 양심껏 하나만. 정환이 양껏 입에 물고 맨들해진 아이스크림에 입 가져다 대려니 기분이 좀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이거 간접 키스 아닌가. 힐끗, 눈치를 살피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 그냥 단것 먹어서 행복해 보이는 표정. 역시 형은 또래 애들과 달라. 마음으로 놀리지도 않고, 같은 음식에 입 닿았다고 놀리지도 않고.

 

그맘때의 도훈이 바라보던 정환은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 동화 속 왕자님. 그야말로 완벽한, 김도훈의 우상. 그 환상이 와장창 깨진 것은 정환에게 첫 여자 친구가 생긴 후였다.

 

 

"도훈아. 나 여자 친구 생겼다?"

 

 

그럼 나는? 우린 결혼하기로 한 사이인데? 낭랑 10세. 입에 죠스바 하나씩 물고 집에 돌아오던 길. 정환이 내뱉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제 인생의 절반을 바쳐온 도훈의 순정은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서먹해졌다. 도훈아 학교 같이 갈래? 옆집 문을 두드려도 이미 등교하고 없어. 도훈아 오늘 학교 끝나고 집에 같이 갈까? 형-! 도훈이 축구하러 갔어요-! 교실 문을 두드려도 없어. 운동장에 나가서 찾고 있자니, 눈 마주치자마자 줄행랑. 이게 뭔데? 그렇게 12살의 신정환은 제 동생을 잃어버렸다. 해줄 말이 많은데. 쌓인 이야기들이 많은데.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집 앞에서 마주쳐도 데면데면. 마트에서 마주쳐도 데면데면. 너희 싸웠니? 부모님의 질문에도 그저 고개만 가로저어 보일 뿐. 막상 멀어져도 못 살 것 같진 않던데. 금세 다른 친구들이 서로의 빈자리를 채웠다. 부모님께서 이직하셨다. 이사를 갔다. 전학 간 학교 애들도 착하더라. 순식간에 적응했다. 그렇게 잊혀져 갔다. 중학교에 입학했다. 졸업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잘생긴 것으로 유명해졌다. 선배의 권유로 전교 회장 선거에 러닝메이트로 출마했다. 당선됐다. 부회장으로 처음 등교한 2학년 3월 2일, 단상에 서 있던 도중 속이 메스꺼워 화장실로 달려갔다. 모든 것을 토했다. 토하고, 토하고, 또 토했다. 두통이 끊이질 않았다. 살이 빠졌다. 며칠 후, 유독 잠에서 깨기 힘들어하던 정환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던 도중 그대로 고꾸라져 쓰러지고 말았다. 뇌출혈이었다.

 

혈관 기형이라더라. 눈을 뜨니 약 냄새가 온몸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사라졌다. 거울을 보고 울었다. 여전히 속이 메스꺼웠고, 여전히 두통이 일었다. 그래도 마비 같은 거 안 온 게 어디야. 대학생이 되어 타지로 떠난 누나는 주말마다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친구들 몇몇이 병문안을 왔다. 고맙지만 이런 꼴을 보인 것이 부끄러워 빨리 내보냈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래서 게임을 했다. 생전 해본 적 없었는데. 꽤 재밌더라. 모험을 떠나고, 떠나고, 떠났다. 몇 개의 닌텐도 팩을 깼다. 머리에 비니를 눌러쓴 채 퇴원했다. 학교는 가지 못했다. 일 년 쉬자. 부모님의 결정이었다. 집에서도 하루 종일 게임만 했다. 그 생활을 몇 달이나 했을까. 어머니의 인내심도 한계에 부닥치고 말았다.

 

 

"정환아. 이제 공부도 하는 게 어떠니?"

 

 

아차.

 

일 년이 훌쩍 지나갔다. 엄마, 나 이제 학교 가도 돼? 어어. 그런데 정환아, 우리 이사 가야 할 것 같은데. 괜찮지? 괜찮고 자시고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어차피 병상에 누워있는 사이 친구들이랑 연락도 다 끊겼는데. 그래도 약은 끊었다. 남들보다 좀 더 길게 먹었다 하더라. 그런 건 모르겠고, 두통이 없어졌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이사 온 동네는 예전에 살던 그 동네였다. 아버지 회사 발령 때문이라던데. 이것도 잘 모르겠고. 예전에 살던 집에서 왼쪽 아래로 옮겨왔다는 사실만 알면 되지 않나.

 

 

"우리 정환이, 오랜만에 도훈이도 보겠네."

"도훈이?"

"왜. 너 어릴 때 맨날 붙어 다니던 옆집 애 있잖아. 두 살 어렸나?"

 

 

19살 신정환에게 12살의 기억은 까마득하기만 했다. 뭐. 그런 애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실은, 아픈 이후로 기억이 오락가락 했다. 온전하지 못한 기억을 더듬어가며, 도훈이, 도훈이. 누구더라. 얼굴은 기억 안 나는데. 까무잡잡하고, 조그맣고, 귀여운 애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 형-!"

 

 

와락 달려드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뒤로 주춤 물러서고 말았다. 누구지. 뭐지. 당황한 정환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은 채 빙글빙글 돌았다. 파란 하늘, 폭닥한 목도리, 얇은 떡볶이 코트, 꽉 껴안은 힘. 억겁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도훈은 정환을 잠시 껴안았다 곧 풀어내고 팔을 붙잡으며 환히 웃었다. 신정환이다. 제 우상이 돌아왔다.

 

 

"형, 나 도훈이! 기억 안 나?"

 

 

나 또이잖아. 형은 쩡이, 나는 또이 하기로 했잖아. 희미하게 남은 기억을 더듬으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안녕. 오랜만이야.

 

형 아팠다며. 도훈은 어머니께 전해 들은 건지, 정환의 사정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같은 학교라서. 버스로 20분 걸리는 등하굣길을 도훈과 함께했다. 다행스럽게도 어색함은 며칠 가지 않아 사라졌다. 붙임성 있게 다가오는 도훈 덕분에 낯가림을 풀 수 있었다. 예전에 살던 동네라고 마음이 좀 놓이기도 하고. 제 베스트프렌드가 되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요 맹랑한 놈이 웃기기도 하고. 같이 다니다 보니 옛날 기억도 하나씩 떠오르더라. 물론 전적으로 도훈의 영향이었다. 형, 그거 기억 나? 우리 맨날 학원 끝나고 아이스크림 하나씩 먹으면서 왔잖아. 놀이터 터널 안에 들어가서 떠들고.

 

 

"그땐 형이랑 결혼할 거라 했었는데."

"남자끼리 어떻게 결혼을 해."

"그러게."

 

 

픽 웃으며 버스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10살 김도훈의 박살 난 순정. 17살 김도훈이 모아다 붙이다.

 

왜 좋냐. 답할 길이 없었다. 잘생겼는데 어떡해. 이건 신정환이 저를 먼저 꼬신 것이었다. 잘생긴 얼굴로 제 앞에 나타난 죄였고, 제 품 안에서 바르작댄 몸짓이 잘못이었다. 몸을 떼어낸 뒤 마주한 눈동자엔 어색함이 한가득 담겨 갈 길 잃은 채 빙글빙글. 7년 만에 마주한 신정환은 키도 커지고, 얼굴도 잘생겨지고, 어깨도 넓어지고, 결정적으로 더 귀여워졌다. 어색한 웃음. 낮아진 목소리. 점차 긴장이 풀리는 과정이 눈에 훤히 보일 때 뭐 그리 귀엽던지. 그렇게 잊혀졌던 풋사랑이 되살아났다.

 

도훈과 정환은 같은 학원에 다녔다. 또 아플까 봐, 아직은 혼자 두기 좀 그래. 도훈이랑 같이 다니면 그래도 안심이지. 부모님의 결정이었다. 뭐, 어쩌겠어. 따라야지. 정환에게도 좋은 선택이었다. 혼자 터덜터덜 한 살 어린 동생들 사이에 낑겨 다니는 것보다야 어릴 적 친했던 김도훈이랑 등하원 하는 게 더 낫지. 하루 종일 함께했다. 나란히 등교하고, 나란히 하교한 뒤, 같이 학원으로 향했다. 학원 수업이 마치면 카풀로 부모님 차를 탄 채 집에 돌아왔다. 그뿐이랴. 점심시간이면 같이 축구했고, 동아리 시간이면 컴퓨터실에 나란히 앉아 같은 게임을 했다. 온통 서로로 가득했다. 둘이 어떻게 친해? 학기 초 자주 듣던 질문은 쏙 들어간 지 오래였다. 도훈과 정환은 당연하게 한 묶음으로 불렸다. 야, 너네 형 왔다. 친형이 들으면 억울할 소리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며 데굴데굴 교실 밖으로 달려나가, 혀엉-!

 

안타깝게도 꼴에 머리가 굵어진지라 예전처럼 손을 잡거나 뽀뽀를 하진 못했다. 그저 서로의 시간에 침투하여 시야를 앗아갈 뿐이었다.

 

 

"예전에는 손도 잘 잡아줬으면서."

"잡아줘?"

"아니."

 

 

17살의 김도훈은 남의 눈치를 신경 쓸 줄 알게 되었다. 키 멀대같은 남고딩 둘이서 손잡고 복도를 거닐었다간 순식간에 이상한 소문이 퍼질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둘만 있을 땐 잡을 수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며 저보다 조금 높은 눈높이를 곁눈질로 힐끔. 희고 말간 피부 콕 찌르고 싶은 충동 억누르며 스치는 손등을 뒤로 내뺀다. 왜 매일 점심시간마다 같이 축구하는데 나는 타고 형은 하얗지. 시원하게 쭉 뻗은 손끝이 희고 붉어서 애꿎은 얼굴만 화끈. 아. 손잡아보고 싶다.

 

 

"어차피 잡아달라 해도 안 잡아줄 거잖아."

"어떻게 확신해."

"내가 형보다 형을 잘 알걸."

 

 

빤히 내려다본다. 눈을 피하긴커녕 턱을 들어 올려 보인다.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때마침 계단에 접어들었다. 교복 끝자락 하나 보이지 않는 텅 빈 공간에 우두커니 서서 시선을 맞부딪혔다. 또 손등이 스쳤다. 감싸듯 손을 돌려 손바닥끼리 마주 보게 만든다. 그리고선, 꽈악-. 힘주어 마디마디 얽어 잡고서 재빨리 놓아버렸다.

 

 

"늦게 오는 사람이 매점 사기."

 

 

벙찐 정환을 뒤로 한 채 계단을 세 칸씩 뛰어 내려간다. 시뻘겋게 달아올랐을 것이 분명한 얼굴에 바람이 부딪쳤다. 앞머리가 들어 올려졌다. 난간을 쥔 손이 화끈거려도 속도를 줄일 수 없었다. 뒤따라오는 정환의 발소리가 우당탕탕 울렸지만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내질렀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오랜만에 맞잡은 정환의 손은 크고, 따뜻하고, 부드럽고, 부끄러웠다. 어릴 땐 아무렇지도 않게 덥석덥석 잘만 잡았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낯간지러워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그러다 잡혔다. 매점 코앞까지 와서 어깨를 붙잡혔다. 몸이 돌아갔다. 눈이 마주쳤다. 앞으로 나아가던 가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어깨를 부닥쳤다. 안겼다.

 

진짜 이상하지. 17살 김도훈으로 처음 재회한 날, 무턱대고 반가움에 부둥켜안았을 땐 이런 감정이 들지 않았었는데. 넓은 어깨에 폭 기대어 새하얀 목덜미에 얼굴 파묻고 있자니 좋은 향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섬유유연제 향인지, 아니면 그냥 정환의 향인지. 방금까지 뛰어놀다 와서 땀 냄새가 날 것이 분명한데도. 세차게 뛰는 심장은 내달린 탓이고, 띵한 머리는 산소가 부족한 탓이리라. 쿵, 쿵. 누가 볼세라 황급히 몸을 떼어냈다. 얼굴이 뜨거웠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정환에게서 한 발짝, 두 발짝 멀어진다.

 

 

"아니, 형, 방금은-."

"늦게 오는 사람이 매점 산다고 했다."

 

 

그러고서 뛰어가 버린다. 혼자 멀뚱히 남겨진 도훈은 채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몸부터 움직였다. 아, 형-! 치사해!

 

그날 이후로 다시 거리가 가까워졌다. 손도 덥석덥석 잡고, 너른 품에도 덥석덥석 안겼다. 머리카락을 매만져도 가만히 있어, 목덜미를 긁어내도 가만히 있어. 얌전히 앉아 제 손을 타는 정환을 바라보고 있자면, 묘한 기분이 드는 것이, 이게 참, 동해 물과 백두산이-. 도훈의 눈에 비친 정환은 매끈한 조각상. 비너스의 화신. 대리석을 빚어 만든 것처럼 하얗고, 예쁘고, 조금 야하다. 실은 많이 그렇다. 사심 없는 척 쥐어본 살결은 보드랍고, 마디마디 불거진 손은 미술 교과서에 나올 것만 같다. 옷 위로 언뜻 내비치는 뼈마디가 야하고, 흰 티셔츠 아래 보이는 얄팍한 허리 실루엣이 야하다. 고작 열일곱의 김도훈에게는 신정환이란 존재 자체가 고자극. 도파민의 집결체. 친구들이 야동 보고 딸칠 때 도훈은 정환을 떠올리며 자위했다. 그러게, 왜 그렇게 예쁘게 생겨서.

 

그러니까 그맘때의 도훈은 오로지 정환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도훈의 온 세계가 정환이었다. 마치 10살의 또이처럼.

 

 

"넌 너 친구들이랑 안 놀아?"

 

 

어느 날, 체육관 1층의 탁구실에서 단식으로 실컷 달리고 구석에 어깨 맞대고 앉아 늘어진 정환이 도훈에게 툭 말을 걸었다. 이 새삼스러운 말은 뭐야. 형도 같은 반 애들이랑 안 다니고 나랑만 놀면서. 도훈이 곁눈질로 정환을 흘기고서 스르륵 어깨에 고개를 기대었다.

 

 

"내 친구들은 다 형 좋아해."

"웬 동문서답이야."

"그래서 내가 형이랑 놀면 오히려 부러워해."

 

 

나는 나만 형 알고 싶은데. 파묻은 고개를 부비적거리며 파고들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어릴 때도 자주 이랬는데. 불안정하던 정환의 기억은 몸이 회복됨에 따라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실은, 도훈에 대한 기억만. 뚜렷하진 않으나 매우 아꼈던 감정이 남아있다. 그땐 온갖 어리광을 받아줬던 것 같다. 손 잡고, 껴안고, 뽀뽀하고. 초등학교 다니는 남자애들이 할 행동이라곤 상상하기 힘든 짓들을 많이 했더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열 살짜리 김도훈은 저를 너무도 좋아했고, 그런 또이가 너무나 귀여웠다. 불가항력이었다. 작은 입으로 오물조물 안아달라 말하는데 매정히 내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열일곱의 김도훈이 안 귀엽다는 건 아니고. 물론 지금도 귀엽지만서도. 귀여우니 이런 어리광 다 받아주고 있지. 목에 닿아오는 간지러운 감각도, 슬며시 잡아 오는 손도.

 

 

"지금도 너랑만 놀잖아."

"그렇긴 해."

 

 

도훈이 어깨를 기댄 채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얼굴이 너무 가까이 있었다. 습관적으로 입술에 눈이 닿았다. 말랑 촉촉해 보이는 것이, 꼭 푸딩 같기도 하고. 콕 찔러볼까 고민했다. 고민만 했다. 좀 그렇잖냐. 다 큰 애들끼리. 우리가 아직도 10살 꼬맹이들도 아니고. 도훈은 정환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치고 있는지 모른다는 듯 그저 눈을 깜빡, 입꼬리를 굳히면서도 고개를 내빼지 않고 옅은 눈동자만을 바라보았다. 예쁘다. 그림자 내리워진 속눈썹도, 매끄러운 콧대도, 무게를 견디기 버거운 듯 툭 불거진 입술도 전부 예뻤다. 곳곳에 박힌 점, 조금 흔들리는 동공, 뽀얀 얼굴. 냅다 들이박았다. 붉은 기 도는 볼따구에 쪽. 깜짝 놀라 동그래진 눈을 보며 방금 입 맞춘 자리를 손끝으로 콕.

 

 

"뭐야?"

"뽀뽀."

"왜?"

"그냥."

 

 

얼버무린다. 우리 어릴 땐 많이 했잖아. 구구절절 늘어놓는 말이 제가 듣기에도 꼭 변명 같아서, 옆에 있는 기둥에 머리를 처박는다. 아, 뭐 그런 걸 물어봐-! 앙탈 한 번 부려보고, 싫어? 이젠 하지 말까? 객기 한 번 부려보고. 맹한 얼굴. 불퉁한 입술. 어딘가 불만 가득한 얼굴. 말 한마디 없는 저 형이 얼마나 야속한지. 누구는 지금 속 타서 죽겠는데.

 

 

"너 뽀뽀하고 싶어?"

 

 

진지하게 묻는 얼굴도 얄밉기만 하다. 그럼. 뽀뽀하고 싶으니까 했지. 하기 싫으면 했겠어? 새침한 말은 삼키고, 맹한 눈 바라보다 간신히 끄덕. 성큼 얼굴이 다가온다. 주위를 살핀다. 그러더니 눈을 꼭 감고, 쪽- 닿았다. 턱에. 얼굴을 떼낸다. 말없이 시선이 오갔다. 방금 입술 아니지. 묻는다. 그래 놓고 혼자 입을 틀어막는다. 얼굴이 붉어진다. 뽀얀 볼에 붉은 열꽃이 피어올랐다. 주춤, 몸을 뒤로 물리며 고개를 위로 쳐든다. 선명히 보이는 목젖. 콕 찌르자 화들짝 놀라며 저를 쳐다본다. 귀여워.

 

살풋 다가간다. 피하지 않는다.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천천히 얼굴을 맞붙인다. 손을 겹쳐 잡고 눈을 감는다. 말캉한 촉감이 와닿는다. 조심스레 떼어낸다. 여전히 가까운 거리. 제게 닿는 눈빛이 부끄러워 어깨에 푹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부끄러워. 뽀뽀가 이렇게 부끄러운 행위였던가. 어릴 땐 그냥 덥석덥석, 이마에도, 입술에도, 볼에도, 코끝에도 해댔던 것 같은데. 짧게 닿은 정환의 입술은 생각만큼이나 말랑하고, 촉촉하고, 꼭 말캉한 물풍선을 만지는 느낌.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쿵쿵쿵. 저 복도 너머까지 들릴 것만 같았다. 세차게 뛰어대는 심장을 어떻게 하지 못한 채 애꿎은 정환만 꽉 껴안는다. 진정되지 않았다. 몸을 떼어낸다. 마찬가지로 새빨간 얼굴. 아무 말도 못 하고 어버버, 손으로 입만 틀어막은 채 쿵쿵쿵.

 

 

"야 김도훈, 너 여기 있지? 선생님이 찾으셔-!"

 

 

때마침 벌컥. 탁구실 문이 열렸다. 화들짝 놀라 몸을 떼어내고 벌떡 일어선다. 어 나 여기-! 고개만 돌려 정환을 향해 손을 흔들고, 이따 봐-. 입 모양으로 속삭인다. 놀라 진정되지 않는 가슴이 온몸을 울렸다. 물 위를 걷는 것만 같았다. 말랑한 바닥이 발을 감싸고, 튀어 오르듯 몸을 띄웠다. 마음이 간지러웠다. 더워? 왜 이렇게 빨개? 친구의 물음에 그냥 웃으며, 어어-. 좀 더워. 빨갛게 익은 마음이 요동치며 제 존재를 알렸다. 좋다. 좋아한다. 신정환을 좋아한다.

 

그날도 같이 하교했다. 어색하게 손등이 스칠 때마다 꽉 붙잡고 싶은 충동을 눌러 참으며 멀찍이 몸을 떼어냈다. 힐끗 보더니 붙여온다. 또 떼어냈다. 또 붙여온다. 반복하다 보니 길가로 기울어 차도 가까이 아슬아슬 걷게 되었다. 조심해. 팔을 붙들렸다. 길 가운데로 성큼성큼. 뜨거운 손바닥의 온기가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입술을 바라보았다. 촉감을 알고 나니 더없이 참기 어려웠다. 주먹을 꽉 쥐고 눌러 참는다.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는지, 옆을 돌아본다. 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얼굴이 얄미워 콱, 옆구리를 움켜쥐어버린다.

 

 

"뭐해-."

 

 

살짝 찡그린 표정, 불퉁해진 입술, 입술, 입술. 안 되겠다. 정환의 팔을 붙들고 옆 건물로 들어선다. 계단 반 층을 내려간다. 막힌 철문 앞에서 무작정 고개를 끌어당겨 입술을 부닥친다. 놀라 벌어진 입 틈새로 앞니와 부딪혀 입술이 짓이겨졌다. 그러고도 좋아서 입술을 문대고 몸을 가까이 붙인다. 계단 위쪽으로 들리는 사람들의 발소리,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 지하의 꿉꿉한 냄새, 조금 서늘한 공기, 맞닿은 체온.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만 같았다. 몸이 붕 뜨고 하늘 위를 나는 기분. 살이 닿는 곳마다 두근거렸다. 꼭 심장이 여러 갈래로 나뉜 것마냥 정환을 향해 뛰었다. 꾹 감은 눈을 살짝 떠본다. 시야 가득히 정환이 들어찼다. 마주친 눈. 투명한 눈동자. 눈을 깜빡. 다시 한번 깜빡. 깜빡깜빡.

 

휙 얼굴을 떼어냈다. 옷소매를 당겨와 입술을 가린 채 시선 둘 곳을 모르고 그림자 진 계단 아래만 하염없이 쳐다봤다. 확 머리가 개는 것만 같았다. 무슨 짓을 벌인 건지. 멀쩡히 길 가던 형을 붙잡고 이끌고 계단 아래에 숨어 입술을 맞대고 손을 얽어 잡고 몸을 붙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도망가면 어떡하지. 뒤이은 생각은, 그런데 형도 안 피했는데. 슬며시 눈치를 살핀다. 빨개진 얼굴. 옷소매를 부여잡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바르작대는 손끝. 마찬가지로 바닥으로 내리깐 시선. 살풋 다가간다. 꼭 껴안는다. 사실상 안긴 꼴이 됐지만, 어찌 됐든. 팔을 벌린 쪽이 안은 것 아니겠는가.

 

 

"왜 뽀뽀했어?"

"싫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이 타이밍이다.

 

 

"좋아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 웅얼거린다. 형이 좋아. 손잡고 싶고, 껴안고 싶고, 뽀뽀하고 싶어. 닿고 싶어. 형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되고 싶어. 팔을 얽어매여 간신히 허리를 감싸안은 정환이 손을 꼼지락댔다. 그 움직임이 고스란히 등허리에 전달됐다. 간지러워. 몸을 뒤틀며 떨어졌다. 때를 맞추지 못한 웃음. 키득이며 풀린 손을 살포시 잡는다. 눈을 바라본다. 땅바닥에 떨궈진 시선. 형. 나 좀 봐. 응? 나는 형밖에 없는데.

 

 

"나도 너 좋아."

 

 

그런데. 남자끼리 사귀어도 되는 거야? 조금 이상하지 않아? 나는 너 친구들처럼 작지도 않고, 어깨도 넓고, 손도 크고-. 그런데도 정말 좋아? 말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빙빙 돈다. 횡설수설한다. 혼란스러운 표정. 짓이기는 입술. 잡았던 손을 놓고 양 뺨을 감싼다. 정환의 작은 얼굴은 도훈의 작은 손에 꼭 맞았다.

 

 

"형, 나 봐."

 

 

간신히 눈이 마주쳤다. 까만 눈동자. 진지한 표정. 방금까지 맞부딪히던 입술을 오물조물 움직여 말을 잇는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나만 봐. 나는 형이 좋아. 형이 멋있어서 좋고, 형이 커서 좋아. 형이 바보 같을 때도 좋고, 형이 쪼그려 앉아서 작아 보일 때도 좋아. 만약 몇 년 뒤에 내가 형보다 커진다고 해도, 형이 나보다 작아진다고 해도 여전히 형을 좋아할 거야. 형은 어때? 나는 어릴 때만큼 귀엽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데, 그래서 이젠 내가 싫어?

 

 

"아니."

"나도 똑같아."

 

 

눈이 조금 커진다. 때를 놓치지 않고 얼굴을 들이민다. 쪽. 입술이 가볍게 맞닿았다 떨어진다. 다시 얼굴이 화르륵 불타오른다. 귀여워. 다시 꼭 껴안는다.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형. 우리 결혼할까? 남자끼리 무슨 결혼이야. 그럼 사귈까? 묵묵부답. 그것도 싫으면 뽀뽀할까? 고개를 뒤로 물린다. 시야 가득히 서로의 얼굴이 들어찼다. 눈을 감는다. 입술을 맞부딪힌다. 말캉한 촉감, 따뜻한 온기, 은은한 체향. 혀를 살짝 내밀어본다. 입술을 맛본다. 달다. 혀가 에일 듯이 달았다. 주름진 하순을 따라 움직인다. 상순을 훑는다. 그러고서 다시 쪽. 얼굴을 떼어낸다. 마주친 눈, 눈.

 

 

"뽀뽀했으니까 사귈까?"

 

 

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마냥 귀엽다고만 생각했던 꼬맹이가 언제 이렇게 컸는지. 비슷해진 눈높이, 곧은 눈빛, 단단한 손. 그래봤자 여전히 귀엽지만. 감정을 되돌아본다. 귀여운 김도훈. 사랑스러운 김도훈. 손을 잡아도, 팔짱을 껴도, 껴안아도 여전히 사랑스러운 김도훈. 왜 뽀뽀했더라. 도훈이 제 볼에 먼저 뽀뽀해서. 그렇다고, 왜, 왜, 왜- 입술에 뽀뽀를 시도했었는가.

 

어차피 답은 하나였다. 정환은 도훈을 좋아한다. 어릴 적 풋사랑과 다른 감정이었다. 닿으면 좋다. 같이 있으면 행복해진다. 긴장할 것 없이 마음이 편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작아진다. 저는 여느 여자애들처럼 작지도, 사랑스럽지도 않은데. 자꾸만 비교하게 된다. 도훈의 친구들과 저. 도훈을 좋아하는 애들과 저. 넌 네 친구들이랑 안 놀아? 넌지시 물어도 보고, 돌아오는 대답에 안심하고. 좋아한다. 이 당연한 감정을 도훈의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응."

"진짜?"

"응."

"제대로 말해줘."

"좋아해."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간신히 내뱉는다. 교복 상의를 꾹꾹 끌어 내리며 애꿎은 땅바닥만 발로 틱틱 찬다. 그러다 안겼다. 빈틈없이 꽉 안겼다. 심장 박동이 전해졌다. 쿵, 쿵, 쿵. 맞닿은 가슴이 울렸다. 몸이 붕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문득 입술이 간지러웠다. 몸을 뒤틀어 품을 빠져나갔다. 왜 그러냐는 표정. 심통 난 입술. 입술. 콕 찌른다. 맞댄다. 이번엔 제대로. 말캉한 감촉을 느끼기도 전에 부닥쳐 혀로 쓸어본다. 매끈한 안쪽이 말캉하게 와닿는다. 살짝 움직여본다. 까슬한 혀와 맞닿았다. 조심스럽게 원을 그리듯 움직여본다. 뜨겁다.

 

살짝 입을 떼어낸다. 눈이 마주쳤다. 발간 볼. 귀여워. 푸스스 웃고 말았다. 옅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때마침 발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번 시험 범위 어디지-? 두런두런 들리는 말소리. 깜짝 놀라 위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손을 맞잡았다. 서로의 눈치를 살핀다. 눈이 마주치고, 또 푸스스.

 

 

"가자."

 

 

손을 맞잡은 채 계단을 올랐다. 주홍빛 노을이 거리에 내려앉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보도블럭을 밟으며 튀어 오르듯 통통 걸었다. 사랑이 덩달아 튀어 올랐다. 쏟아지는 석양이 머리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다. 빛나는 머리끝을 톡 건드린다. 눈이 맞부딪힌다. 곱게 휜 눈, 호선을 그린 입술, 입술. 빛나는 입술을 톡, 마주친 시선에 툭. 빛이 번졌다. 사랑이 터졌다.

 

 

 

 

 

 

 

-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