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운 더 라인

반주

 

수험생의 여름방학. 비슷한 표현이 뭐가 있지. 보이스피싱으로 백만 원 털렸는데 로또 5등 당첨? 메뉴가 잘못 배달된 와중에 1인분 더 딸려 오기? 갈증으로 쓰러졌을 때 탄산 다 빠진 미지근한 콜라 한 모금? 그러니까, 하등 쓸모없는데 그렇다고 싫냐고 하면 또 그건 아쉬운. 대충 그런 시간이란 뜻이다. 침대에 늘어지듯 누워 있던 정환이 눈을 감았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젖은 풀 냄새가 흘러들어 왔다. 뉴스에서 떠들어 대는 수능 관련 이야기가 전부 남의 일 같았다. 전혀 실감이 안 났다. 이 더위가 끝나면 성큼 눈앞에 다가와 있을 걸 알면서도, 영원히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열아홉의 마지막 여름에서 빠져나가고 싶지 않았다.

 

신정환.

 

언제 잠들었는지도 몰랐다. 눈을 뜨니 또렷한 시선이 코앞에서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시간대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멍하니 눈만 깜빡이자 한 번 더 이름을 부른다. 신정환. 그제야 정환은 음성에 묻어 있는 감정을 알아챘다. 서운함. 허탈함. 미약한 짜증.

 

영화 보러 안 가?

…갈 거야.

 

느린 대꾸에 손가락이 혼내듯 이마를 툭 치고 멀어진다. 정환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도훈이 침대 한편에 걸터앉으며 얇은 여름 시트를 걷어 냈다. 그럼 빨리 움직여. 지금 가야 영화 보고 저녁도 먹어. 그 말에도 정환은 여전히 베개에 뺨을 깊게 묻은 채였다. 부스스한 머리통이 뺏겼던 이불을 다시 잡아끌고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

 

 

두 사람은 새로 나온 영화도, 그럴싸한 식사도, 무엇으로도 토요일 저녁을 채우지 못했다. 이것저것 핑계 대며 침대를 뒹굴던 정환이 그대로 다시 잠들어 버려서. 대충 라면을 끓여 먹고 19년에 개봉한 느와르 영화를 재생시켰다. 방 한쪽에 놓인 선풍기가 느리게 회전하며 도훈과 정환을 번갈아 살폈다. 가슴에 총을 맞았던 주인공이 다시 멀쩡하게 등장하는 장면에서 정환은 눈동자를 힐끔 굴렸다. 도훈은 진작 흥미를 잃은 듯 시선이 휴대폰을 향해 있었다. 우리 다음 주에는 꼭 영화 보러 가자. 괜히 찔려 꺼낸 말에 돌아오는 답이 없다.

 

민찬이가 봤는데 재밌대. 근데 전편 내용이 잘 기억 안 나. 요약본 봐야 되나.

 

정환이 덧붙이자 그제야 도훈이 휴대폰을 내렸다. 어 뭐라고? 1편 내용이 생각 안 난다고. 1편? 되묻던 도훈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우리 그거 보기로 했었나. 새삼스러운 반응이었다. 토요일. 같이 신작 영화 보고 돌아오는 길에 공원 한 바퀴 산책. 약속한 적 없는데 약속된 일상. 십 대의 끝자락으로 밀려나면서도 어긋난 적 없는 주말 저녁. 가끔 이렇게 방에 눌러앉아 제목도 들어 본 적 없는 저예산 영화로 때울 때가 있지만. 어쨌든 공유하는 시간의 내용은 늘 같았다.

그냥 그게 제일 최근에 나온 거니까. 그 평온함 사이로 끼어든 이상한 이질감에 정환이 중얼거렸다. 침대에 누워 있던 도훈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앞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더니 아예 일어나 방문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미안. 나 그거 봤어.

 

여친이 보고 싶다 그래서. 문이 열리고, 도훈이 부엌으로 멀어졌다. 형도 아이스크림 먹을 거지? 조금 커진 목소리에 정환은 대답 대신 눈만 깜빡였다. 살아 돌아온 영화 주인공은 이제 맨손으로 건물 벽을 타고 오르는 중이었다. 그를 향해 총알 더미가 날아들었다. 주인공은 죽기는커녕 단 한 발도 맞지 않았다. 그 황당한 전개에도 정환은 웃을 수 없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도훈이 아이스크림 스푼을 내밀었을 때도, 그저 도훈을 빤히 쳐다만 봤다.

 

도훈아.

어.

너 여자 친구 있어?

 

정환의 앞에 마주 앉은 도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말 안 했나.

…언제, 언제부터?

한 2주 된 듯?

 

아이스크림을 퍼먹는 도훈의 얼굴이 너무 태연해서, 그래서 정환은 곧장 튀어나올 듯 혀끝에 매달린 질문을 차마 뱉지 못했다. 근데 도훈아. 너 나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라고.

 

 

 

형. 좋아해.

 

그 고백에 뭐라고 대꾸했었는지 정환은 잘 생각이 안 났다. 도훈이 같은 학교 후배가 된 걸 축하하면서 밥을 먹고 돌아오던 길이라 다른 건 다 또렷하게 기억하는데 그거 하나만은 희미했다. 뭐라고? 반문했었나. 그냥 웃었던가. 정색했을지도. 아무튼 그 말을 던지고 돌아서던 도훈의 뒷모습이 그리 밝지만은 않았던 거 같다. 정환은 한동안 약한 두통과 소화 불량에 시달렸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옆집 동생에게 고백받았다는 충격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어떡하지. 거절하면 이제 예전처럼 못 지내는 건가? 어색해지고 멀어지나? 그건 싫은데. 받아 주면? 그럼 사귀는 건가? 도훈이랑 내가? 상상이 잘 안 갔다. 김도훈은 앤데. 정성스럽게 햄버거에서 양상추를 하나하나 다 뽑아내는 꼬맹인데. 그런 애랑 사귄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처음과 끝이 꼬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토요일. 일주일 만에 마주한 김도훈은 그런 신정환의 괴로움을 전혀 모른다는 듯 소리 내서 웃었다. 형 얼굴이 왜 그래? 존나 만두 같아.

아무런 답을 내지 못했음에도 달라진 건 없었다. 예고 없이 집으로 들이닥친 도훈과 게임을 하고, 같이 등교하고, 토요일에는 영화를 봤다. 사형 선고를 기다리듯 도훈의 눈치를 살피던 정환은 다시 일주일이 지났을 즘에야 가슴을 쓸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지금까지와 같은 일상이 계속될 거였다. 다행이었다. 답을 내지 않는 게 답이어서. 분명 그랬었다.

 

민찬아.

왜.

누가 너한테 고백했는데. 근데 걔가 갑자기 다른 사람이랑 사귀면. 그건 무슨 뜻일까.

 

에어컨은 고사하고 선풍기마저 고장 난 교실은 멀쩡한 고3도 반쯤 정신 나가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애초에 멀쩡한 고3이라는 문장 자체가 말이 안 되긴 하지만. 자습이 끝나자마자 탈출하듯 문을 박차고 나가던 민찬이 정환의 질문에 인상을 찌푸렸다. 가만히 있어도 열기가 차오르는 목뒤를 짜증스레 쓸어 내다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다.

 

뭐 여러 가지 상황이 있겠지.

하나만 말해 봐.

왕게임?

 

왕게임. 서민찬의 생각 없는 한마디에 김도훈의 패기 있던 고백은 곧장 벌칙으로 변질됐다. 계단을 내려가던 정환의 발이 우뚝 멈췄다. 형 좋아해. 그 말을 할 때 김도훈의 진지하던 얼굴을 다시 떠올려 본다.

 

…그거 말고 하나 더 얘기해 봐.

뭐 고백을 언제 했는데.

어… 6개월 전?

아 장난하나. 그럼 그냥 마음이 변한 거지.

 

수박주스 마실래? 니가 살게. 멀어지는 민찬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정환은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변했다고? 왜? 변한 거 없는데? 바뀐 거 하나 없이 다 그대론데? 왜 갑자기 변해? 굳은 듯 서 있는 정환을 향해 민찬의 목소리가 다시 날아들었다. 아님 6개월 내내 쫓아다니면서 고백 공격 했대?

정환의 입술이 달싹거리다 다물렸다. 뭐라고 반박하고 싶은데 할 수가 없었다. 도훈은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그 비슷한 말조차 꺼내지 않아서. 문득 주머니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나 오늘 형 집 못 감. 패드 내일 줄게. 정환은 도훈에게서 온 메시지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고 생각했던 몇 개월이, 사실 누군가에겐 호감을 가졌다 끝내고 또다시 시작할 수 있는 시간이었나 보다. 그렇구나. 그냥 김도훈이 더 이상 신정환을 좋아하지 않는 것뿐이네.

예고 없이 들이닥친 태풍에 휘말려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밀려 내려가다 겨우 뭍에 닿았다. 이제 한숨 돌리고 배에서 내리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정환은 망설이고 있었다. 자꾸만 바다를 뒤돌아봤다. 김도훈이 신정환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극히 당연한 문장이 소름 돋도록 낯설게 느껴졌다.

 

 

서민찬 너 원래 수박주스 같은 거 안 마시잖아. 뜬금없이 왜 먹자고 했어.

몰라. 갑자기 땡기던데.

 

근데 우리 왜 숨어 있는 거냐? 정환은 대꾸하지 않은 채 몸을 입간판 안으로 더 말아 넣었다. 정환의 등 뒤에 서서 수박주스를 빨아 마시던 민찬이 문득 흥미로운 눈을 했다. 어. 저거 니 동생 맞지. 1학년. 정환이 입술을 꾹 맞붙였다. 비니를 쓰고 바지 주머니에 한쪽 손을 꽂아 넣은 모습이 언제나의 김도훈이었다. 그 앞에 마주 서 있는 사람이 정환은 전혀 모르는 여자애라는 게 평소와 다른 점이었고. 인생네컷 앞에 서서 대화를 주고받던 두 사람은 곧 맞은편 카페로 들어갔다. 정환의 시선은 내내 도훈의 왼손에 들린 패드에 꽂혀 있었다. 김도훈이 여친과 사진 찍고 카페에서 케이크 먹느라 주인에게 돌아오지 못한 그 패드에.

우리도 따라 들어갈까? 어딘가 기대감이 서려 있는 목소리에 정환은 입도 대지 않은 수박주스를 민찬에게 떠넘겼다. 이거나 마셔. 그리고 카페를 등지고 돌아섰다. 양손에 수박주스를 들고 정환의 뒤를 졸졸 따르던 민찬이 중얼거렸다.

 

정환쿤. 믿기 힘들겠지만 세상엔 그냥 눈만 마주쳐도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오늘 차이면 5분 울다가 내일 다른 사람한테 고백하는 거야.

 

오늘 3학년 선배한테 고백했다가 내일 바로 같은 반 여자애랑 사귄다는 거지. 그 말에 정환은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심각한 얼굴로 뒤돌아봤다. 어떻게 알았어? 숨어서 훔쳐봐 놓고 뭘. 아니 고백한 쪽이 도훈인 걸 어떻게 알았냐고. 내가 편견 없는 대한민국 국민이니까? 민찬은 별거냐는 듯 대꾸했다.

 

어쨌든 고백했을 때 안 받아 준 거 아냐? 받아 주지도 않았으면서 왜 질투해? 그거 존나 쓰레긴데.

질투가 아니고….

 

정환의 답은 거기서 끊겼다. 서민찬은 상황을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계속 정곡을 찔렀다. 받아 주지도 않았으면서. 맞는 말이었다. 받아 주지도 않았는데 김도훈 마음의 행방이 어디로 향하든 따질 권리는 없었다. 그래도 신정환은 조금 억울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안 받아 준 게 아니었다. 어쨌든 김도훈의 고백은 신정환 안에서 현재까지 ‘유보’ 상태였기에. 너무 멀리 밀어 놓은 탓에 답을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을 뿐.

왜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무도 허락한 적 없는 유예 기간을 혼자 늘리며 안도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냥, 지금이 너무 좋으니까. 약속하지 않았어도 늘 함께하는 토요일 저녁처럼. 이 관계가 너무 안온해서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영원히 이어졌으면 했다.

 

 

 

개귀엽지.

 

정환은 눈앞에서 흔들리는 키링을 손에 담았다. 너구린가. 라쿤? 온통 하얀색이라 무슨 동물인지 헷갈렸다. 도훈이 제 가방에 매달려 있는 키링을 흔들었다. 내 건 파란색. 그제야 정환은 이게 특정 동물이 아닌 캐릭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도훈과 세트라는 것도.

이건 어때? 형 검은색 해. 난 아무 색이나 상관없어. 똑같은 디자인의 휴대폰 케이스를 내려다보던 정환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책상 한편에 놓인 향수는 언젠가 도훈에게 선물 받은 거였다. 도훈이 쓰는 것과 같은 라인인데 향의 무게감만 살짝 다른. 옆에 자리한 무드 등은 도훈의 방 침대맡에 같은 디자인으로 놓여 있고. 그 옆의 텀블러도. 핸드크림도. 심지어 소설책까지. 비스듬히 꽂힌 책의 하편은 도훈의 책상에서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휴대폰 케이스의 포장을 뜯지 않은 채 만지작거리기만 하자 신나게 떠들던 도훈의 입이 멈췄다.

 

왜? 별로야?

아니 그게 아니라.

 

정환은 저번 주말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결국 정환이 말했던 영화를 봤다. 도훈이 두 번 볼 만하다고 우긴 결과였다. 하지만 말과 달리 영화는 재미없었다. 그냥 다른 거 볼걸. 도훈이 놀리듯 웃었다. 나만 보기 억울해서. 공원을 걷는 걸음이 유달리 느렸다. 다음 주에 개봉하는 거 예고편 봤어? 그건 재밌겠더라. 도훈의 말을 들은 정환이 머뭇거리다 물었다. 너 그건 여친이랑 봐야 되는 거 아냐? 정환을 쳐다보는 시선에 황당함이 담겼다. 갑자기 걔 얘기가 왜 나와? 아니, 나랑 신작 다 보면 여친이랑 뭐 봐. 뭘 보긴 뭘 봐. 안 보는 거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머리끝을 찌르르 울린다.

 

있잖아. 도훈아.

 

정리되지 않은 생각 속에 겨우 입을 뗐을 때, 타이밍 좋게 도훈의 휴대폰이 울렸다. 보려 하지 않아도 액정에 크게 떠오른 이름이 눈에 박혔다. 도훈은 힐끔 시선만 주고는 곧장 무음으로 돌렸다.

 

안 받아?

형 얘기하려고 했잖아.

괜찮으니까 전화부터 받아.

싫은데.

 

그사이 전화는 부재중이란 글자를 남기고 물러났다. 형이랑 있을 때 받기 싫어. 그 말에 정환은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김도훈은 더 이상 신정환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 그 문장이 그토록 낯설었는지 이제 안다. 똑같은 케이스. 똑같은 키링. 주변에 널브러진 김도훈과 연관된 모든 물건들. 눈이 마주치면 형, 하고 웃어 주고, 매일 잠들기 전에 전화를 한다. 도훈아. 넌 나 안 좋아하잖아. 안 좋아하는데, 이거 좀 이상하지 않아? 그리고 그렇게 묻기 전에 문득 한 가지를 더 깨닫는다. 신정환이 지키고 싶었던 그 평온하고 안온한 일상. 영원히 이어졌으면 하던 매일. 그건 사실 그다지 평범한 날이 아니었다고. 사실은 아주 특별해서 부수고 싶지 않았던 거다.

 

 

 

쓸모없다고 비웃었던 여름방학은 그를 증명하듯 어느덧 끝을 보였다. 책상에 엎드린 정환은 캘린더를 손가락 끝으로 더듬었다. 수험생의 여름방학. 김빠진 콜라. 잘못 배달된 음식. 그리고. 시선을 돌려 책상 한편에서 진동하고 있는 휴대폰을 내려다본다.

 

더 이상 신정환을 좋아하지 않는 김도훈의 관심.

 

전화 좀. 침대에 기대앉아 있던 민찬이 거슬린다는 듯 인상을 썼다. 정환은 그래도 휴대폰을 향해 손을 뻗지 않았다. 방치한 채 화내는 걸 지켜만 본다. 도훈의 연락을 피한 게 며칠째인지 세어 보다 그만뒀다. 깨닫기도 전에 눈덩이는 어느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 있었다. 한두 번 울리고 말던 전화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만 봐도 김도훈이 얼마나 빡쳤을지 짐작됐다. 이래도 안 받아? 도훈의 표정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아직도 쓰레기 짓 하는 중?

 

그 물음에 정환의 미간이 좁아졌다. 내가 쓰레기야? 정확히 말하면, 여친 있으면서 나한테 이렇게 매일 전화해 대는 김도훈이 쓰레기 아닌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한테 커플 케이스 선물하는 게 쓰레기 아니냐고. 정환은 그 말들을 죄다 삼키고 얼굴을 책상에 처박았다. 아니. 하루에도 몇 번씩 울리는 휴대폰은 이제는 그냥 옆집 형이 되어 버린 신정환에게 베푸는 습관 같은 거다. 여자 친구 생겼다고 매일 붙어 다니던 형을 갑자기 모르는 척하는 게 더 이상했다. 신정환 혼자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뿐. 정환이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음에도 민찬의 분석은 이어졌다. 그거네, 그거.

 

니가 걜 좋아하는 거네.

…….

좋아하니까 걔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 부여하는 거잖아. 왜 전화하지? 아직 나 좋아하나? 왜 웃어 주지? 키스하자는 건가? 정환쿤. 다정하게 대해 주면 망상하는 타입?

 

정환의 고개가 들렸다. 원래도 느린 머릿속이 아주 천천히 굴러가기 시작한다. 6개월 동안 멈춰 있던 시계가 이제야 초침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김도훈이 신정환을 좋아하지 않는다. 몇 번이나 곱씹었던 문장은 이제 궤를 조금 달리했다. 신정환이 김도훈을 좋아한다. 주머니에선 여전히 휴대폰이 항의하듯 몸을 떨어 댔다. 집으로 가는 길을 빙빙 돌았다. 그래도 결국 발은 도착해야 할 곳에 다다랐다. 집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인영에 정환은 자리에 멈춰 섰다. 도훈이 망설임도 없이 정환의 앞으로 다가온다.

 

형. 내가 뭐 잘못했어?

 

당장 화부터 낼 줄 알았던 도훈은 의외로 태연했다. 아니 태연하다기보다는 답답함을 눌러 삼킨 얼굴이었다.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 채 바닥 어딘가를 응시하는 정환의 모습에 도훈이 덧붙였다. 뭔데. 말을 해. 그래야 사과를 하든 변명을 하든 할 거 아냐. 한 걸음 더 다가오는 움직임에 맞춰 도훈의 가방에서 키링이 달랑거렸다. 지금 신정환의 가방에 매달려 있는 것과 같은 키링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방향을 잡지 못하고 어지럽게 흔들려 대던 마음이 순간 딱 멈췄다. 원래 그 자리가 제 자리였다는 듯. 도훈아. 내가 너 좋아하나 봐. 그리고 정환은 또 한 번 절망했다. 미루어 두었던 문제에 대한 답을 냈는데 하나도 홀가분하지 않다.

 

형.

 

왜 지금일까. 어차피 늦은 거 그냥 10년 뒤에나 알아채지. 그럼 그때 나 도훈이 좋아했었나 봐, 그런 추억으로 떠올릴 수 있었을 텐데. 왜 하필 지금이야. 나 너 좋아해. 그 고백이 김도훈에게 어떻게 들릴지 생각해 본다. 너한테 여친 생겼다니까 갑자기 서운하더라. 나 갖긴 싫었는데 남 주려니 아까워. 이제 내가 너 좋아하니까 헤어질 거지? 난 널 받아 주지 않았지만 넌 내 옆에 있어야 돼.

김도훈에게 그나마 남아 있을, 형으로서의 마지막 존엄성까지 전부 몰살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서민찬이 정확했다. 신정환은 쓰레기가 맞았다. 그리고 신정환은 본인이 쓰레기인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도훈에게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그런 거 없어.

 

쓸모없는 것에 하나 더 추가.

타이밍을 못 맞추는 신정환의 진심.

 

 

정환은 더 이상 토요일에 도훈과 영화를 보지 않았다. 공원을 걷지도 않았다. 도훈에게 꺼내 든 핑계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매우 적절했다. 나 고3이야. 정환은 그렇게 처음으로 고3 사용법을 알아냈다. 물론 도훈도 그냥 넘어가진 않았다. 한 달 전에도 형은 수험생이었는데. 나랑 하루 종일 놀던 그때. 정환은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도훈아. 넌 말이 너무 많아. 정환의 머릿속에 뭔가 다른 게 들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정환을 의심스럽게 노려보면서도 도훈은 일단 물러섰다.

시간이 지나면 이 격랑도 잠잠해질 거다. 이제는 태풍을 만나서가 아니라, 스스로 노를 저어 나가면서 정환은 빨리 어딘가의 섬에 닿길 기도했다.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진다. 김도훈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이 마음을 정리하고 다른 시작을 맞이하고 싶었다.

그게 김도훈과 신정환 영화의 엔딩이었다. 정환은 자신이 맡은 역할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려 했다. 뒤늦게 깨달은 걸 후회하면서, 가끔 그 마음을 꺼내 보기. 그런 건 원래 신정환이 잘하는 거였다. 아쉬워하는 거. 그리고 그걸 티 내지 않는 거.

 

 

 

하지만 자고로 영화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에 반전 하나쯤 들어가 있기 마련이다. 주인공을 구원하든, 구렁텅이로 처박든.

 

 

 

도훈은 늘 아무렇지도 않게 정환의 집에 찾아온다. 정환이 없을 때도 수시로 들러서 과일을 받아 가거나 전해 주거나 했다. 정환의 방 문을 노크 없이 여는 일도 흔했다. 자고 있는 정환을 깨우는 건 하나의 루틴이라. 잠귀가 어두운 탓에 정환은 도훈이 몇 번을 부르고 흔들어도 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은 거실에서 엄마와 대화를 나누는 도훈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반쯤 깬 의식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진다. 문을 열고 들어온 도훈이 가까이 다가서는 것까지. 수험생이라 바쁘다니까 여긴 왜 들어와. 정환은 그 생각을 떠올리다 곧 지웠다. 책상에 문제집 하나 올려놓지 않은 채 낮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김도훈이 무슨 생각을 할지 상상이 갔다. 얼굴로 열이 오르는 것 같다. 책이라도 하나 머리맡에 놔둘걸.

형 자? 목소리가 너무 낮아서 끝이 갈라졌다. 원래 알던 것과 달라서 정환은 순간 진짜 김도훈인가 싶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타이밍을 놓쳤다는 걸 깨닫는다. 도훈이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눈을 떴어야 하는데. 신정환은 그렇게 곰 앞에서 죽은 척하는 사람이 됐다.

금방이라도 몸을 흔들며 깨울 줄 알았던 도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정적에 숨 쉬는 것조차 부자연스러워진다. 그러다 문득, 도훈의 손가락 끝이 정환의 손목뼈에 닿았다. 간지러울 정도로 미약하게. 뼈를 조심스럽게 둥글리다 곧장 떨어진다. 지금이라도 일어날까. 그 생각을 한 순간. 눈 뜨지 마. 속삭이듯이 울린 목소리에 발끝으로 소름이 돋았다. 눈치챘나. 동시에 입술 바로 밑, 턱 언저리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게 닿았다 떨어졌다. 그게 뭔지 정환은 깨닫지도 못했다. 도훈이 정환을 흔들었다. 형. 일어나. 조금 전 낮게 갈라지던 속삭임과 전혀 다른, 아주 또렷한 목소리. 늘 정환이 잠에서 깨기 전 들었던 그 옆집 동생의 목소리였다.

 

 

정환은 칫솔을 든 채 세면대 앞에 멍하니 섰다. 치약을 얹은 칫솔은 정환의 입에 들어가지 못한 채 허공에 떠올라 있기만 했다. 정환은 거울 속 제 입술을 빤히 쳐다봤다. 정확히는 턱을. 더 정확히는 김도훈의 입술이 닿았던 점을.

도훈이 자신을 깨웠던 무수히 많은 날들을 떠올려 본다. 그때마다 매번 이 점에 입술이 닿았을까. 정환은 이제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은 엔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데. 이제 그냥 마무리만 지으면 되는데.

정환을 깨운 도훈은 언제나처럼 말을 마구 쏟아 냈다. 형. 이번 크리스마스 때 여행 가자. 내가 좀 찾아보니까 형 수험생이라 혜택 개많아. 일본 어때. 조금 전 겪었던 일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 가지 않은 몽롱한 상태로 정환은 대꾸했다. 너 여자 친구는? 그때도 김도훈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했다. 형은 맨날 뜬금없이 걔 얘길 하더라.

칫솔을 입안에 넣었다. 엉성한 칫솔질과 달리 정환은 살면서 처음, 조급증을 느끼고 있었다. 답을 알고 싶다. 김도훈에게 당장이라도 묻고 싶다. 도훈아. 너 나 좋아해?

 

 

 

일부러 자는 척 기다린 건 아니었다. 김도훈이 신정환을 깨우러 오는 건 그냥 일상이었다. 다만 그날 이후 잠에 깊이 들지 못한 건 신정환의 의식이 반영된 결과긴 했다.

방으로 들어서는 도훈의 인기척에, 정환은 심장이 두근거려서 저도 모르게 손을 움찔거렸다. 곰 앞에서 죽은 척했던 신정환은 갑자기 잠자는 숲속의 뭔가가 되어 있었다. 이게 맞아? 그러나 도훈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생각은 그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형. 눈 뜨지 마. 또다시 낯선 목소리가 주문을 외우듯 그렇게 속살거린다. 그리고 따끈한 감각이 턱에 닿았다. 정환은 반짝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김도훈의 말간 눈동자가 바로 눈앞에 있다. 그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본 순간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너. 너 지금. 나한테. 너 왜.

 

생각해 둔 말들은 도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전부 휘발되어 사라졌다. 단어들이 순서 없이 튀어나왔다. 흔들리던 도훈의 눈동자가 다시 원래대로 침잠해 갔다. 정환은 결국 머릿속에 남아 있는 단 하나의 문장만 겨우 완성시켰다.

 

너 나 좋아해?

어.

 

대답은 너무 쉽게 나왔다. 맥이 풀릴 만큼. 실제로 기운이 빠진 정환이 축 늘어졌다. 도훈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좋아하는데 왜. 무슨 문제 있어? 그렇게 묻는 것 같은 얼굴을 마주하자 정환은 다시 말문이 막혔다.

 

…너 여자 친구 있잖아.

걘 내가 형 좋아하는 거 알아.

 

걔도 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어. 정환은 멍청하게 눈만 깜빡였다. 그게 뭐지? 요즘 트랜드인가? 유행이라면 일단 다 하고 보는 엠지킹이 그쪽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중인가? 당장이라도 김도훈이 ‘요새 누가 촌스럽게 좋아하는 사람이랑 사귀어?’ 비웃을 것만 같았다. 정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도훈이 옆으로 고갤 돌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형 표정이 너무 웃겨서.

…….

요새 애들은 그러고 노나. 그 생각했지.

…….

그게 아니라 그냥 나 혼자 발악하는 거야.

 

정리해야 되니까. 웃음이 담겨 있음에도 목소리는 그다지 밝지 못했다. 형이 없던 일로 하고 싶어 했잖아.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린 도훈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정환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도훈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내 마음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거니까 신경 안 써도 돼.

…….

어차피 형은 이제 졸업하고. 대학 가고. 나는 뭐. 뒤에 남을 거고.

…….

형은 느리면서 빠르니까.

 

도훈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뭔가 마음에 안 들 때 하는 버릇. 게임에서 질 것 같을 때 나오는 특유의 표정. 그걸 본 정환은 알 수 있었다. 김도훈은 상처받았다. 신정환이 멋대로 유예 기간을 늘리고 있는 그 시간 내내.

 

도훈아.

 

정환이 급히 이름을 불렀다. 많은 말을 토해 내기 전 입술이 머뭇거린다. 도훈아. 나도 너 좋아해. 원래 좋아했어. 너만큼 좋아했어. 돌아보니까 내 주변엔 전부 너랑 관련된 것밖에 없었고. 그걸 너무 늦게 알아챈 게 바보 같고. 근데. 그래도 좋아해. 그 말들을 다 한꺼번에 꺼내려다 보니 목이 꽉 틀어막혔다. 그래서 정환은 입만 벙긋거렸다. 도훈은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다 다시 무릎을 굽히곤 눈을 맞춰 온다.

 

느려 터졌으면서 나보다 2년이나 빠른 신정환.

…….

내가 더 빨리 클 테니까. 속도 좀 늦춰 봐.

 

정환은 겨우 한마디를 했다.

 

…너 지금도 너무 빨라.

 

순간 도훈이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웃음을 눈가에 달았다.

 

 

수험생의 여름방학. 비슷한 표현이 뭐가 있지. 김도훈의 고백. 신정환의 망설임. 다음 주 보러 갈 영화 얘기를 하다 턱에 닿아 오는 입술. 살아가는 동안 인생에서 꼭 필요한, 대충 그런 시간이란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