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의 사색 上
사빈
흉물이 따로 없다.
도훈은 속으로 투덜대며 비탈길을 올랐다. 언덕 위로 우뚝 솟은 로라 맨션이 드디어 시야에 걸리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스신하다. 사람 죽은 모텔을 대충 개조해서 만든 원룸 건물이라던가. 누구 말처럼 우리 동네의 둘도 없는 흉물이었다. 저 미친 놈의 건물은 꽤나 높은 지대에 세워졌음에도 볕이 잘 들지 않는다. 저주 받은 탓이라며 어른들이 툭하면 수군대는 얘기를 들었는데 양기인지 음기인지 암튼 뭔가가 덕지덕지 붙어 그렇다고 했다.
진짜로 사람도 죽었어요? 그럼! 당연하지. 죽은 사람이 한 둘도 아니었다는데. 아 진짜요. 그렇다니까, 거기가 원래 종놈들 묫자리여서 터가 좀. 아아 그렇구나. 시체나 묻던 자리에 사람 사는 건물을 지었으니 그게 되겠어? 완전 귀신 놀이터나 마찬가진데. 네네 그렇죵.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도훈은 건성으로 긍정했다. 여러 소문 중 딱 절반만 믿는다. 귀신 나온다는 소리는 좀 그렇고 뭐가 달라도 다르긴 한 그 집은 터가 좋지 못한 것이 확실하다. 오늘처럼 땡볕이 쨍쨍한 날에도 어김없이 우중충. 날씨와 관계 없이 음산하고 축축했다. 가끔씩 입주민들끼리 칼부림도 나는 걸 보면 사람 여럿 죽어나갔단 말도 거짓은 아닐 거다. 이런 곳에 살면 없던 우울증도 생길 테니까.
그나저나 이제 겨우 여름의 초입인데. 밤이고 낮이고 평균 기온은 삼십 도를 웃돌았다. 더위 타고 땀 많은 도훈에겐 거의 사십 도에 가까운 체감이었다. 일기예보에서 그러더라. 열대야가 어쩌고 저쩌고. 곧 장마와 함께 폭염이 시작될 거라며.
허억…. 씨…. 헉….
욕 대신 뱉어진 숨소리가 제법 거칠다. 손 부채질 좆 까는 날씨에 도훈은 배신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등굣길 쌀쌀하다고 뭐라도 껴입었으면 이 좆 같은 언덕 반도 못 오르고 죽었을지 모르겠다. 짜증섞인 손짓으로 목 끝까지 꽉꽉 졸라맨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하아아. 늘어지는 숨과 함께 걸음을 멈춘다. 갑자기 속에서 울컥. 감정들이 급발진했다. 아니 생각할수록 좆 같잖아 신정환 그 새끼가 뭐라고 내가. 어? 내가 왜 이 고생이지 씨발 진짜 이해할 수가 없네. 육성으로 욕이 튀었다. 씨발, 하고. 그러나 도훈의 두 발은 착실하게 로라 맨션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나참 김도훈 진짜 지조도 없어요. 뭣도 없는 자학을 곁들이면서.
그랬다. 지가 생각해도 지금 상황은 좀 어이가 없다. 심지어 도훈은 로라 맨션 앞에 붙은 편의점 문을 밀고 들어선 후 신정환 먹일 미역국이며 삼분 카레 즉석밥 생수 따위를 고른다. 도훈은 속으로 또 욕을 퍼부었다. 내가 미쳤지. 아주 쳐 돌았지. 신정환이 뭐 이쁘다고 이 짓까지 하냐. 하…. 내 인생 존나 레전드.
입으로는 싫다 해도 몸은 솔직하군.
순간 어떤 대사가 떠올랐다. 신정환이 즐겨 보는 저질 만화에 종종 등장하던 말이었다. 그 형은 왜 맨날 그딴 거나 보는 걸까. 어쨌든 그 질 나쁜 대사와 지금 상황이 별다르지 않아서 좀 수치스럽다. 주둥이로는 신정환이 싫다 싫다 하면서도 일주일에 서너 번쯤. 착실하게 그를 찾아가는 제 자신이 싫다. 그럼에도 도훈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는 인간은 신정환이 좋다, 라는 걸. 분명 밉고 싫은데도 그랬다. 안 보면 보고 싶고 눈 앞에 있으면 걔랑 떨어지기 싫고. 같이 있으면 좋고. 이런 게 사랑인가? 그거까진 잘 모르겠지만.
봉투 하나 주세요.
불룩해진 봉다리를 챙겨 유리문을 민다. 바로 옆 로라 맨션 계단을 밟는다. 뚜벅뚜벅 내려가선 신정환 집 앞에 섰다. 신정환 인생처럼 지하 깊숙이 처박힌 B01호. 그 앞에서 한숨 한번 푹 쉰다. 어느덧 축축해진 손바닥을 교복 바지에 여러번 문질렀다. 도훈은 한숨을 또 쉬었다. 도어락을 향한 손가락이 허공에 붕 뜬 채로 오래 머물렀다. 그냥 갈까. 잠깐이지만 고민했다.
키패드를 건드린다. 반응이 없다. 분명 띵동 소리가 나야하는데. 이렇게 손가락으로 툭 치면 소리도 나고 키패드에 불도 들어와야 하는데. 몇 번을 건드려도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다. 당황스러웠으나 크게 놀라지는 않는다.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었으므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도훈은 현관문 손잡이를 힘주어 잡았다. 그대로 아래를 향해 밀어내린다. 저항 없이 열리는 문에 숨이 턱 막혔다. 또 그대로 멈춰선다. 저 문 뒤편의 꼴이 어떨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한참 뒤에야 안쪽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시선은 부러 내려 깔았다. 속으로 열까지 숫자를 센다. 그러는 동안 인기척 없이 고요했다. 아무도 없던지. 아니면 신정환 혼자 있던지. 경우의 수는 크게 두가지 뿐이었으므로 안심하고 문부터 살폈다. 덮개 열린 도어락엔 건전지가 모조리 빠져 있었다. 누구 짓일까. 잠시 생각하다 그만 두었다. 스쳐 가는 얼굴이 한둘이 아니라서.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신정환은 하루종일 무얼 했을까. 떠올리기 싫은 장면들이 머릿속을 범람한다. 덤덤했던 도훈의 얼굴이 있는 조금 구겨졌다. 야 신정환. 거칠게 부르면서 발을 들였다. 닳아빠진 운동화를 벗지도 않은 채.
퀴퀴한 냄새. 침대 위로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신정환. 맨몸이었다. 방바닥엔 담배꽁초와 온갖 술병이 굴러다녔다. 미친 새끼. 그래도 도훈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상한 반응이지만 정말로 그랬다. 두려운 장면 같은 거…. 없었으니까 정말 다행이라고. 적어도 타인의 벌거벗은 몸뚱이는 보이지 않았으니 그것만으로도 도훈은 내심 기뻤다.
고개를 돌리자 앉은뱅이 상 위에 놓인 병이 눈에 걸렸다. 고작 삼천원 짜리 진로 포도주였다. 신정환은 꼴에 와인이 먹고 싶었나 보다. 빡이 치는 와중에도 대책 없는 신정환의 허세가 귀여워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어이가 없어 한번을 더 웃었다. 저딴 븅신 짓이 귀여울 수가 있나. 나 저 새끼 진짜 좋아하는구나.
도훈이 신정환을 흔들어 깨운다. 일어나기 싫어 낑낑대는 소리조차 없는 신정환에 호선을 그린 도훈의 입매가 굳어버린 건 순간이었다. 동요하기 싫었는데 도훈은 어느덧 이마를 쓸어 올리고 있다. 죽었나. 나쁜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다행히 도훈은 상황 파악이 빠른 편이었다. 얼른 신정환 팔을 잡아 끌었다. 그리고는 손 끝에서 느껴지는 온도에 집중한다. 물렁한 살결 미지근한 체온. 적어도 뒤지지는 않았단 뜻이겠지. 도훈은 움켜쥔 팔을 있는 힘껏 내던졌다. 잠에서 깰 만도 한데 신정환은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나쁜 새끼. 툭하면 사람 걱정하게 만들고.
마음 같아서는 뺨이라도 후려치고 싶다. 실제로 손바닥이 자꾸만 움찔거려서 도훈은 동그랗게 말아 쥔 주먹에 힘을 꽈악 쥐었다. 인내심 하나는 끝내주는 제 성격이 이럴 땐 좀 자랑스럽다.
줘패는 대신 신정환의 눈깔을 열고 관찰했다. 꼭 까만색 바둑알을 박아둔 것 같은 눈. 총기 잃어 텅 빈 동공은 기이하고 징그러웠다. 술 쳐마신다고 사람 눈이 이렇게까지 될 수는 없다. 신정환이 시체처럼 숨만 겨우 붙어 있는 이유. 보나마나 무슨무슨 안정제랑 수면제, 타이레놀을 술과 함께 섞어 마셨겠지. 간과 뇌를 동시에 조지는 짓이었다. 빨리 죽고 싶으면 그래도 된다. 효과 좋고 가성비도 대박이라서. 정상인들은 절대 하지 않겠지만 신정환은…. 노멀에서 벗어난지 오래다. 빨리 죽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버린 사람. 그래서 도훈은 신정환이 싫다. 진짜 싫다. 너무 밉다.
형은 대체 왜 이러고 살아요.
침대맡에 무릎 꿇고 앉아 혼잣말을 중얼댄다. 도훈은 신정환의 갈색 머리카락을 덤덤하게 쓰다듬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죽어버리던가. 반쯤 진심인 속내를 털어놓다 끝내는 조금 울었다.
악몽 꿨으면 좋겠어요. 나 슬프게 만들었으니까 형은 꿈에서라도 괴로워해요. 꿈을 꾸고 있긴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근데요. 역시 나는 형이 죽는 건 싫어요. 이렇게 자다가 죽어버리면 어떡하나, 무섭지도 않아요? 나는 좀 무서워요. 그러니까 빨리 눈 떠줬으면 좋겠어.
도훈은 신정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그리고는 작은 숨을 불어넣었다. 형. 형은 지금이 싫겠죠. 그치만 싫어도 참아요. 인공호흡…. 대충 그런 셈으로 생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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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물이 찬 욕조 안으로 발가벗긴 신정환을 밀어 넣었다. 신정환 추울까 봐 적당히 따뜻한 온수를 미약하게 틀어두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 호구 병신 새끼 김도훈아. 제발 적당히 좀 해라. 속으로 제 욕을 하면서도 손 바삐 움직이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쩌다 시선이 닿은 곳은 세면대에 올려진 칫솔통. 누구 것인지 모를 칫솔이 질서 없이 가득 차 있었다. 순간 욕이 목 끝까지 차오른다. 하. 덤처럼 한숨이 딸려 나왔다. 이걸 보고도 욕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나. 진짜 다들 너무하는 거 아닌가. 그중에서도 신정환 니가 제일 너무한 거 알지. 씨발. 마음이 더 끓기 전에 여기서 나가야겠다.
"씻고 나와요."
욕실에서 빠져나온 도훈은 등을 돌려 앉았다. 모텔 방을 고쳐 만든 신정환네 욕실은 본래의 쓰임보다 욕구 충족에 맞추어졌다. 안쪽 벽을 제외한 모든 벽면이 투명한 통유리로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도훈은 노력 없이도 신정환의 벗은 몸을 감상할 수 있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그건 정말이지 굳이, 굳이…였다. 신정환을 좋아하지만 같은 거 달린 남자 몸을 구경하고 싶지 않았고, 자신은 게이가 아니었으며, 그러니까 신정환 앞에서 발기하지 않을 거라 굳게 믿었다. 즉, 성애는 아니라는 거다. 타인의 것으로 가득 찬 칫솔통을 보고서 개발작을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도훈은 조용히 청소를 시작했다. 그러다 종종 고개를 쳐들고서 신정환 하는 짓을 살폈다. 물이 가득 찬 욕조에 신정환이 대가리를 쳐박고 죽어버리면 곤란하니까. 바로 지금처럼. 신정환의 대가리가 반쯤 물에 잠긴다. 저 미친놈 봐라 저거.
"형. 죽지 마."
죽지 말라고. 말하면서 도훈이 유리벽을 쾅쾅 두드렸다. 야 신정환! 신정환이 푸스스 고개를 쳐들 때까지 멈추지도 못 했다.
신정환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바닥을 쓸었다. 개털 같은 노란색 머리카락이 쌓인다. 이건…. 신정환의 것이 아니다. 계속되는 빗질에 점점 더 많은 머리카락이 쌓였다. 그중에는 빨간색도 갈색도 섞여 있었다. 당연히 흑발도 존재했다. 알록달록하다. 아주 빨주노초파남보를 다 모으지 그러니 미친놈아. 너 같은 놈한테 꼭 필요한 게 뭔줄 알아 신정환? 바로 중성화 수술이야.
청소가 끝날 무렵 도훈은 신정환이 피우다 버려둔 장초를 집어 들었다. 불도 붙지 않은 걸 두어 번 빨아본다. 감상은 짤막했다. 이런 걸 대체 왜 피우는 거야. 도훈은 흡연이란 행위가 꼭 자해 같다고 생각했다. 기분 나빠지는 맛. 목구멍은 메케하고 머릿속은 금방 어지러워졌다. 신정환이 좋아하는 걸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싶었으나 쉽지 않은 일이다. 술이며 담배며. 도훈은 이딴 것들을 여전히 잘 모르겠다.
욕실 쪽을 힐끔거렸다. 하얗게 김 서린 유리통 속에서 신정환이 희미하게 보였다. 신정환은 무릎을 끌어 앉은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하여튼 지지리 궁상. 구질구질. XX. 신정환은 질 낮은 단어들과 잘 어울린다. 신정환이 더는 질 나쁜 짓을 하지 못하게 도훈은 도어락에 새 건전지를 채워 넣었다. 비밀 번호도 새로 바꾸었다. 공일공으로 시작하는 열한 개의 숫자 조합. 자신의 휴대폰 번호였다. 아마 신정환은 죽을 때까지도 이 번호를 외우지 못하겠지.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래서 더 괜찮았다. 외울 수 없는 번호라면 남에게 떠벌리는 일도 없을 테니까. 어차피 신정환은 밖에 나가지도 않으니까 외울 필요도 없을 거였다.
아니. 웃긴다. 이딴 소용 없는 짓. 건전지만 빼면 끝나는 건데. 쓸데없는 짓을 너무 열정적으로 했다. 쪽팔리고 짜증이 난다.
"그만 나와요."
도훈은 커다란 바스 타올 두 개를 꺼내 하나는 신정환에게, 나머지는 침대 시트 위에 깔아두었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와 함께 뒹굴었을 침대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거기에 제 살이 닿는 건 정말이지 죽고 싶을 만큼 싫을 것 같아서 대충이나마 해둔 응급처치였다.
"앉아요."
신정환을 끌고 나온 도훈은 신정환의 머리부터 말린다. 잘 말린 볏짚 같던 색에 물이 빠져 양아치들이나 하는 오렌지 컬러가 난다. 젖은 머리카락은 뻣뻣하기 그지없어 도훈의 애를 쓰게 만들었다. 아 좀 열 받는데. 도훈은 제 노고도 몰라주고 마음 편히 졸고 있는 신정환 대가리에 꿀밤 먹이고 싶은 걸 참았다. 오늘은 하루종일 존나 참기만 하네. 오늘 자 달력 밑에 작은 글씨로 이렇게 써 있을 것만 같다. 세계 인내의 날.
물이 흐르지 않을 정도로만 머리를 말리고 수건으로 신정환의 가슴팍을 문질렀다. 그러다 또. 도훈은 입술을 바짝 깨물었다. 수건 쥔 손이 조금 떨렸다. 다급한 눈으로 신정환의 곳곳을 훑었다. 옷을 벗길 땐 몰랐는데 온몸이 붉은 자국으로 너덜너덜하다. 거기다 크고 작은 멍든 자국들. 이것들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출처는 너무나도 분명했다.
발진에 걸린 사람 같다. 얼마나 물고 빨아야 이 지경이 되는 거야. 도훈은 다시금 생각이 많아지려 했다. 자꾸만 목구멍이 턱 막혔다. 더는 한숨조차 나오지 않아서 입을 다물었다. 속이 상하다 못해 아예 장기까지 뒤틀리는 기분을 형 너는 알까. 모르겠지. 알면 이럴 수 없겠지. 머리통에 열이 오른다. 목을 타고 척추를 통해 흐르는 무언가의 감정은 열받음, 화,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좆같은 기분들. 끝내는 눈두덩이가 뜨끈뜨끈하다. 싸한 분위기가 주위를 덮쳤다. 도훈은 조금 더 빠르게 손을 놀렸다. 지저분한 잔상들이 머리통을 헤집기 전에. 눈가에서 눈물이라는 이름의 물질을 줄줄이 뽑아내기 전에.
거의 다 했으니까 신정환 밥만 먹이고 가야지. 쓰레기 많이 나왔으니까 왔다 갔다 많이 해야겠네. 집 가는 길에 문제집도 좀 사고 그다음엔…. 집에 도착하면 씻고 밥 먹고. 아, 이건 너무 당연한가. 어쨌든 그다음엔 뭘 하지.
그 다음….
이제 나는 뭐를 해야 하는 걸까. 도훈이 입술을 짓씹는다. 머릿속이 새하얗다. 아무것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 그게 잘 안됐다. 특히 신정환 날개뼈 부근에 박힌 이빨 자국. 그걸 봤을 땐 조금 죽고 싶었다. 도훈은 엄지와 검지를 벌려 자국 위로 손가락을 댄다. 이 정도면 큰 건가? 아닌가, 잘 모르겠다. 누굴까. 이 만한 크기의 입을 가진 사람이. 도훈은 하나씩 떠오르는 얼굴들에 괴로워진다. 아아. 생각을 멈추는 버튼이 생겼으면 좋겠다. 아예 머릿속 전원이 나가버렸으면.
"형. 있잖아요."
혓바닥이 멋대로 움직여 문장을 만들었다. 다음으로 어떤 단어가 튀어나올지 스스로도 알지 못해서 도훈은 혀끝만 말 없이 깨물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이거 누구예요?' 분명 그렇게 묻다 신정환을 원망하는 말만 줄줄이 늘어놓을까 봐서.
쿵,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이어 손잡이를 잡아 비트는 소리까지도. 철컥철컥. 쿵쿵쿵. 뭐라 뭐라 웅웅대는 불만이 잔뜩 섞인 목소리.
"야. 신정환."
"정환아."
누군가 신정환을 부른다. 줄곧 뒤진 눈으로 졸기만 하던 신정환이 반응했다. 신정환 얼굴에 얼핏 생기가 도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서야 저런 얼굴. 싫다. 그게 얼마만큼이냐면 또다시 뱃속이 뒤틀릴 정도로 싫었다. 신정환의 비좁은 세계는 매일매일 이렇게 침범당하는 걸까. 도훈은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신정환의 두 귀를 감쌌다.
"듣지 마요."
"듣지 말라구요."
"나만 봐요."
애원과 명령, 어느 사이에 걸친 말들. 혹은 어린 놈의 시샘, 치졸함을 넘어 어쩌면 구걸일지도 모르겠다. 신정환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었다. 모두 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신정환은 그러나 반응이랄 게 없었다. 도훈의 애원 따윈 들리지 않는다는 듯 구는 신정환. 흐리멍텅한 시선이 도훈의 어깨를 지나쳐 먼 곳으로 떨어졌다. 정말이지 질려버릴 정도로 바깥쪽의 목소리를 향해 집중하고 있었다. 형은 나 필요 없어요? 그런 생각이 들자 패배감이 들었다.
"…나는. 형한테 나는 뭔데요. 형한테 나는 몇 번 째인데요. 네?”
대답해봐 제발. 답을 기다렸으나 침묵이 다였다. 질려버릴 정도로 침착한 고요함에 도훈은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기다림 끝에 입술이 열렸다. 도훈아. 형 입에서 오늘 처음으로 이름을 불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눈과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기쁘기보다는 두려웠다. 무엇이? 신정환의 입으로 정해질 나의 순번이. 하나도 둘도 셋도 아닐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들을 것 같아서. 그러면 정말로 나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것 같아서. 혹시라도. 나가고 싶단 말이 나올까 봐. 그러면 영영 날 버리고 나가버릴 것만 같아서.
"됐어요. 그냥 말하지 마요."
"…."
"듣고 싶지 않으니까."
"도훈아."
"여기서 잠깐 기다려요."
귀 막고 있어요. 도훈은 신정환의 양손을 쥐고는 그대로 신정환 귓가에 붙였다. 손 떼지 마요. 신정환이 듣지 못했을까 봐 한쪽 손을 떼어준 후 귓바퀴에 대고 속삭였다. 이 손 떼지 말라고.
덤덤한 척 몇 발자국 걷다 걸음을 꺾는다. 시키는 대로 얌전히 귀를 막고 있는 신정환을 잠시 바라보고 섰다. 도훈이 신정환의 턱 끝을 들어 올렸다. 동그란 눈동자가 천천히 깜빡였다. 왜? 라고. 대답 대신인듯했다. 잘래요? 물었더니 고개를 젓는 신정환.
"그럼 약…. 먹고 더 잘래요?"
"도훈아."
형은 그 말 밖에 못해요? 그렇게 말하려다 혀를 눌러 참았다.도훈아, 도훈아. 안타깝단 목소리로 불러 놓고는. 그러면서 형은 내 뒤만 보잖아.
화가 나는데도 그걸 표출하는 것까지는 못하겠다. 도훈은 신정환의 몸을 밀어 침대 위로 눕혔다. 여기서 뭘 할 생각은 없었다.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바스 타올을 집어 신정환의 몸을 덮었다. 귀 막고 눈 감고 있어요.
도훈은 현관을 향해 성큼성큼 걷는다. 문 두드리는 소리는 지겹도록 여전했다. 신정환을 부르는 목소리마저도. 소리들이 잦아들길 기다렸으나 밖의 누군가는 저만큼 인내심이 대단해서 조금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러면 꼭 내가 지는 것 같잖아. 그럼에도 도훈은 조용히 손잡이를 잡아 내렸다. 심호흡을 크게 한번. 문을 열기 전 신정환을 돌아봤다. 신정환은 착하게도 제 말을 제법 잘 들어주고 있었다.
신정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보여주기 싫었으므로 문은 신발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만 열었다. 틈새로 보인 얼굴은 의외로 순둥해서, 도저히 신정환을 엉망진창으로 물어뜯을 놈으로는 안 보였다. 하지만 모르는 일이다. 세상에는 맑은 눈을 한 광인들이 얼마든지 존재했다.
활짝 웃고 있던 남자는 상대가 도훈인걸 확인하자 마자 급속도로 무너진 표정을 했다. 어떻게든 안을 들여다보려 안간힘 쓰는 남자가 좀 웃겼다. 실망감에 입을 다문 얼굴이 퍽 딱딱해보였다. 순간 통쾌하다고. 도훈은 고약한 생각을 했다. 속으로는 조소했다. 입술 끝이 씰룩거릴 정도로.
"저기…. 정환이는?"
"자요."
"정환이…. 동생이야?"
그렇게 말한 남자가 맹한 말투와는 다르게 제 가슴팍을 빠르게 훑는 것이 느껴졌다. 셔츠에 박힌 이름표를 확인하는 거였다. 남자의 머리통 속에서 물음표가 뜨는 것 같다. 눈동자에 맺힌 의문들. 당연했다. 신정환의 신 씨와 도훈의 김 씨는 같은 핏줄일 수 없었으므로. 이 새끼 누굴까, 생각하는 거겠지.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사람 같았다. 뭐 같아 보여요? 라고 말하자 얼굴 위로 온갖 질문들이 떠다니는 것이 그대로 보였다. 대답을 기다릴 아량 따위 없어서 도훈은 빼꼼히 열어둔 문을 거칠게 닫았다. 저기…. 저기, 있잖아….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남자가 우물쭈물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쉽게 꺼져줄 것 같지 않았다. 실컷 문을 두드렸던 근성을 봐도 그랬다.
도훈이 다시금 문을 열었다. 남자의 얼굴에 대고 가운데 손가락을 날렸다.
"가세요. 눈앞에서 신정환이랑 씹 뜨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흐하하. 남자가 호탕하게 웃었다. 일순 이글대는 눈빛이 좀 싸하게 느껴졌다. 이 친구 재밌네. 말하면서 남자는 도훈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명백한 어린애 취급이었다.
"저기요. 장난 같아요?"
뒤돌아 선 남자 등에 대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남자가 도훈을 돌아봤고, 남자의 입술이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벌어지려는 순간에. 쾅하고 문이 닫혔다.
"…형."
배신감에 쩔어버린 얼굴로 신정환이 도훈을 바라본다. 신정환은 도훈의 코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눈빛 속에서 분노가 읽힌다. 하. 헛웃음이 튀었다. 형이 어떻게 나를 그런 눈으로 봐. 소리치고 싶었으나 혓바닥 밑으로 진심을 숨겼다. 도훈은 신정환이 미웠다. 미운데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