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럭키스데이

어스

- 3월 2일 별자리 운세 1위!
기다리던 입학식, 오늘은 예감이 좋아😆

이른 아침, 도훈은 집을 나서며 신발 끈을 꽉 묶었다. 꼭 신발 끈이 풀려 자주 넘어지곤 하니까 몇번이나 확인을 해줘야 마음이 편하다. 그렇게 내딛는 첫 발걸음이 유달리 가벼웠다. 새로 산 교복은 빳빳하게 다림질 되어 태가 예쁘고, 날씨는 답지 않게 따듯하고, 무엇보다 오늘의 운세에서 1등을 차지했기에! 오늘은 분명 완벽한 하루가 될 것이다.
오늘은 꼭 고백해야지. 그건 무려 2년 전부터 계획한 일이었다.

도훈은 뒤로 넘어지고서도 코가 깨지는 타입의 아이였다. 확실히 많이 다치긴 했지. 그러나 말하려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운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게 문제. 코피 터지게 공부를 하면 꼭 OMR을 밀려 쓰는 실수를 하고, 딱 남들만큼만 뛰어놀고 장난을 치더라도 혼자만 걸려 어른들께 혼이 났다. 이런 사소한 문제는 넘기더라도, 도훈의 인생은 이상할 만큼 자주 꼬였다.
그러나 뭘 해도 안되는 삶에도 유일하게 잘 되는 일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운동. 도훈은 날고기는 애들 사이에서 특출나지는 않더라도 착실한 운동부 소년이었다. 아스팔트에 무릎을 제대로 박기 전까지만 해도. 그날도 신발 끈이 문제였을 거다.
넘어지는 일이야 하루 이틀이 아닌데. 그날은 좀 많이 아팠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일 만큼이나. 듣자 하니 그날 십자인대가 파열 된 모양이었다. 고작 신발 끈 하나에 제 선수 생활이 모조리 날아간 것이다.

한살이라도 어릴 때 그만둬서 다행이지. 어차피 성공이 보장된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군대는 안 가겠네. 위로하는 말인지 속을 긁는 말인지. 도훈 주변의 어른들은 그렇게 말했다. 그 모든 말들이 그러니까 웃어. 라는 소리로 들렸다. 그래서 착실하게 웃어 보였다. 별거 아냐. 센 척을 하며 친구들과 작별했다. 등을 돌리고 차에 올라탔을 때는 찔끔 눈물이 났다. 무릎은 별로 안 아픈데. 꿈은 도훈의 전부이니까. 꿈이 부서지는 건 제 몸이 부서지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럼에도 도훈은 다시 웃어야만 했다. 아무리 세상이 무너졌어도. 웃으면 복이 온다잖아? 도훈은 그날도 웃으며 교탁 옆에 서서 자기소개를 했다. 전학 첫날. 분명 관심이 쏟아져야 하는데, 도훈은 운이 더럽게 없어 관심도 못 받았다. 같은 날 때마침 아역배우 하나가 전학을 왔기 때문이다.

“억지로 웃을 필요 없어.”

그건 도훈의 인생 첫 번째로 찾아온 행운이었다. 나한테 이런 말 해 주는 사람은 없었는데. 대개 첫사랑은 고작 그런 이유로 찾아온다. 사소하지만, 특별하게.
희고 말랑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단단하고 어른스러운 성격. 누나는 누구라도 좋아할 만한 사람이었고, 실제로 인기가 아주 많았다. 그 누나를 보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녀석들이 있을 정도로. 도훈도 그런 녀석들 중 하나였지만, 자신은 좀 다르다고 굳게 믿었다. 근거 없는 기대는 아니었다.
유진이가 도훈이를 많이 아끼네. 어른들 눈에도 그게 보일 정도로 누나는 도훈을 곧잘 챙겼다. 그럴 때마다 도훈은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고백했다. 결과는 정중한 거절. 그럼 그렇지. 내가 하는 일이 잘 풀린 적이 있나. 그럼에도 마음을 접지 못한 이유는.

“너 고등학생 되면 생각해볼게.”

도훈은 그 뒤로 악착같이 기다렸다. 그냥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다. 누나와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해 내신을 올렸다. 코피 터지도록 공부를 하면 OMR을 꼭 밀려 쓰게 되니까 몇번이나 체크를 하고, 열병이 끓어오르는 날에도 꼭 학교에 나갈 만큼이나 열심이었다. 분명 하늘이 그 노력에 감복한 것이 틀림없다. 오늘부터 누나와 같은 교복을 입을 수 있게 되었으니.

오늘의 운세 무조건적인 행운. 도훈은 지루한 입학식이 끝남과 동시에 삼학년 복도를 향해 달렸다. 꼭 오늘 고백을 해야만 했다. 기다리던 사랑이 이뤄질지도 몰라! 그러나 복도에 도착하자마자 발견한 것은, 짝사랑하는 그 누나와 망설임은 NG. 누나의 옆에 꼭 붙어있던, 잘생긴 남자친구.
…….
그가 남자친구라는 사실은 자세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누나는 답지 않게 어리광을 부리며 그에게 기대고 있었다. 고작 검지 손가락을 베였다는 이유로. 여태 누나는 아플 줄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다. 사람이라면 누구든 기대고 싶은 순간이 있을 텐데. 그걸 간과한 김도훈의 참패다.
도훈은 곧장 등을 돌려 도망쳤다. 누나라면 분명 저에게 약한 모습을 들킨 걸 부끄러워할 테니까.

운이 나쁜 아이는 복도에서 뛰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언제 신발 끈이 풀려 코가 깨질지 모르는 일이거든. 꽉 묶어둔 신발 끈이 쥐도 새도 모르게 풀어졌다. 그러나 현재 김도훈에게 그딴 게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러다 언젠가처럼 신발 끈을 밟아 넘어지려던 찰나, 도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다행히 도훈은 다치지 않았다. 아니. 이걸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더 큰 문제가 생겨버렸다.

문제 1. 넘어진 지점이 하필이면 모르는 사람의 입술일 확률은?
문제 2. 그 대상이 하필이면 남자일 확률은?

도훈은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리곤 급히 일어나 제 입술을 박박 닦았다. 그게 그렇게나 충격이었는지, 도훈은 죄송하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로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말았다.

내 첫 키스 상대가 남자라니!
이렇게나 운이 없을 수가.

 


UNLUCKY’S DAY :D
earth

입학식부터 기분 더러운 신고식을 마쳤다. 그 뒤로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던가.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웃음을 잃지 않던 도훈에게서 웃음기가 사라진 지도. 첫 번째로는 실연 당했다는 충격에 벗어나지 못 해서. 두 번째로는 제 첫 키스를 빼앗아 간 남자 때문에! 얼굴도 제대로 못 봤는데. 아니 차라리 얼굴을 모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도훈은 종일 그 남자에 대해 떠올리거나 혹은 떠올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느라 온 신경을 썼다. 그 탓에 일주일째 친구도 없이 겉돌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도 못 했을 거다.

“야.”

여전히 정신이 팔려있는 도훈을 두드려 깨운 건 말도 섞어본 적 없는 동급생이다. 도훈은 시선만 올려 그를 쳐다보았다.

“학교 쨀 건데, 너도 올래?”

뭐라는 거야. 도훈이라면 절대 오케이하지 않을 제안이었다. 나쁜 짓을 하면 항상 자기만 걸리고 자기만 혼나니까. 그러니 대답은 아니. 그리곤 다시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들어 갔다. 남자에게 첫 키스를 빼앗기다니. 남자에게 첫 키스를…….

“고민이 많을 땐 바람 좀 쐬어 줘야지.”

도훈의 상념도 잠시. 친구는 도훈의 어깨에 팔을 감싸며 말했다. 그러니까 바람 쐬러 나가자. 그 말에 도훈이 눈을 크게 떴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본인이 얼마나 눈에 빤히 보이는 사람인 줄도 모르고. 그래서 순순히 그들을 따라가 줬다. 담벼락 하나만 넘어서면 학교 밖이었다. 그 한걸음이 얼마나 큰 일탈인지. 도훈이 침을 꿀꺽 삼켰다.

“망 좀 보라는 뜻이었는데. 너도 나가게?”

먼저 담을 넘어간 녀석이 뒤에서 망설이는 도훈을 보고 말했다. 무시하는 눈초리다. 고등학교에 오니 별별 기분 나쁜 일투성이다. 그에 오기가 생긴 도훈은 망설임도 뒤로한 채 담을 뛰어넘었다. 이번엔 넘어지지 않았다. 신발 끈이 제대로 묶여있었기 때문이다.
깡 좋게 담을 넘은 것 치고는 심장이 쫄렸다. 분명 선생님께 걸려서 뒤지게 혼날 텐데. 그런 걱정을 하면서도 티를 내지 않으며 그들 뒤를 쫓았다. 한 걸음 한 걸음. 학교가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어진 뒤에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이런 날은 처음이다. 나쁜 짓을 해놓고도 들키지 않은 건.
큰 일탈은 아니었다. 그 남자애들 따라 피시방에 갔고, 평범하게 게임 몇판 좀 했다. 그래도 일탈이라고 신이 난 걸까? 평소보다 게임이 더 잘 됐다. 아무렇게나 클릭해도 적의 헤드를 맞춘다. 함께 게임을 하던 녀석들이 도훈의 플레이를 보고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피시방에 핵 깔려있나? 그도 그럴 게 김도훈은 브론즈니까.

“뭔 핵이야. 뽀록이지.”

뽀록…… 뱉어놓고 나서야 이질감을 느꼈다. 입안에서 굴려지는 발음 자체가 생경했다. 뽀록이란 단어를 단 한 번도 사용할 일이 없었기에.

오늘 왜 이렇게 운이 좋지?

운이 좋아도 너무 좋다. 게임을 잘해서 친구들에게 라면도 얻어먹고 집에 가는 길에 오만원권까지 주워버릴 정도로. 마침 하교 시간 맞춰 집에 도착한 덕에 제가 학교를 쨌다는 사실도 들키지 않았고, 학교에서도 별다른 연락을 하지 않은 모양이다.
이번에야 말로 하늘이 자신에게 행운을 내려준 게 분명했다. 남자한테 첫 키스를 빼앗긴 내가 불쌍해서. 이런 거라면 몇번이고 키스할 수…… 겠냐.

도훈은 잠시나마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을 후회했다.

“빨리 나랑 키스해.”

상상이 현실이 되었기에.

 

*
키스 한 번에 운명이 바뀐다고?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이다. 정환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몇 년 전이더라? 첫 연애라 부르기도 웃긴 중학교 3학년, 정환의 첫 키스 상대는 같은 반 남자아이. 남자아이인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첫 키스가 중요한 대목이다.
이제껏 신정환의 삶은 탄탄대로였다. 신호등을 기다려본 적도 없고, 너구리를 까면 다시마가 두 개 이상은 보장 되어있으며 우연히 찍은 문제는 전부 정답. 그게 전부 운인 줄도 모를 만큼 쉬웠다. 모든 게. 그게 전부 뽀록이라는 걸 알게 된 건 바로 그 ‘첫 키스’ 이후였다. 신호등은 자신이 발을 내딛기도 전에 빨간불이 되어버리질 않나, 오랜 시간 준비했던 예고 입시는 실기 당일 목이 퉁퉁 부어버리는 바람에 완벽하게 망치고 말았다.

요즘 왜 이렇게 운이 없지.

정환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온 건 처음이었다.

그래? 나는 요즘 운이 너무 좋은데.

첫 사랑은 그렇게 대답했다. 요즘 들어 신호를 기다려 본 적이 없어.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지. 키스 한 번에 운명이 바뀌는 줄은.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와 두 번째 키스를 마치고 난 뒤였다. 정환은 그 이후로 영원히 누구와도 키스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생판 모르는 남자가 저에게 넘어지더니, 입술을 그대로 박아버렸다. 기분이 나쁜 쪽은 나인데 왜 지가 열을 내고 도망가. 그 애는 제 입술을 벅벅 닦더니 뛰어가 버렸다. 이대로 놓치면 안 되는데. 정환은 급히 몸을 일으켜 그를 쫓아가려 했으나, 금방 커다란 소리와 함께 넘어지고 말았다.
신발끈이 풀려있다.

그 후로 정환은 최악의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하필이면 운이 없어도 더럽게 없는 놈한테 걸렸다. 뭘 해도 안 되는 일투성이다. 단순히 신호등 조금 오래 기다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하루에도 몇번이나 넘어지지 않나, 식당에서는 내 주문만 누락되지 않나. 모의고사를 통으로 조져버리지 않나. 이대로 가다간 수능 날 교통사고라도 날 판이다.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그 녀석을 잡아내야 했다. 기억나는 것, 가슴팍에 박혀있던 선명한 이름 김도훈. 전교의 김도훈을 전부 찾아내서라도 제 인생을 돌려받겠다.

그래서 현재. 신정환이 드디어 김도훈을 찾아내다.
정환은 운동장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있는 도훈을 발견했다. 옆에 친구가 있었던 것 같은데, 눈치가 보이지는 않았다. 현재 정환의 시야에는 가슴팍에 수 놓인 이름 세글자만 보이니까. 곧장 정환은 아이스크림을 쥐고 있던 도훈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아이스크림이 떨어졌다. 정확히 제 운동화 위로.
더 이상은 못 참아. 정환은 아무도 찾지 않는 건물 뒤편까지 도훈을 질질 끌고는 어깨를 꼭 붙잡았다. 입술 한번 부딪히면 그만이다. 곧장 얼굴을 들이받으려는 순간. 도훈이 정환을 밀쳐냈다. 정환은 가볍게 나가떨어졌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도훈이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그게 당연한 반응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으니.

“빨리 나랑 키스해.”

결코 뱉지 못 할 말을 뱉고 말았다. 제 말에 김도훈의 얼굴이 귀 끝까지 빨개졌다. 화가 나서 그런 건지 당황스러워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화가 났으면 욕이라도 뱉지. 도훈은 이번에도 도망쳤다. 정환은 이번에도 도훈을 뒤따라가지 못 했다. 빌어먹을 신발 끈이 또 풀렸기 때문이다. 아마도 도훈을 기습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작전 변경. 김도훈을 꼬셔서 사귀고 만다.

 

 

말은 쉽지. 처음부터 장벽에 부딪혔다. 김도훈은 완벽한 이성애자. 게이라면 경기를 일으키는 평범한 남자애. 남자인 자신이 도훈을 꼬실 수 있을지 벌써 막막했다. 더군다나 정환은 지금 운이 없어도 너무 없는 도훈의 운명을 쥐어버린 탓에 무슨 행동을 해도 악수였다. 이제 제 얼굴만 봐도 도망치는 탓에 인사 조차 어렵다. 침착하자. 나는 신정환이다. 단 한 번도 까여본 적 없는.
그래. 정환은 단 한 번도 사랑에 열을 올려본 적이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으니까. 그건 운이 좋든 나쁘든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여전히 친구들은 자신에게 친절했고, 여자애들은 눈길을 받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아직 나는 매력 있는 사람이구나. 정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훈도 자신의 매력을 알게 된다면 분명 좋아하게 될 거라 믿으며.

“김도훈? 걔 완전 양아치에요. 학교도 맨날 빠지고.”
“그런 거 말고. 걔가 뭘 좋아한다던가 그런 얘기는 없어?”
“별로 안 친해서 저도 잘…….”

알고있는 일학년들을 전부 붙잡고 물어도 대답은 늘 비슷했다. 친한 친구들은 죄다 무섭게 생겨서 다가갈 마음조차 들지 않고. 그 외에는 친한 친구 하나 없고. 그렇다고 도훈을 쫓아다니기엔 도훈이 자신을 너무나도 잘 피해 다녔다. 엇갈리기를 몇번이나 반복했을까. 불운한 정환에게 한 줄기 빛이 내려온다.
최유진.
딱히 친하지는 않지만 일단은 같은 반 친구. 도훈이 저희 교실에 찾아온 날, 정환은 정확하게 보았다. 최유진과 대화를 나누며 슬쩍 보이는 수줍은 표정. 새빨개진 귀 끝. 김도훈이 저렇게 웃을 줄도 아나? …… 웃는 게 훨씬 낫네. 누군가 사랑에 빠진다면 분명 저런 얼굴일 테다. 정환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김도훈이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유진아. 너 쟤 알아?”
“알지? 우리 교회 다녀.”

중학생 때부터 봤어. 엄청 많이 컸더라. 유진은 제법 도훈을 귀여워하는 모양이었다.

“혹시 쟤 좋아해?”
“엥? 전혀.”
“다행이다.”

그 말을 들은 정환이 씨익 웃었다.

“괜찮으면 학교 끝나고 보자.”

김도훈에 대한 모든 걸 털어내고야 말겠다. 정환은 그렇게 말하고는 제 자리를 찾아 앉았다. 금방 유진의 주변으로 사람이 몰렸다. 너 뭐야? 신정환이랑 뭐 있어? 그런 소리가 고스란히 정환에게도 들려오는데도 소음은 한참 멈추지 않았다.

 

*
피부도 희고 말랑하게 생겨서 인기 많은 삼학년. 최근 일학년 사이에서는 그 선배의 이야기가 화젯거리였다. 도훈은 단번에 소문의 주인공을 알았다. 하얗고 예쁘고 인기가 많은 사람. 유진 누나밖에 없잖아? 도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첫사랑을 앓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꿈 깨. 그 사람 남친 있어.”

그건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남친……?”

도훈의 말에 친구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럼 그 선배 게이야?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도훈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유진 누나 얘기 아니야? 그 말에 친구들은 고개를 저었다. 신정환 선배. 그 이름 석 자를 듣자마자 제 다리는 또 다시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미친 스토커가 인기가 많아?
도훈에게 정환은 그냥 골칫거리 중 하나일 뿐이었다. 아무리 도망가도 몇번이나 쫓아오는 통에 이제는 뒤통수만 봐도 정환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 저런 동그란 머리통. 정확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림자.
도훈은 도망칠 준비를 했다. ……어라. 오늘은 쫓아오지 않는다. 뭐 좋은 일이 있는지 미소까지 지으며. 도훈은 그게 더 무서웠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김도훈.”

정환이 제 이름을 부른다. 도훈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네?”
“너 최유진 좋아하지.”
“그걸 어떻.…… 아니. 아닌데요.”
“내가 도와줄까?”

정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번엔 도망치지 않았다.

“누나 남친 있잖아요.”
“헤어졌대.”

헉. 그 대답을 듣자마자 도훈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너무 좋아하는 걸 들켰나. 도훈은 급히 웃음기를 감추고 정환을 쳐다보았다. 이 사람을 믿는 게 맞는 걸까. 의심스러웠지만, 그래도 누나를 여전히 좋아하니까. 도훈은 기어코 손을 잡는다. 지금의 나는 운이 좋으니까! 제 선택이 틀릴 리 없다. 정환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번호 찍어. 도훈이 꾹꾹 제 번호를 찍어 눌렀다. 그때 정환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누군가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해 본 적이 없는데. 드디어! 노력으로 무언가를 얻는다는 건 제 생각보다 훨씬 더 기쁜 일이었다.

……그래서 누나랑 이게 무슨 상관인데요.

도훈이 가판대 앞 거울을 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머리엔 웃기지도 않은 토끼 머리띠가 씌워져 있었다. 연애를 하려면 롯데월드는 필수지. 던지면서도 개소리인 줄은 알았다. 그 말에 김도훈이 너무 쉽게 낚여준 건 예상 밖의 행운이었지만. 도훈도 의구심은 드는지 자꾸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왜 형이랑 단 둘이 롯데월드에 가고 있지. 그럴 때마다 정환은 본질을 숨기기 위해 이것저것 장황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흔들다리 효과라고, 두려워서 떨리는 걸 설렘으로 착각하기도 한대. 도훈이 항상 제 말을 들어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연애 안 하고 싶어?”

그 말 한마디면 모솔 도훈은 다시 눈을 또렷하게 뜨며 정환의 말을 귀담아들을 수 밖에 없었다. 가만 보면 도훈은 말을 잘 듣는 타입이다. 무서운 녀석들과 몰려다니는 것치고는 꽤나. 툴툴대면서도 얌전히 머리띠를 고르는 모습 좀 봐라.

“뭐가 나아요?”

도훈은 머리띠 두 개를 번갈아 쓰며 정환에게 물었다.

“음…… 강아지.”

강아지밖에 없지. 이렇게나 충성스러운데. 도훈은 정환의 말대로 강아지 머리띠를 골랐다. 정환은 도훈과 같은 걸 골라 썼다. 도훈은 남자끼리 이게 뭐냐며 부끄러워하기는 했지만, 정환은 그게 꽤 만족스러웠다. 어찌 됐든, 첫 데이트 아닌가.
그래서 첫 데이트로 무엇을 해야 하느냐. 바로 무섭기로 소문난 롤러코스터 타기. 정환은 알고 있었다. 최유진은 놀이공원을 싫어한다는 걸. 작년인가 현장 학습으로 롯데월드를 갔을 때, 시종일관 벤치에 앉아서 멍을 때리던 유진을 보았다. 집에 가고 싶다. 그런 말을 종일 읊어대며. 그때는 별 생각 없었는데,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정환은 도훈을 이끌고 롤러코스터 줄에 섰다. 무서운 거 위주로 타자. 그 말에 도훈이 침을 꿀꺽 삼켰다.

“무서워?”
“아, 아뇨. 저 이런 거 잘 타요.”

많이 무서운가 보네. 눈치는 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뭐 하는 거예요?”

손을 꽉 잡아주었다. 꼭 제가 키스라도 한 것처럼, 도훈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너무 무서우면 손 잡아.”
“남자끼리 무슨.”

도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손을 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롤러코스터가 가파른 경사를 오르기 시작했고, 도훈은 급히 정환의 손을 잡았다. 긴장감이 다 전해진다. 정환과 도훈을 태운 열차가 점점 하늘과 가까워질 때 즈음, 두근. 정환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역시 본인도 무서운 것은 체질이 아니었기에. 이내 열차는 빠른 속도로 수직 하강을 했고 정환과 도훈은 눈을 꼭 감고 서로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한 시간도 넘게 기다렸는데, 막상 기구에 타니 아주 찰나 같은 시간이다. 도훈과 정환은 여전히 롤러코스터의 아찔함이 가시지 않았는지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짐 칸에서 짐을 꺼내려는데, 가방끈에 걸려있던 강아지 귀가 뜯어졌다. 그건 정환의 것이다. 어떻게 아냐고? 여기 운 없는 강아지는 본인 뿐이니까. 정환은 시무룩해진 얼굴로 뜯어진 머리띠를 바라보았다. 기껏 맞췄는데…….

“여기요.”

정환의 머리칼에 도훈의 손길이 닿았다. 제 머리띠를 벗어준 것이다. 고작 그 뿐인데 정환은 놀란 눈으로 도훈을 보았다. 도훈은 멋쩍은 듯 뒷덜미를 쓸었다. 아니, 뭐. 별것도 아닌데요. 그래. 별거 아니지. 머리띠 하나에. 겨우 머리띠 하나에. 심장이 뛸 리가 없잖아.
정환이 제 가슴팍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아직 롤러코스터의 여파가 가지 않은 걸까. 그렇다면 당장 도훈의 손을 잡고 싶다. 무서우니까.

그 뒤로도 여운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매점 가판대에서 츄러스를 사 먹을 때도, 해가 지고 퍼레이드를 관람할 때도. 정환의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다. 도훈이 퍼레이드에 정신이 팔려있을 동안 정환은 흘긋 도훈의 얼굴을 보았다.
…….
눈이 원래 이렇게 반짝거렸나? 그러다 멋대로 생각해버렸다. 도훈이 예쁘다고. 그런 문장은 머리 속으로도 꺼내 보면 안 되는데. 모든 감정은 들여다보는 순간부터 막을 수 없이 커지는 법이다. 정환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정환은 집에 가는 길 내내 도훈을 떠올렸다. 꼭 붙잡고 있던 손. 퍼레이드의 화려한 불빛을 전부 머금은 동공. 그런 것들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그 탓에 어떻게 집에 왔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지금 생각나는 건 하나. 도훈의 손을 다시 잡고 싶다. 말도 안 되지만, 좋아하게 되어버린 것 같다.
흔들다리 효과라고, 두려워서 떨리는 걸 설렘으로 착각하기도 한대.
지 꾀에 지가 당한다고.


키스를 해야 하는 상대가 진심으로 좋아졌어. 전 세계를 통틀어 이런 게 고민인 사람은 자기밖에 없을 거다. 신정환은 괴로웠다. 시종일관 다른 여자 이야기나 하는 남자애를 좋아하게 되다니.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서 피하면 자신은 영원히 불운해야 하니까. 운 나쁘게 김도훈 같은 애를 짝사랑하게 된 것처럼.
도훈은 정환의 그런 속도 모르고 매일같이 정환을 불러내 유진의 이야기를 했다. 듣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구실에 불과하다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너무 슬프니까. 정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도훈의 이야기를 들었다. 도훈이 누나, 누나 거릴 때마다 칼로 푹푹 찔리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방해해주겠다.

방해공작 그 첫 번째. 틈을 주지 않기.
정환은 팔자에도 없던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학교에서야 제가 어떻게든 마킹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교회는 얘기가 다르지 않나. 제가 모르는 둘만의 시간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정환은 유진에게 자신도 교회에 데려가 달라 말했다. 유진은 신앙심이 깊은 사람인지라 교회에 오겠다면 누구든 두 팔 벌려 환영했다. 너무 좋지! 다들 좋아할 거야. 유진의 말대로 교회 사람들은 모두 정환에게 친절했다. 한 사람만 빼고.

“유진 누나가 데려왔다고요?”
“응.”
“저한테 말하지 왜…….”

그야 네가 질투할게 뻔하니까. 생각은 했지만 말로 내뱉지는 않았다. 정환의 주특기. 허허 웃으며 말을 넘겨버리기. 그 주특기에 제대로 당한 도훈은 뭐라 말을 잇지 못 하고 자리에 앉았다. 예배 시간은 지루했다. 모두가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 사이 정환은 도훈 쪽을 쳐다보았다. 저보다 앞에 앉아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뒤통수가 귀엽잖아. 목사님의 지루한 말씀이 끊길 때마다 사람들은 일제히 외웠다. 아멘. 정환도 그럭저럭 아멘. 했다.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교회가 끝나면 다 같이 커피까지 마셨다. 그 무리에는 당연히 도훈도, 유진도 있으니 정환은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카페에 가서 무슨 대단한 이야기를 나누는지 들어야겠다. 그러나 그 포부가 허무해질 만큼 그들의 대화는 별거 없었다. 도훈과 유진이 밀담이라도 나눌까 마음을 졸이며 그쪽을 쳐다보았지만, 유진은 성경 얘기를 하느라 도훈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도훈은 이야기에 끼지도 못한 채로 유진을 보다 커피를 보다 했다. 제 운을 전부 가져가 버려놓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김도훈이 좀 바보 같았다. 불운한 나도 너를 얻어보자고 이렇게나 노력 중인데.

성경 얘기로 시간을 모두 태운 그들은 이제 집에 들어가야겠다며 카페를 나섰다. 그때 도훈이 유진을 졸졸 쫓아갔다. 누나 혹시…… 그 순간 정환은 재빠르게 도훈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무슨 말을 할지 모르니.

“도훈아. 우리 할 얘기 있었지?”
“저희가요?”
“응. 지금 해야 돼.”

거의 반강제로 도훈을 끌고 왔다. 유진은 진작 집에 갔고, 김도훈도 제대로 붙잡아뒀으니 첫 번째 계획 성공.

방해공작 그 두 번째. 거짓말의 거짓말의 거짓말.
김도훈과 사귀기 위해 최유진의 호감을 먼저 사야 한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다지 친하지도 않았던 유진과 시간을 보내는 일이 꽤 잦아졌다.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유진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지 파악해야만 했다. 그래야 김도훈에게 조언해줄게 많아지지. 물론 죄다 반대로 말할 거지만. 사실 유진이는 어리광을 좋아해. 반대가 끌리는 법이잖아. 그럴 때마다 도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아는 누나는 그런 타입이 전혀 아닌데. 의심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정환에게서 풍겨 나오는 묘한 신뢰감 때문일 거다.

“근데 누나도 어리광 피워요.”
“유진이가?”
“거봐. 형도 아무것도 모르네.”

도훈의 표정이 씁쓸하다. 무슨 이야기인지 더 설명해주길 바랐지만, 아쉽게도 도훈은 입을 닫아버렸다. 그 대신

“밥이나 먹으러 가요.”

정환을 먼저 이끌었다. 정환은 순순히 도훈의 말에 따랐다. 일단은 도훈과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중요하니까.

종종 급식이 맛없을 때면 도훈은 학교 담장을 넘었다. 그리고는 정환에게도 함께 넘자며 손을 뻗었다. 그 손을 잡고 싶어 몇번이나 담을 넘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늘 저 혼자만 혼이 났다. 그것도 매번. 경비는 벌써 튀고 있는 김도훈은 보이지도 않는지 신정환을 꾸짖기 바빴다. 그래서 오늘은 안 나갈래.

“왜요. 같이 가줘요.”
“나만 혼나잖아.”
“그럼…….”

도훈은 뭔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정환의 손목을 붙잡고 달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도훈이 어디로 이끄는지도 모르는 채 뛰어대느라 이빨이 시릴 만큼 숨이 찼다. 그래도 여전히 붙잡고 있는 손이 좋아서 심장이 따끔거렸다. 그게 썩 좋지는 않았다. 이러려고 김도훈을 꼬시기 시작한 게 아닌데. 목적은 뒷전이고 멋대로 설레고 좋아하는 자신이 싫었다.

“이러면 안 들킬 걸요. 저는 운이 좋거든요.”

그 운 원래 내 거잖아. 그 말이 입술 끝에 걸린 채로 나올 듯 말 듯 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손목을 쥐고 있는 도훈의 까만 손이 좋았다. 땀에 헝클어진 앞머리가 좋았다. 붉게 상기 된 뺨이 좋았다. 언젠가부터 신정환은 김도훈의 모든 점이.

“짜증 나.”
“뭐가요?”

정환은 대답하지 않고 돌아섰다. 도훈은 자연스럽게 힘을 풀어 정환을 놓아주었다. 도훈은 그런 다정함이 몸에 배어 있는 편이었다.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니까. 이런 애를 어떻게 안 좋아할 수가 있어. 그건 정환에게 찾아온 불운 중에서도 최고의 불운이었다. 그 불운도 다 김도훈 때문이잖아. 그러니 오늘은 급식으로 나온 콩밥이나 먹을 거다. 정환은 언덕을 내려갔다. 그렇게 한걸음 내딛는 순간, 뒤늦게 기억났다.
최근들어 신발 끈이 자주 풀린다는 사실을.
언덕에서 구르듯 넘어졌다. 하필이면 이런 타이밍에. 운도 더럽게 없지. 정환은 아무렇지 않은 척 일어섰으나, 오늘은 통증이 심했다. 인대가 늘어났는지 욱신거려 땅을 밟을 때마다 찌릿하고 머리 끝까지 통증이 전해졌다. 자연스럽게 걸음걸이는 절뚝거렸고 그 모습이 다정한 김도훈의 시야에 들지 않을 리 없었다. 도훈이 정환을 앞질러 달려왔다. 제 앞을 막아선 도훈 때문에 정환은 절뚝거리는 걸음을 멈췄다. 도훈이 자세를 낮춘다.

“업혀요.”

싫어. 저도 싫어요. 몇번이나 실랑이가 오간 끝에 결국은 도훈이 이겼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멋있어 보이고 싶은 건 당연한 이치인데, 이런 꼴을 보인 게 너무 한심하다.
도훈은 땀을 뚝뚝 흘리면서도 정환을 놓지 않았다. 그런 도훈의 노력으로 양호실에 도착했으나 한창 점심시간에 선생님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침대에 앉혀놓고 얌전히 기다려야 할 텐데. 도훈은 멋대로 의료 키트를 뒤져 붕대를 찾아냈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정환이 손을 내저으며 도훈에게 말했으나 이번에도 역시 도훈은 제멋대로 다정했다. 정환의 다리를 고정해둔 채로 붕대를 둘둘 감았다.

“저 이런 거 잘해요. 평소에 엄청 다쳐봐서.”

그야 그렇겠지. 도훈과 운명이 뒤바뀐 뒤로 정환이 얼마나 많이 다쳤는데. 정환은 붕대를 다 감았다며 웃는 도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에서 코, 입 순서대로. 자신의 얼굴을 훑는 시선이 민망한지 도훈이 눈을 피했다.

“너는 최유진이 왜 좋아?”
“어른스럽고, 저한테 다정하고 또…….”
“그럼 나는.”
“네?”

말하면 안돼.

“……왜 나는 안 좋아해?”

충동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도훈의 기다란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네? 방금 전보다 더 당황스러운 표정이다. 혀, 형도 좋아하죠. 당연히.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 있지만, 이미 정환의 눈에 다 들켰다. 전력으로 달릴 때보다도 더 빨개진 얼굴을 하고서. 도훈은 황급히 양호실을 나섰다. 역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정환은 도훈이 지나간 자리를 그대로 보고 있었다. 종이 칠 즈음이 되어서야 보건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문이 열릴 때 잠시나마 도훈이기를 바랐던 자신이 한심했다.

“누가 마음대로 보건실 뒤지래.”

선생님은 이미 감겨있는 붕대를 보며 한 소리 하셨다. 너무 아파서요. 죄송합니다. 얼마나 아픈데? 선생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정환에게 다가와 발목을 이리저리 만져댔다. 아파? 하고 물었다. 희한한 일이다. 분명 방금 전까지는 되게 아팠는데.

“아니요.”

선생님이 오시자마자 멀쩡해질게 뭐람. 꾀병을 부렸다고 한소리 더 들었다. 정환은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하며 보건실을 나왔다. 걷는 내내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런데 또 다시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 보건실을 지나치자마자 다시 발목이 욱신거린다. 바닥에 발을 내려놓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아팠다. 그러나 정환은 몸을 돌려 보건실로 갈 수 없었다. 이미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렸으니까.
이 모든 상황이 제 업보다.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한 대가. 앞으로 정환은 보건실에도 도훈에게도 다가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방해공작 그 세 번째 ?
기말을 넘기고 여름방학이 찾아올 때까지, 도훈과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다. 교회에도 일학년 복도에도 찾아가지 않았으니. 연락으로 내내 귀찮게 하던 도훈도 이제는 카톡 한 통 보내지 않았다. 짝사랑도 망하고, 키스도 못 해서 아마 평생 불운하겠지 나는. 그때부터 정환은 비관주의자가 되었다. 꽤나 친해진 유진이 말을 걸어도 심드렁하게. 응. 아니. 그 외의 대답은 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미웠거든.

“정환아. 방학에 혹시 시간 돼?”
“모르겠어.”
“곧 여름성경학교 하는데, 시간 되면 좀 도와주라.”
“…….”
“꼭 와줬으면 좋겠어.”

유진이 간절한 표정으로 정환을 올려다봤다. 김도훈도 오려나……. 정환이 혼잣말처럼 뱉은 말에 유진이 대답했다. 응! 당연히 오지.
그렇다면 더 가고 싶지 않은데. 정환은 생각해 보겠다는 말만 남긴 채로 방학을 맞이했다. 이미 비관적인 생각에 휩싸인 정환은 집 밖에도 잘 나가지 않고 친구들과 굳이 연락하지도 않았다. 앞으로 자신은 평생 불운할 거니까. 너무너무 불운해서 밖에 나가봤자 다치기나 할 거니까.
여느 때처럼 침대에 콕 박혀 게임기를 두드리던 어느 날. 불쑥 카톡! 하고 알림이 울렸다.

[ 형!! 저랑 여름성경학교 가요! ]

동시에 최유진에게서도 카톡!
뭐야. 둘이 짜고 쳤나. 정환은 거의 동시에 온 카톡을 보며 생각했다. 둘이 지금 같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정환은 두 개의 카톡방 중 도훈의 것을 먼저 눌렀다. [ 그때 일이 있어서 힘들 것 같아 미안해 ] 그러자 수 초 만에 1이 사라졌다. [ 언제라고 말도 안했는데. ] 아.
할 말이 없어진 정환은 꼼짝없이 끌려가게 되었다. 거절하려면 얼마든 거절할 수야 있지만. 아니. 나는 억지로 끌려 온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버스에 올라타 마주친 도훈을 보자 다시 심장이 무섭게 뛰어댔지만. 도훈을 쳐다보기 위해 부러 옆 옆자리를 골라 앉았지만. 그래도 이건 내 자의가 아니야. 정환은 그렇게 생각했다.

생각보다 할 일이 많았다. 초등부 친구들도 챙겨야 하고, 밥시간 마다 한 시간씩 일찍 달려가 거들어야 하고. 사방팔방 뛰느라 김도훈을 의식할 새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김도훈. 김도훈은 왜 일을 안 하지? 운빨로 피했나. 그렇다기엔 일을 하는 건 유진과 정환 뿐이었다.
원래 이런 일은 청년부에서 주로 해. 유진이 말했다. 그럼 우린 왜 일하고 있는 거야? 정환이 묻자 유진은 밝게 웃었다.

“내가 지원했어! 좋은 일이잖아.”

그럼 나는? 어이가 없었다.

“너랑 같이 하고 싶어서.”

바보같이 그때 유진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지 못 했다. 일이 너무 바빠서 그런 건지, 아니면 질투에 눈이 멀어버린 건지. 이유야 수백 수만가지다.
활동시간 내내 정환은 유진이 질투 났다. 유진의 옆에 항상 도훈이 있어서. 같은 조라 어쩔 수 없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붙어있어도 너무 자주 붙어있었다. 레크레이션 게임에서 도훈과 유진이 팀을 맺었을 때엔 화가 머리끝까지나 방을 나가버리기까지 했다. 역시 오지 말았어야 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정환은 유진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말을 걸면 대답만 적당히 해주는 정도. 유치한 거 안다. 평소 같으면 적당히 친절하게 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정환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니까. 그야 당연하지. 평생 불운을 떠안고 살아야 한다니. 신발 끈을 몇번이나 묶고, 아는 답도 몇번이나 확인해야 하고. 김도훈과 키스 한 번이면 해결 될 일인데. 그 조차 못하게 되었으니. 김도훈이 유진을 좋아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아!”

짧은 비명이 들렸다. 요리를 하던 중 유진이 손을 베인 모양이었다. 작은 상처였지만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정환은 제 앞에 놓인 휴지를 몇장 뽑아 유진에게 건넸다. 미운 것과 그건 별개의 일이었다. 밴드를 찾아보겠다 말한 뒤 정환은 식당을 나섰다. 정확히는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유진이 정환을 붙잡았기에. 유진은 정환이 쥐여준 휴지로 손가락을 꾹꾹 지혈하며 자신은 괜찮다고 말했다.

“아프잖아.”
“……그럼 나도 같이 나갈래.”
“왜?”

겨우 밴드 하나 찾자고 둘씩이나? 그게 얼마나 멍청한 질문인가. 이 또한 질투에 눈이 멀어져 보지 못 했다. 함께 식당을 나선 둘은 숙소 쪽으로 향했다. 의료 키트가 여자 방에 있었던가. 정환은 그제야 납득했다. 남자가 여자 방에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유진이 자신을 따라 나왔구나. 생각했다. 유진이 정환의 옷 소매를 붙잡기 전까지만 해도.

“정환아.”
“…….”
“우리 무슨 사이야?”
“어?”

어쩌지. 이번엔 또 다른 방향으로 망했다. 김도훈과 제대로 눈이 마주쳐버렸기 때문이다.

 

“도훈아!”

정환은 다급하게 도망치는 도훈을 쫓았다.

“그런 거 아니야.”

뭐가 아닌데요. 도훈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제 발끝만 보고 있었다. 얼굴 좀 들어봐. 응? 정환이 도훈의 턱 끝을 잡았으나, 도훈이 정환의 손을 내쳤다. 도훈이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어깨가 파르르 떨릴 만큼. 정환은 도훈과 눈을 맞추기 위해 몸을 살짝 숙여 도훈을 올려다보았다.
도훈은 급히 제 얼굴을 가렸으나, 이미 다 봤다. 눈물이 잔뜩 고여 꾹 참고 있는 얼굴을. 정환은 도훈의 눈가를 닦아내며 말했다.

“울지마. 내가 다 미안해.”

도훈이 자신을 싫어하거나 말거나. 정환은 당장 도훈을 달래는 것만이 의무인 사람처럼 도훈을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그제야 도훈은 제대로 울기 시작했다. 뭐라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울음소리에 먹혀 잘 들리지 않는다. 아마 저를 원망하는 말이겠지. 그래. 그래. 형이 미안해. 정환이 할 수 있는 말은 그 뿐이었다.

“미안하면요?”
“내가 어떻게 해줄까.”

도훈은 망설임 없이 정환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상황 파악조차 하지 못 했다. 그저 몸이 얼어붙은 채로 도훈을 쳐다볼 뿐이었다.
상황을 조금만 앞으로 돌려보자.

“좋아해요. 너무 좋아서 질투가 나요. 그런데 그게 형인지 누나인지 이제 모르겠어요.”

도훈은 분명히 예고했다. 못 들은 신정환 잘못이지. 그러니 이건 제 잘못이 아니다. 아직도 굳어있는 정환의 손을 꼭 붙잡았다. 한번 들이받고 나니 알 것 같았다. 제가 좋아하는 건,

“형이에요.”

정환이 그토록 바라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간의 노력이 무색하게 정환은 한 번 더 도훈의 뺨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바보같이.

 


*
연애 경험 없음. 그러나 뼈테로. 남자와의 연애? 상상도 하기 싫어! 그런 김도훈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인정하고싶지는 않지만, 정환은 멋진 사람이었다. 미친 스토커인 줄로만 알았는데. 잘생기고 키도 큰 데다 성적까지 좋은 만화 속 캐릭터.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정환을 그렇게 바라봤다. 그러니 도훈이 정환을 동경하게 되는 것도 특별한 일은 아니다. 저와 제 주변의 남자 녀석들과는 확실히 다른 어른스러운 분위기. 그래. 딱 유진 누나가 좋아할 법한 사람. 그런 사람이 나를 도와준다니! 역시 나는 운이 좋아.
그래서 별 시답잖은 이야기도 귀 기울여 들었다. 처음엔 그저 정환을 닮고 싶었던 건데.

너무 무서우면 손 잡아.

정신 차려보니 롯데월드에서 커플 머리띠 쓰고 손까지 붙잡고 있었다. 이게 다 롤러코스터 때문이다. 그렇게 무서운데, 당연히 뭐라도 잡고 보지. 집에 가는 길 내내 제 손을 꼭 쥐고 있던 더운 손이 떠올랐지만 애써 고개를 저었다. 내가 좋아하는 건 유진 누나니까.
그날 이후로 도훈은 더 자주 유진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지 않으면 자꾸만 제 손을 꽉 쥐고 있던 커다란 남자의 손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진이가 데려왔대.

정환이 처음 교회를 나온 날, 도훈은 조금 화가 나기도 했다. 자신이 아닌 유진을 통해 교회에 왔다는 사실이. 그래도 나름 정환과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서운함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더 자주. 더 많이. 정환을 찾았다. 급식 맛 없으면 데리고 나가서 맛있는 거라도 사 먹이고. 학교 끝나면 정환을 불러내 함께 놀고. 그러다 보면 정환이 유진에게만 하는 말을 자신에게도 해줄 것 같았다. 뭔가 주객이 전도 된 것 같지만, 생각이라는 건 구태여 짚어보지 않으면 금방 지나가 잊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자신이 왜 그러는지 의문을 가질 틈이 없었다. 정환에 대한 생각은 늘 짚어보지 않아 금방 잊혔으니까. 남는 건 행동뿐이었다. 왜 정환의 손목을 붙잡고 언덕을 그렇게 달렸더라. 어떻게 그 형을 업고 보건실까지 왔더라. 나는 왜 지금 여기서 붕대를 감고 있지. 그 모든 것들에 의문 한번 품지 않았다. 그러나 정환이 제 얼굴을 가만히 내려보던 순간부터는…….
얼굴이 뜨겁다. 그 뒤로 정환이 더 낯 뜨거운 말을 했는데, 당장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오싹하고 무서운 기분이 들어 양호실을 뛰쳐나갔다.
첫 키스의 감촉. 제 손을 쥐고 있던 덥고 커다란 손.
교실로 달려가는 내내 그런 것들이 도훈의 머리 속이 어지럽혔다. 정환을 보고 있다 보면 내내 이런 생각이 들어서 제가 정말로 이상해져 버릴 것 같았다. 그래도 다행이라 해야 할까? 그날 이후로 정환은 제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도훈도 굳이 정환을 찾지 않았다. 금방 지나갈 줄 알았던 이상한 생각들이 몇주가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으니까.
그래서 당분간 정환을 보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정환이한테 연락 한 번만 해주면 안돼? 그래도 나보다는 네가 더 친하잖아.

유진의 부탁 한마디에 일이 여기까지 꼬여버렸다.

정환아.
우리 무슨 사이야?

이런 장면이나 목격해버리고. 도훈의 첫사랑이 두 번째로 무너지던 순간이었다. 이럴 줄 알았지. 유진 누나는 나 같은 타입 안 좋아하니까. 이쯤 되니 수긍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도저히 엿 같은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유진이 미운데, 그보다 더 신정환이 밉다. 쓸데없이 잘나게 태어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호감을 사는 것도. 그래서 고백을 수두룩하게 받는 것도. 지금, 이 순간까지도 저에게 다정한 것도. 전부 다 미워. 그런데도 만약에.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만약에.
지금 나를 달래는 손길이 너무 좋아서 미치겠다면.

그래서 해피엔딩?
그렇다기엔 전혀 해피하지 않아. 그날 이후로 신정환이 키스를 해주지 않기에. 도훈은 여전히 몇번이고 정환과 입을 맞추고 싶은데. 도훈이 제 입술을 들이받으려 할 때마다 정환은 이리저리 피해 다니기 바빴다. 느릿한 사람이 그럴 땐 어찌나 민첩하던지. 그게 너무 서운한데. 이런 얘기를 하면 애새끼 같아서 싫어하겠지? 도훈은 제 입술이 비쭉 튀어나올 때마다 의식적으로 아랫입술을 물었다. 나름대로 의젓한 척을 하는 거다. 그게 잘 안되는 날도 있지만.

"키스를 안 해준다고?"

서운함이 쌓여 묵을 지경이 되자, 도훈은 친구들을 붙잡고 물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결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거다.

“걍 네가 싫은 거 아님?”
“아냐. 첫날에는 분명 해줬어.”
“아~ 알겠다.”

조용히 도훈의 이야기를 듣던 친구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손뼉을 쳤다.

“실수로 사귄 거네.”
“실수?”
“어. 그날 실수한 거 책임진다고 너랑 사귀는 거라고. 억지로.”

억지로. 세 글자가 도훈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혔다. 그 뒤로 정환을 만날 때마다 자꾸만 생각이 난다. 억지로. 그러면 내 손을 잡아주는 것도, 집에 꼭 데려다주는 것도, 집 앞에서 가기 싫다는 듯 아쉬운 표정을 짓는 것도. 전부 다 억지로 하는 일이란 말이야? 도훈은 또 다시 울고 싶어졌다. 정환과 사귀기만 하면 분명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럼 어떡하지? 답은 명확했다. 그냥 헤어져. 그게 그 사람도 마음 편할 걸. 이제야 제 마음이 갈피를 잡았다 생각했는데, 시작부터 헤어짐을 고민하다니. 무려 첫 연애가 이런 식으로 끝나선 안된다. 하지만……
형이 정말로 억지로 사귀고 있다면. 헤어져 주는 게 형을 위한 일 아닐까.
그게 도훈의 해결책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정환은 도훈을 집까지 데려다줬다. 집에 가는 길엔 손을 꼭 잡아야 하는데. 도훈이 슬그머니 손을 뺐다. 오늘은 꼭 헤어지자고 말할 거니까. 생각만 해도 벌써 속이 울컥거렸다. 이럴 거면 진작 거절하지. 줬다 뺏는 건 너무하잖아. 텅 빈 손으로 걷자니 벌써 정환과 헤어진 것만 같아 슬퍼졌다.

“형. 저희 헤어져요.”
“뭐?”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도훈은 어렵게 제가 해야 할 말을 뱉어냈다. 불쑥 들어 온 말에 정환의 표정이 굳었다. 꽤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벌어진 입술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도훈의 눈에는 그런 게 보이지 않았다.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어 땅만 보고 있었으니까.

“저랑 억지로 만나는 거 다 알아요. 이제 안 그래도 되니까……”
“내가 너를 억지로 만난다고?”

이번에도 몸을 숙이고 눈을 맞춰주는 쪽은 정환이었다.

“나 보고 얘기해. 내가 정말 억지로 만나는 것 같아?”

정환이 눈을 똑바로 맞춰왔다.

“그러면 왜 안 해주는 거에요?”
“뭐를.”
“……키스요.”

제가 뱉어놓고 부끄러워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러면 꼭 스킨쉽 안 해줘서 헤어지자는 놈 같잖아.
도훈의 말에 정환은 한참 말이 없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해서 정 떨어진 건가? 도훈은 눈치를 살피기 위해 고개를 살짝 들어 정환의 얼굴을 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 정말로 정 떨어졌나 봐. 어떡하지. 도훈은 급히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키스 때문에 헤어지자는 게 아니라요. 형이 후회하고 있을까 봐요. 저는 진짜로 형이랑 헤어질 마음이,

“도훈아.”

도훈의 말이 점점 길어지자 결국 정환이 입을 열었다. 이번엔 쉴 새 없이 변명하던 도훈의 입이 다물어 졌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믿어줄 수 있어?”

침을 꿀꺽 삼켰다. 정환이 어떤 말을 할지 전혀 예상되지 않아서. 그럼에도 도훈이 할 수 있는 대답이라곤 네. 그 뿐이다. 좋아하는 사람을 믿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아니. 못 믿겠다. 키스 한 번에 운명이 바뀐다니. 물론 정환과 키스를 한 뒤로부터 운이 좋아진 건 사실이지만. 정말로? 도훈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형이 저렇게까지 진지하게 말하는데. 정환은 늘 신뢰 가는 인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허무맹랑해서.

"못 믿겠어요."
"거봐."
"직접 해봐야 알 것 같은데."

그래서 더 귀엽잖아. 도훈은 정환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에 맞춰 눈꼬리가 휘어지는 게 여전히 예쁘다.

"딱 한 번만 더 해요. 그럼 믿을게요."

그 웃음에 안 홀리는 사람 없을 거라 장담한다. 그러니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김도훈과 또 다시 키스를 하게 된 건, 불가항력이었다. 그래. 네가 판단해라. 정환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봤자 별일 있겠어? 넘어질 것 같으면 내가 꼭 붙잡으면 되지. 안일한 생각이었다.

"그럼 저 가볼게요."

도훈의 인사에 정환이 등을 돌렸다. 도훈은 늘 정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아마도 정환은 보지 못했을 테다.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꾹꾹 누르던 도중 물벼락을 제대로 맞는 장면을. 그냥 물도 아니다. 거품 잔뜩 껴 미끈거리고 불쾌한 구정물. 곧장 저에게 물을 끼얹은 윗집 아주머니가 내려와 연신 사과를 하며 세탁비를 쥐여주었다. 그러니 이 정도는 불운도 아니다. 오히려 꽁돈 벌었으니 운이 좋은 거지! 키스 한 번에 운빨이 바뀐다니.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믿을 리 없었다.
잘 들어갔어? 마침 타이밍 좋게 정환에게서 연락이 왔다. 도훈은 잠시 고민했다. 역시 이 얘기는 안 하는 게 좋겠지?

[형 저 오늘 꽁돈 생겼어여 ㅋㅋ]
[봤죠? 저 운 좋은거]

몸이야 씻으면 되고, 옷이야 빨면 되지. 그러니까 이번에야말로 해피엔딩!


*
낌새가 이상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왜. 가끔 이상한 촉이 들 때가 있지 않나. 김도훈은 자꾸만 자신은 운이 좋다고 박박 우겼지만, 오히려 그럴 때마다 정환은 괜히 불안해졌다. 도훈의 신발 끈이 풀려있는 걸 한두 번 발견한 게 아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이 묶어주기는 했지만. 자신이 없을 땐 누가 묶어주냐고. 또 덜렁대다 넘어지기나 하겠지.
그런 걱정과는 반대로 정환에게는 매일 행운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게 가장 불안한 점이다. 고작 횡단보도 조금 빨리 건너거나 다시마 두 개씩 먹는 행운 정도였으면 이렇게 불안하지도 않지. 정환은 이번 모의고사에서 만점을 받아버렸다. 이런 경우는 본인도 처음이었기에 믿기지 않아 가채점을 몇번이나 다시 했는지 모른다. 이게 말이 되나. 최근 들어 김도훈 쫓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어 공부는 아예 놓아버렸는데. 그래서 느낌대로 찍은 게 다인데. 제 운이 하다 하다 기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냥 수능까지 놀고 먹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창밖을 보면 마음이 접혔다. 김도훈. 도대체 어떻게 하면 축구를 하다가 농구공에 머릴 얻어맞냐.

“이제 내 말 믿지? 그러니까 다시…….”
“아니요? 저 운 완전 좋은데요.”
“너 농구공 맞은 거 다 봤어.”
“근데 하나도 안 아파요. 운이 좋은 거죠.”

이런 대화를 몇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정환은 다시 예전처럼 도훈을 잡으러 다니기 바빴다. 도훈과 다시 키스를 하기 위해서. 그래서 오늘의 도훈은 어디 있나.

“도훈이 오늘 학교 안 왔는데요.”

분명 나한텐 학교 도착했다고 톡 했는데. 그걸 확인한 뒤에야 안심하고 휴대폰도 제출했는데. 정환은 황급히 교무실로 달려갔다. 무슨 핑계로 휴대폰을 달라고 말할까. 잠시 고민했던 게 우스울 만큼 교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휴대폰 가방은 보란 듯이 담임 책상 옆에 놓여있고. 그냥 가져가라는 말과 같았다. 정환은 곧장 가방을 열어 제 휴대폰을 찾았다. 그리고 전원을 켜는 몇 초. 단 몇 초간 정환의 시간은 몇시간처럼 흘러갔다.
김도훈에게서 온 연락 0통.
톡방에는 학교 앞이라는 말과 함께 딸려 온 이모티콘만이 방긋 웃으며 정환의 속을 긁었다. 정환은 곧장 도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번의 신호음이 지나간 뒤, 덜컥.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금방 아는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너 어디야.”

정환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긴장이 풀리니 미뤄뒀던 화가 치밀은 모양이다. 그 목소리에 한껏 쫄은 도훈은 한참 뜸을 들이다 겨우 대답했다. 병원이요. 그리곤 머쓱하게 웃었다. 정환이 무슨 잔소리를 할지 몰라 몇번이나 말을 가로막았다. 아니. 진짜 별 건 아닌데요. 하필 팔을 다쳐서 연락하기가 어렵더라고요. 형도 학교에 있을 테니까…….

“어디 병원.”
“네? 형 진짜 저 괜찮아요.”
“어디 병원."

목소리 톤을 보아 단단히 화가 난 게 분명했다. 무서워. 도훈은 또 다시 뜸을 들이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거리 쪽 응급실……. 도훈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정환은 전화를 끊고 담을 넘었다. 이번에도 역시 자신을 쫓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꼭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겁이 났다. 자신에게 기적에 가까운 행운이 들이닥친 것처럼, 도훈에게도 그런 불운이 찾아올까 봐. 자신은 그런 거 바라지 않았다. 세상이 내가 바라는 대로 굴러간다면, 이런 일은 생겨선 안된다고. 이 와중에도 야속한 신호등은 제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착실하게 초록빛으로 바뀌었다.
응급실에 도착한 정환은 대기 의자에 앉아 출입문을 노려보았다. 보호자가 아닌 남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다. 도대체 김도훈은 언제 나오는가. 문이 열릴 때마다 슬쩍 보이는 응급실 내부를 엿보며 도훈과 닮은 머리통을 찾았다.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고. 우스갯소리 같지만 운수 좋은 정환에게는 실제로 통하는 이야기다. 머리 속으로 김도훈. 김도훈. 이름을 몇번이나 외웠을까. 정환이 이렇게 애타게 도훈을 찾으니 하늘이 또 도움의 손길을 내려주었다.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았음에도 금방 출입문이 열리고 도훈이 걸어 나왔다. 한쪽 팔에 깁스를 한 채로.

“형?”

대답할 새도 없이 빠르게 걸어 도훈의 뺨부터 붙잡았다. 뺨에 흉터가 모나게 자리 잡고 있다. 속상해 눈물이 돌 지경이다. 도훈이는 얼굴이 자산인데……. 그런데도 도훈은 멀쩡하다며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였다. 실수로 팔 부분을 움직일 때마다 엄청나게 인상을 쓰면서도, 괜찮아요! 하고 웃었다. 도훈은 늘 그렇게 웃었다. 웃을 상황이 아닐 때에도.

“넌 왜 자꾸 웃어?”
“네?”
“왜 웃냐고. 아프잖아.”

정환은 꼭 제가 더 아픈 사람처럼 도훈의 팔을 보았다. 도훈은 그제야 억지로 움직이던 몸을 멈췄다. 왜 웃냐니. 웃으면 복이 온다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으니까. 복도 지지리 없는 도훈이 할 수 있는 일이 그밖에 더 있나. 그러나 그런 생각들을 말로 뱉지는 않았다. 제가 생각해도 바보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존나 아프다. 뼈에 금이 갔는데, 어떻게 안 아플 수가 있겠어. 그래도 사고에 비해서 크게 다친 건 아니니까. 운 좋은 거 아니에요? 갑자기 상가에서 간판이 떨어지는데, 안 죽은 게 어디야. 간판? 도훈이 가볍게 흘린 말에 정환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김도훈이 죽을 수도 있었다. 고작 타고난 운이 더럽게 없다는 이유로. 그렇기에 더는 참을 수가 없다.
…….
정환이 막무가내로 도훈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형. 여기 병원인데…….”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돌아보니, 이번엔 대기 중이던 환자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제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자각한 정환은 병원 밖으로 뛰쳐나갔다. 쪽팔려 죽을 것 같다. 그럼에도 마음이 놓이는 건, 도훈과 다시 한번 키스를 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도훈이 정환을 뒤따라 나왔다. 그러고 나가버리면 어떡해요. 쪽팔려 죽는 줄. 도훈의 귀 끝이 새빨개져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환이 대뜸 주먹을 쥐어 보였다.

"가위바위보 하자."
"갑자기 무슨."
"가위 바위–."

보. 그 소리에 도훈은 관성처럼 손을 내밀었다. 도훈은 보. 정환은 주먹. 그런데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정환은 다시 가위바위보를 제안했다. 세 판을 전부 지고 나서야 정환은 안심했다. 이제 도훈에게 불운이 닥쳐 팔이 아작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앞으로 키스 같은 건 절대 안 해줄 거니까. 도훈의 입장도 듣지 않고 멋대로 생각했다. 또 멋대로. 도훈은 한쪽 팔을 뻗어 정환의 어깨를 잡았다.

"또 운 때문에 이러는 거죠?"
"응. 너 다치는 걸 내가 어떻게 봐."
"그럼 저는요? 저도 형이 다치는 거 싫어요."
"이제 내 말 믿어?"
"네. 믿어요. 저 그날 이후로 되는 일이 없거든요."

넘어지는 건 기본. 키스하자마자 물벼락을 맞지 않나. 축구를 하다가도 농구공에 얻어맞고, 급식실에서는 한눈 팔던 녀석을 발견하지 못해 음식물을 뒤집어쓰기까지 했다. 그렇게까지 겪고 나니 정환의 말이 헛소리가 아니라는 건 알겠다. 그래서 뭐. 도훈은 제 불행을 정환에게 다시 뒤집어씌우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했으면 하는 건 당연한 마음이잖아. 그런데도 정환은 또 제멋대로 키스를 해버렸고 멋대로 자신의 불운을 모두 가져가려고 하니까.

"그냥 매일 키스하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공평하게 하자고. 이 행운과 불운이 누구의 것인지 운명도 헷갈릴 만큼 아주 많이.
도훈은 또 입을 맞췄고 정환도 지지 않고 한 번 더 입술을 부딪혔다. 한번, 두 번, 세 번…… 몇번이고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틈을 타 도훈이 조금 더 깊숙이 정환을 파고들었다. 혀끝이 닿는다. 정환도 이런 건 해본 적이 없는데. 생경하고 이상한 감각에 정환이 급히 눈을 뜨며 도훈을 밀어냈다. 쉬지도 않고 입을 맞춰댄 탓에 호흡이 고르지 못 하다. 마찬가지로 도훈도 숨을 몰아쉬고 있는 주제에 여유로운 척 웃었다.

"이제 형도 모르겠죠?"
"……."
"그러니까 한 번 더 해요."

도훈이 또 다시 무섭게 입을 맞춰왔다. 단순히 입을 맞추는 게 아니라, 난생처음 해보는 진짜 키스. 머리가 멍해질 만큼 기분이 좋다.

 


*
"도훈아. 나 어릴 땐 너구리에 다시마가 원래 두 개인 줄 알았어."
- 저는 원래 다시마 없는 줄 알았어요.
"근데 다시마가 한 개야. 어떡해?"

큰 일이라도 난 것처럼 전화를 하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최근 정환은 이런 사소한 일로 자신의 운세를 점을 치기 시작했다. 점점 도훈과 정환의 삶이 별반 다르지 않게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도훈은 더 이상 신발 끈이 풀려 넘어지는 일이 없고, 정환은 모르는 문제를 찍어 맞추는 일이 없다. 그래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고작 너구리 봉지를 까는 일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 개가 나오다니.

"이상하잖아. 아예 없거나, 두 개가 있어야 하는데."
- 그러네요.
"너 오늘 좋은 일 없었어?"
- 음…… 형한테 전화 온 거.
"그런 거 말고."
- 그거면 충분한데요.

이제 그런 거 의미 없잖아요. 불안하면 저희 집 와요. 또 하면 되지. 도훈은 그렇게 말하며 웃어 넘기려 했으나, 정환은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게,

"나 오늘 수능이란 말이야."

평소같으면 이렇게까지 진지하진 않았을 텐데. 수능이 걸려있으니 쫄리기는 한가보다. 그러게 평소에 공부 열심히 해둘 걸. 열심히 살 이유가 없었던 과거의 정환에게 따져봤자 힘만 빠지는 노릇이었다. 정환은 너구리 봉지를 까던 것을 멈추고, 별자리 운세를 확인했다. 그게 마지막 희망이었다. 제발…….
오늘의 운세 1위.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돌아오는 날이야! 마지막까지 화이팅.
1위다! 이거면 충분하다. 정환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수능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별자리 운세 1위답게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날씨도 좋고, 머리도 잘 돌아가고, 고사장 내에는 빌런 하나 없이 쾌적하고 고요했다. 그러니까 당연히 성적도 좋아야 하는데. 9모처럼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더라도 1등급은 무리 없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환은 이번에도 제 성적을 믿을 수 없어 가채점을 몇번이고 다시 해봤으나, 처참한 숫자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망했다. 대충 찍어버린 문제들이 전부 오답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찍은 문제가 절반이 넘는다는 점. 정환은 다시 한번 더 오늘의 운세를 확인했다. 여전히 1위. 그러나 정환이 놓친 문장이 하나 있다.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돌아오는 날이야. '노력한 만큼'
아. 정환은 그제야 무엇이 문제였는지 깨달았다. 이미 늦었지만.

"도훈아. 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지나치게 좋은 운을 빼고 나니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한 번도 노력해 본 적이 없기에 운빨마저 사라지면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인간이라. 12년간 하지 않았던 공부를 단 1년 만에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성인이 되자마자 로또를 사서 평생 놀고 먹으려던 계획도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형 혹시 후회해요? 저 만난 거."

한참이나 인생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던 중 불쑥 도훈이 끼어들었다.

"아니."

정환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게 다 저 때문인 것 같아서요."
"그런 거 아냐."
"형한테 방해가 되면 언제든 저 버려도 돼요."
"……."
"그래도 노력하는 방법은 알려드릴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도훈이 허리를 숙였다. 그리곤 언제 풀어졌는지 모를 정환의 신발 끈을 단단히 묶었다.

"신발 끈이 자꾸 풀어지면, 그냥 꽉 묶으면 되는 거에요."

그 말에 문득 기억이 났다. 처음 도훈의 번호를 땄을 때의 쾌감. 그건 제가 노력으로 이룬 첫 번째 일이었다. 그래. 그거면 충분하다.

"데려다줄게."

정환은 익숙하게 도훈의 손을 잡아끌었다. 더 이상 행운이니 불운이니 따질 여유가 없다. 어떤 행운보다 값진 게 바로 눈앞에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