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여름
윰
뜨거운 땡볕 아래 화려한 발재간을 따라 축구공이 이쪽저쪽으로 튀었다. 도훈은 축구공을 친구삼아 울퉁불퉁 고르지 못한 길을 걸었다. 초록색 철문을 지날 때 마침 민식이 문을 열고 나왔다. 하이 도훈. 엉 하이. 같은 교복을 입은 두 남학생이 서로 축구공을 주고받으며 학교로 향했다.
“오늘 끝나고 축구할 거? 비 온다던데.”
“비 오는 날 축구가 찐인 거 모르냐.”
빠앙
자동차 클락션 소리에 놀란 도훈이 제게 오는 축구공을 받지 못했다. 도훈의 발을 지나 굴러간 축구공이 그대로 논두렁으로 쏙 빠지고 말았다. 아씨. 오늘 흰 운동화 신었는데. 눈썹을 잔뜩 구기고 바로 뒤까지 따라붙은 차를 노려봤다. 시골 깡촌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마크를 달고 있는 차는 한눈에 봐도 값이 꽤 나가 보였다.
“학생들 조금만 옆으로 비켜줄 수 있겠니?”
처음부터 말로 하던가. 낯선 외지인에 도훈이 잔뜩 경계 했다. 민식과 함께 옆으로 물러나자 검은 세단이 소음도 없이 미끄러지듯 두 사람을 지나쳐 갔다.
“와 차 개멋있다.”
도훈이 논두렁 아래로 내려갔다. 경사진 곳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구정물에 빠진 축구공을 손에 쥐려 안간힘을 썼다. 민식. 나 좀 잡아줘. 논두렁 밖으로 한쪽 팔을 뻗고 좀 더 안정감 있게 자리를 잡았다. 나이스 캐치. 민식의 도움을 받아 도훈이 무사히 축구공을 손에 쥐고 올라왔다. 축구공을 내려 놓자 땅에 퉁 튀어 오르며 구정물이 튀었다. 하얀 운동화에 결국 얼룩이 생기고 말았다.
“야. 니 트렉터가 더 간지야.”
조금 전 그 차만 아니었다면 축구공이 논두렁에 빠질 일도 하얀 운동화가 더럽혀질 일도 없었을 텐데 도훈은 짜증이 났다.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또 다른 낯선 이의 얼굴이 보였던 거 같기도 한데. 대체 누구길래 저런 비싼 차를 타고 아침부터 이 시골을 찾아온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이미 저 멀리 사라진 차 꽁무니를 보며 민식이 말했다. 저거 혹시 우리 학교로 가는 건가?
“그런가.”
도훈이 관심 없는 말투로 답하며 다시 축구공을 튕겼다. 그러고 보니 방향은 학교가 맞는데…. 정씨 할머니 슈퍼마켓 앞 정류장에서 내린 후 학교로 향하는 길은 이곳이 유일했다. 학교를 지나쳐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지만 조금 전 뒷자석에 앉아있던 얼굴이 떠올랐다. 도훈이 제대로 본 것이 맞다면 분명 그는 같은 또래 남자아이였다. 뭐 이따가 알게 되겠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을 지워냈다. 학교까지 시합 콜?
“진 사람이 아이스크림 사기.”
도훈이 축구공을 손에 쥐며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매번 지는 내기를 대체 왜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오늘은 어떤 아이스크림 먹을까 속으로 생각하며 콜을 외쳤다. 하나둘셋 하면 뛰는 거다.
하나
두울
세, 야 김도훈!!
정원 20명인 하나뿐인 고등학교는 도훈의 학년인 1학년이 과반수를 차지했다. 해마다 줄어드는 출산율과 시골을 떠나 도시로 향하는 젊은 부부들이 늘면서 학생 수 역시 점점 줄어들었다. 그 때문인지 3학년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작년까지는 한두 명 있던 거 같은데 현재 전교생은 1학년 17명과 2학년 3명이 전부였다. 학생 수만큼 줄어든 교사로 인해 올해부터는 전교생이 한 교실에서 수업을 진행했다.
이른 아침부터 기승을 부리는 뜨거운 햇빛에 도훈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른 땀방울이 턱 끝에 대롱대롱, 어…? 아까 봤던 애다.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타이밍 좋게 담임이 들어왔다.
“자, 자. 얘들아 조용하고 제 자리에 앉자.”
교탁을 내리치는 소리에 시선이 일제히 한 곳을 향했다. 담임 옆에는 검은 세단 뒷자석에 앉아 있던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큰 키만큼 길게 뻗은 팔다리와 보고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얼굴에, 여기 시골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새하얀 피부까지. 곱상한 외모는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오늘부터 우리랑 같이 지낼 전학생이야. 네가 소개할래?”
남자아이는 담임이 한 발짝 물러나자 쭈뼛쭈뼛 교탁 앞에 섰다. 제게 몰린 수십 개의 시선에 창백할 정도로 하얀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어… 나는, 서울에서 왔고… 18살, 신정환이라고 해… 잘 부탁해….”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는 시선과 떨리는 목소리가 겁에 질린 작은 동물마냥 안쓰러웠다. 듣기로는 서울 애들은 다 깍쟁이라던데 아닌 애도 있구나. 짧은 인사에 귓바퀴까지 빨개진 얼굴이 담임을 쳐다봤다.
“다들 박수로 환영해 주자.”
박수 소리가 교실에 울리자 바닥을 향한 시선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툭툭. 어깨를 두드리는 다정한 손길에 정환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정환이 자리는, 저기 일 분단 맨 뒤. 반장 옆에 앉자.”
담임에게 꾸벅 인사하는 예의 있는 행동에 도훈은 조금 놀랐다. 쟤, 아니 저 형 진짜 서울 사람 맞아? 어쩜 저렇게 심성이 고울 수가 있지? 정환의 움직임을 따라 도훈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 바로 앞에 정환이 멈춰 섰을 때 도훈은 바보처럼 입을 벌린 체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었다.
“나 여기 앉아도 돼…?”
“아, 어, 어. 앉아도 돼.”
도훈이 빈 책상 위에 놓인 가방을 재빨리 치웠다. 가까이서 보니 더 하얗고 고운 게… 예쁘다. 그래, 예쁘다. 정환에게 이 말이 딱 어울렸다. 가방을 정리하고 1교시 교과서를 꺼내는 모습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교과서를 넘기는 손끝이 차림새만큼 단정했다. 남자 손이 어쩜 저렇게 하얄 수가 있는지 도훈의 눈에 정환은 저와는 다른 세계 사람 같았다.
“수업 어디서부터야?”
멍하니 정환의 행동을 지켜보던 도훈이 자신을 향한 목소리에 놀라 시선을 거뒀다. 아, 그게 어, 그… 잠시만. 허둥지둥 책상 서랍에 손을 넣어 교과서를 꺼내 들었다. 여기. 74페이지. 고마워. 어, 어…. 살가운 말투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정보로는 서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남에게 관심 없고 말투나 억양도 매우 거칠다고 했다. 또한 개인적인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주변에 사람을 잘 두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랬는데. 분명히 민식이새끼가 그랬는데. 정환은 달랐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급식 당번인 철수와 준호가 교실 안으로 급식차를 끌고 왔다. 하나둘씩 급식차로 모여드는 학생들 사이 정환이 쭈뼛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모든 게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식사하는 모습도 정환에게는 낯설었다. 남들이 하는 대로 급식을 배분받아 자리로 돌아왔다. 숟가락을 막 손에 쥐었을 때 도훈과 민식이 각각 옆자리와 앞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리 학교 급식 어때?”
“야, 야. 형이야.”
“나도 알어. 말 놔도 되지? 같은 반인데.”
“어? 엉….”
“형네 학교 급식에도 이런 거 나왔어? 분홍 소시지.”
“응.”
“근데 이거 소시지 아니래. 이게 뭐로 만든 거냐면,”
“야 그만하고 밥이나 먹어.”
알긋다. 민식이 분홍 소시지를 입에 넣으며 정환을 향해 눈짓했다. 무언가 한차례 휩쓸고 간 기분이 들었다. 정환은 아직까지 숟가락만 들고 한 술도 뜨지 못했다. 어색하긴 해도 혼자 먹는 거보다야 훨씬 났다고 생각했다. 마싯, 맛있게 먹어. 늘 하던 대로 식전 인사를 건네고 밥을 떠올렸다. 드디어 한입 가득 넣는 순간.
“너 왜 그러냐.”
콜록콜록
사례가 드린 것인지 도훈이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기침을 해댔다. 가슴까지 내리치며 기침을 토해내는 것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장난이 아니라는 걸 인지한 민식이 재빨리 자리로 돌아가 물병을 들고 왔다.
“야 도훈. 얼음 별로 안 녹았는데 이거라도 마셔.”
도훈이 급하게 물을 들이켰다. 기침은 멎었으나 빨개진 얼굴은 여전했다. 민식. 나 물 좀만 더 떠주라. 민식도 걱정이 된 것인지 도훈의 부탁에 곧장 교실을 빠져나갔다. 민식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도훈이 흠흠 목을 한 번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원래, 말투가 그런가… 형은?”
“나? 내 말투가 왜…?”
상냥하고 다정하고 또… 귀엽고. 도훈은 차마 내뱉지 못할 말을 속으로 삼켰다. 친구끼리 식전 인사하는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 봤다. 밥 먹는데 뭔 낯간지럽게 서로를 챙기나 각자 밥 먹기도 바쁜데. 저를 빤히 쳐다보는 얼굴을 힐끔. 양 볼 가득 음식을 물고 쳐다보는 얼굴에 화르르 다시 열이 올랐다.
“너 진짜 괜찮은 거야?”
어느새 물병 가득 물을 담아온 민식이 걱정스런 말투로 물었다. 도훈은 괜찮다 답한 후 식판에 코를 박고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아침부터 어딘가 모르게 이상한 도훈의 행동에 정환은 의문이 들었지만 금세 잊고 분홍 소시지를 입에 밀어 넣었다. 실은 처음 먹어보는 반찬이었지만 입맛에 꽤 잘 맞았다.
점심 식사가 끝난 후 학교를 구경 시켜준다는 도훈의 말에 정환이 따라나섰다. 학생은 몇 없지만 있을 건 다 있는 보통의 학교와 똑같았다. 단 한 가지 없는 것이 있다면 바로 매점이었다.
“매점은 없네.”
“매점? 당연하지. 학교잖아.”
동네 슈퍼도 하나밖에 없는 시골 마을 학교에 매점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처음부터 매점의 존재를 경험하지 못한 학생들은 딱히 불편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흠…. 입술을 삐죽이는 정환을 도훈이 빤히 쳐다봤다.
“선생님한테 만들어 달라고 할까?”
도훈의 말에 땡그래진 눈이 이내 살풋이 접혔다.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닐뿐더러 말 한마디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만큼 저를 신경 써주는 도훈이 고마웠다.
“아니야, 괜찮아.”
“그래도 말은 해볼게.”
학교를 둘러본 후 두 사람은 교실로 돌아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로에게 꽤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밖에서 한바탕 뛴 것인지 땀을 뻘뻘 흘리는 아이들이 종소리에 맞춰 교실로 뛰어 들어왔다. 그들 중 가장 마지막에 들어온 민식이 크게 외치며 자리에 앉았다. 나이스 타이밍!
7교시가 끝나는 종이 울리자 교실이 시끌벅적했다. 서울 학교와 또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은 야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수업인 7교시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는 게 평천읍 학생들의 일과였다. 도훈과 몇 명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며 방과 후 시간을 보냈다.
“도훈. 오늘 형만이 집에 간다는데?”
“형만이 왜.”
“몰라. 엄마가 빨리 오랬대.”
가방을 챙겨 든 도훈이 교실 열쇠를 찾았다. 수업이 끝난 후 문단속은 반장인 도훈의 몫이었다. 제대로 잠겼는지 확인 후 교무실로 내려가니 담임이 정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열쇠를 걸어두고 꾸벅 목례 후 교무실을 빠져나왔다. 운동장에는 민식을 포함한 세 명의 아이들이 더 있었다. 도훈은 더위도 잊은 채 아이들을 향해 달려갔다.
“오늘 그럼 민식이 네가 깍두기 해.”
철수의 말에 민식이 싫다며 소리를 빼액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훈은 공을 굴리며 골대로 달려갔다. 왼발 슛. 어? 흔들리는 골망 뒤로 정환이 지나쳐갔다. 고개가 정환을 따라 움직였다. 정문을 빠져나가는 정환의 모습을 지켜보던 도훈이 스탠드 계단으로 달려갔다.
“야 얘들아 나도 오늘 먼저 간다! 축구공은 민식이 네가 알아서 챙겨라!!”
스탠드 계단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가방을 손에 쥐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제발 정환이 멀리 가지 않았기를 속으로 빌면서 그렇게 정문을 향했다. 정문을 빠져나왔을 때 다행이 시야에 정환이 들어왔다. 어찌나 걸음이 빠른 지 벌써 저먼치 앞서가고 있었다.
“형! 정환이 형!!”
아무리 불러도 정환은 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귀가 먹었나. 이렇게 크게 부르는데.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견디며 더욱 빠르게 달렸다.
“혀엉!!”
어깨를 잡는 손길에 정환이 놀라 돌아봤다. 분명 조금 전까지 운동장에서 공을 차던 도훈의 등장에 적지 않게 놀란 듯했다. 도훈이 숨을 고르는 동안 귀에 꽂고 있던 무선 이어폰을 빼 케이스에 정리했다.
“내가 몇 번을 불렀는데.”
“미안. 노래 듣느라 몰랐어.”
달리기로 인해 세차게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도훈이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정환이 물음표 가득 담긴 얼굴로 도훈을 쳐다봤다. 근데 왜?
“아니 방향 같으면 같이 가자고.”
이 말이 뭐라고 이렇게 쑥스럽지. 도훈이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정환과 눈을 맞췄다.
“그래.”
돌아오는 대답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두 사람은 함께 꼬불꼬불 골목길을 걸었다. 그런데 잠깐.
“형 집에 가는 길 알아?”
“응. 지도 보면서 가고 있었어.”
정환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화면에는 내비게이션 앱이 실행되고 있었다. 560미터 앞 좌회전. 그쯤이면 아마 정씨 할머니 슈퍼마켓쯤이지 않을까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뜨거운 땡볕 아래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운동화에 흙이 쓸리는 소리, 자갈이 부딪치는 소리가 두 사람과 함께했다.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달려오던 도훈이 내내 아무 말이 없자 정환은 궁금해졌다.
“근데….”
“어?”
도훈이 기다렸다는 듯이 정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리쬐는 햇빛에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 알 수 없는 채로.
“너 축구하던 거 아니었어?”
“아… 어, 맞는데….”
더워서 그냥 집에 가려고. 도훈의 말에 정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 다시 정적이 흘렀다. 볼을 스치는 뜨거운 바람이 꼭 나쁘지만은 않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새 소리와 함께 정환의 휴대폰에서 내비게이션 안내음이 들려왔다. 잠시 후 좌회전입니다. 정씨 할머니 슈퍼마켓 앞에서 도훈은 버스를 기다려야 했다. 하루에 3번밖에 운행하지 않아 시간을 잘 맞춰야 했다. 당연히 정환도 버스를 탈 거라 생각하고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정환은 정류장을 지나쳐 슈퍼마켓으로 들어갔다. 도훈이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버스가 오기까지 2시간은 기다려야 했다. 매번 축구하느라 시간 텀이 이렇게나 긴 줄 몰랐다. 뒤늦게 정환을 따라 슈퍼마켓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고. 김 씨네 막둥이 아니냐.”
“안녕하세요, 할머니.”
누구네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서로 알 정도로 작은 마을에 정씨 할머니는 도훈 또래 아이들에게 유독 살가웠다. 그래서인지 정씨 할머니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어른 중 한 분이었다.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는 와중에도 도훈은 눈을 굴려 정환을 찾았다. 크지 않은 슈퍼마켓을 빠르게 훑었지만 정환은 보이지 않았다.
“뭐 찾는겨?”
“그게 아니라요 할머니,”
“나 여기 있어.”
슈퍼마켓 안쪽 할머니께서 지내는 곳에서 정환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우리 손자랑 친구인겨? 푸근하게 웃는 얼굴이 지금 보니 정환과 닮아 보였다. 들어가서 감자 좀 먹고 가. 할머니 말에 정환이 도훈을 향해 손짓했다. 낯선 공간에 들어서면서 도훈이 쭈뼛거렸다. 한 칸짜리 넓은 방 안에는 세월의 흔적이 가득했다.
“여기 앉아.”
정환이 도훈의 앞으로 선풍기를 밀어줬다. 요즘 시대 에어컨이 많이 보편화되었지만 아직 곳곳에는 선풍기 하나로 여름을 보내는 집이 많았다.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감자 한 개를 입에 넣었다. 앞에 앉은 정환이 껍질을 하나하나 까고 있었다. 껍질을 싫어하는구나. 도훈은 껍질째 크게 한입 베어 물며 정환을 관찰했다. 가늘고 긴 손가락과 저와 대조되는 하얀 피부에 눈길이 갔다. 껍질을 까던 중 감자 부스러미가 묻은 손가락을 입가로 가져갔다. 도훈의 시선이 손가락을 쫓았다. 정환의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급하게 감자를 내려놓은 후 선풍기를 조정했다. 고정에 맞춰 놓은 버튼을 회전으로 바꿔놓았다.
“그거 망가졌어.”
저를 향한 채 미동도 없는 선풍기를 한번 정환을 한번 쳐다봤다. 껍질을 반쯤 깐 감자를 정환이 와앙 입에 물었다. 우물거리는 얼굴을 멍하니 쳐다봤다. 땀으로 반지르르한 얼굴에 붉은 홍조가 눈에 띄었다.
“선풍기, 형 해. 난 괜찮아.”
도훈이 정환 쪽으로 선풍기를 돌려주었다. 고마워. 얼마 먹지도 않은 거 같은데 양 볼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후덥지근한 공기와 다 식어 퍽퍽한 감자 그리고 두 사람. 탈탈탈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
정환의 집 방문 후 두 사람은 부쩍 가까워졌다. 학교가 끝나고 축구는 절대 빼먹는 일이 없던 도훈이 이리저리 핑계를 대고 빠지는 날이 늘어갔다. 그때마다 도훈은 정환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슈퍼마켓 앞 평상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다든지 멀지 않은 계곡에서 발을 담그고 있다든지 자전거를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돈다든지 평범하지만 도훈에게는 정환과 함께하는 매 순간이 특별했다.
그중 도훈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자전거 타고 정환과 함께 동네를 도는 것이었다. 때로는 서로 경쟁하며 푸른 논이 드리운 좁은 길목을 나란히 달릴 때 설명할 수 없는 설렘을 느끼곤 했다. 혀엉! 같이 가! 앞서가는 정환을 향해 소리쳤다. 돌아보는 얼굴에 환한 웃음이 걸려있다. 흩날리는 머리마저 아름답다. 아마도 첫사랑이었다.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었다. 야외 활동으로 전교생 모두가 근처 바다로 향했다. 준비물은 카메라. 어떤 종류든 상관없었다. 풍경 또는 인물을 찍어 느끼는 감정을 적어 제출하는 것이 오늘의 수업이었다. 도훈은 아버지께서 쓰시는 디지털카메라를 챙기려다가 필름 카메라를 손에 쥐었다. 필름을 인화해 간직하는 것이 더 낭만이라 생각했다.
야외 활동 내내 두 사람은 함께였다. 풍경도 찍고 모래 위를 빠르게 기어가는 작은 게도 찍고 보이는 대로 셔터를 눌렀다. 자리를 이동하며 사진을 찍다 보니 아이들과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까지 오게 되었다. 한적하고 조용한 곳에서도 두 사람은 사진 찍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형. 한 장 찍어 줄까?”
“음… 그래.”
도훈의 말에 정환이 바다를 배경 삼아 섰다. 누군가의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오랜만이라 살짝 어색했다.
“조금만 더 뒤로.”
“뒤로?”
“지금 좋다. 찍을게.”
하나, 둘, 셋. 플레시가 팡 터졌다. 섬광이 눈에 아른거렸다. 정환은 순간 잘 나왔느냐 물을 뻔했다. 디지털카메라와 달리 필름 카메라는 인화하기 전까지 결과물을 알 수 없었다.
“잘 나왔어, 형.”
그런 정환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도훈이 필름 레버를 감으며 말했다. 사실 결과물에는 크게 관심 없었다. 도훈이 보는 내 모습이 궁금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나뭇가지에 앉은 작은 새를 마지막으로 도훈은 필름을 모두 사용했다. 형. 얼마나 남았어? 정환 역시 필름 카메라였다. 남은 필름 개수를 확인했다.
“나도 다 썼어.”
“그럼 가자.”
“그래.”
두 사람은 다시 바닷가로 걸음을 옮겼다. 마침 담임이 홈페이지에 과제 올리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었다. 두 사람을 향해 민식과 아이들이 다가왔다. 끝나고 뭐 할 거냐 묻는 말에 도훈과 정환의 눈이 마주쳤다.
“당연히 과제 해야지.”
“뭔 과제야. 놀자.”
오늘은 정환이 도훈의 집에 놀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민식과 아이들은 모처럼 일찍 끝나는 날인데 읍내에 나가자며 두 사람을 꼬셨다. 도훈은 고민할 것도 없이 오늘은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여러 개의 시선이 정환에게로 향했다.
“나도 오늘 할머니 도와드리기로 해서… 미안.”
아이들의 아쉬운 소리가 들렸지만 오늘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월요일에 보자. 도훈이 정환을 데리고 그 틈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먼저 정환의 집에 들러 필요한 용품과 옷가지를 챙겼다. 원래 계획은 오늘 하루만 머물다 돌아오는 것이었는데 자고 가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정씨 할머니께서 한가득 안겨주는 간식을 챙겨 함께 도훈의 집으로 향했다.
파란색 철제 대문을 들어서는 얼굴에 긴장이 가득했다. 아무도 없다는 걸 아는데도 첫 방문이라 그런지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매달 마지막 주 금요일부터 주말까지는 도훈이 혼자 지내는 날이었다. 도훈의 부모님께서는 달 마다 서울에 올라가 농작물을 판매했다. 정환이 도훈을 따라 작은 마당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섰다. 챙겨온 짐을 내려두고 게임기부터 켰다.
한참 게임을 한 후 출출함에 라면을 끓여 먹기로 했다. 손님은 앉아 있으라는 말에 정환이 거실에 앉아 도훈의 행동을 지켜봤다. 혼자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갑자기 돌아보는 도훈과 눈이 마주쳤다.
“형. 라면에 달걀 넣어?”
“어… 엉.”
“오케이 그럼 두 개.”
다시 또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맛있는 냄새가 거실까지 퍼져 올 때쯤 도훈이 작은 상을 들고나왔다. 일단 비주얼은 합격. 적당한 국물과 풀어지지 않은 달걀이 먹음직스러웠다. 도훈이 정환의 그릇으로 라면을 덜어주었다.
“잘 먹을게.”
“형 진짜 맛있을 거야. 나 라면 진짜 잘 끓이거든.”
뜨거운 면발을 후후 불어 입에 넣었다. 도훈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적당히 꼬들꼬들한 면발이 정환의 입맛을 돋우었다. 국물과 함께 달걀도 맛보았다. 모양을 유지한 달걀은 노른자까지 맛있게 익어있었다.
“어? 비 온다.”
도훈의 시선을 따라 정환이 고개를 돌렸다. 아침부터 흐릿하더라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야무지게 밥까지 말아 먹은 후 두 사람은 한 손에 아이스크림을 쥐고 처마 밑에 앉았다. 정환은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젖은 흙냄새와 풀냄새가 기분을 맑게 했다. 비 덕에 사그라든 더위와 달달한 아이스크림까지. 정환이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였다.
“도훈이 너는 비 좋아해?”
“응. 형 비 오는 날 축구해 봤어? 기분 진짜 좋아.”
들뜬 목소리에서 도훈의 기분이 잔뜩 묻어났다. 마치 꼬리를 마구 흔들며 빗속을 뛰어다니는 강아지 같았다. 형은? 비 좋아해? 나? 저를 빤히 쳐다보는 도훈과 눈을 맞췄다. 올곧은 눈빛이 반짝 빛나고 있었다.
“좋아해.”
커다란 눈이 더 커지며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이내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고개를 획 돌린 도훈이 정면을 응시하며 아이스크림을 우적우적 씹었다. 까만 머리칼 사이로 삐져나온 귀 역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타고 젖은 흙냄새가 코끝에 스쳤다. 비 내리는 여름을 도훈은 가장 좋아하게 됐다.
이른 아침부터 휴대폰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휴대폰 너머 들리는 목소리는 정씨 할머니였다. 짧은 통화를 끝으로 정환은 세수도 하지 못하고 짐을 챙겼다. 월요일에 보자는 인사와 함께 대문이 닫혔다. 오늘은 함께 읍내에 놀러 가기로 했는데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도훈은 아쉬운 마음에 정환이 떠난 대문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
버스에서 내린 도훈이 슈퍼마켓 문 앞을 기웃거렸다. 이쯤 되면 정환이 나와야 하는데 5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유리문에 얼굴이 가까이 대고 안을 들여다봤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정씨 할머니네 슈퍼마켓도 문을 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알 방법이 없었다. 시간을 더 지체할 수 없던 도훈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좁은 길목에 들어서 슈퍼마켓을 완전히 지날 때 뒷문 사이로 언제 한번 봤던 검은색 자동차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와 같이 얼굴을 가까이하고 들여다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별일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도훈은 학교로 향했다.
1교시가 시작되고 점심시간이 되도록 정환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마지막 종이 울릴 때까지 도훈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한 도훈이 담임을 찾아갔다.
“얘기 못 들었니? 정환이 서울로 돌아갔어.”
“네…?!”
도훈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 어떠한 언질도 없었기에 지금 이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더랬다. 생각보다 놀란 모습의 도훈을 담임이 다독였다. 아마 정환이도 갑작스럽게 정해진 거라 얘기 못 했을 거야.
“야외 활동 과제 애들 다 제출했는지 확인하고 아직 제출 못 한 애들 있으면 내일까지 할 수 있도록 부탁할게, 반장.”
집에 오는 길에 확인한 슈퍼마켓은 여전히 굳게 잠겨있었다. 정환에게 전화를 걸어 봤지만 신호음만 갈 뿐 받지 않았다. 아침에 보낸 메시지에 숫자도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처마 밑에 앉아 내리는 비를 구경하던 모습이 이토록 생생한데 정환은 없었다.
울다 지쳐 잠에 든 도훈이 눈을 떴을 땐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낮에 담임이 한 말이 떠올라 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학생 수가 많지 않아 게시물을 확인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새 게시물 1개. 마지막 게시물을 확인하고 나니 게시물 한 개가 올라왔다. 정원 20명인 반에 게시물이 21개라… 도훈은 곧장 새 게시물을 열어보았다.
한눈에 봐도 누가 올린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게시물 속 사진은 바로 도훈이었다. 야외 활동 날 도훈의 집에 가기 위해 짐을 챙기는 정환을 기다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었다. 그 모습이 사진에 담겨 게시물에 올라왔다.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당장 휴대폰을 들어 정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이제는 신호조차 가지 않는 휴대폰 속 번호를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토요일 아침 서둘러 떠나는 정환에게 제대로 인사하지 못하고 보낸 게 너무나도 후회가 됐다. 누군가 제 심장을 손에 꽉 쥐고 있는 거처럼 고통스럽고 답답했다. 이별이 이토록 아픈 것인지 17년 인생 처음 알게 됐다. 벌겋게 짓무른 눈으로 게시물을 다시 또 확인했다. 끌어안은 베개가 흠뻑 젖을 때까지 도훈은 울고 또 울었다. 뜨거운 여름밤 도훈의 첫사랑은 그렇게 끝이 났다.
[ 너는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네 꿈에도 내가 있었으면 좋겠어. ]
소년의 여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