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과 입으로 다정과 사랑을 말하고
루트
하루 종일 이유 모를 우울함이 먹구름이 되어 정환의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굳이 따지자면 오늘만의 일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스스로 알아낼만한 우울함의 원인이 없으니 그것대로 답답해서 더 우울했다. 이럴 때면 집에 계신 엄마와 달리 다정한 말투로 기분을 물어오는 도훈의 어머니도 계시지 않으니 달랠 방법이라곤 냉동실에 쌓인 딸기 맛 아이스크림뿐이었다.
“또이, 아이스크림 먹을래?”
오늘도 책상 위 한가득 쌓인 초콜렛을 등지고 서 있는 김도훈. 이제 막 옷을 갈아입던 모양인지 중간에 걸린 티셔츠를 손끝으로 잡아 내리던 도훈은 아무것도 듣지 않은 사람처럼 제 할 일만 할 뿐이다. 이쯤은 이제 익숙한 풍경이어서. 익숙한 그 이름을 한 번 더 크게 부르는 대신 정환은 눈으로 도훈의 하는 모양새만 쫓는다.
조금 더 컸나…. 눈을 가늘게 뜨고 손을 들어 도훈의 머리끝이 걸린 즈음에 손바닥을 대어본다. 그리고 쭉 끌어와서 자신의 머리꼭지 위까지. 얼마 전까지 이마의 반까지만 오던 손이 이제는 제 머리끝과 나란하게 와 붙는다. 늘 같게 흐른다고 생각했던 시간 사이, 시야에 가득 차는 넓은 뒷모습과 책상을 번갈아보던 정환의 위로 먹구름이 가라앉는다.
사실은 안다. 이 우울함의 원인이 어떤 것인지.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아닐 거라 애써 외면하는 것일 뿐. 그렇게 혼자서 앓아온 시간이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만큼 한참 지나왔다. 알면서도 말로 꺼내어 인정하는 것과, 속으로만 담아두는 것은 천지 차이임을 안다. 그럼에도 선뜻 말로 꺼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는 확신을 가지고 싶어서. 먼저 돌아봐 주기를 주문처럼 외우며 제 몫과 도훈의 것까지 든 아이스크림은 흐르는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서서히 녹아가며 달큰한 향을 풍겼다.
성큼성큼 걸어 도훈에게 가까이 다가간 정환이 잠시 머뭇거린다. 바로 앞에 열린 창문 사이로 여름의 끝을 알리는 시원한 사람이 불었다. 팔랑팔랑. 그가 입은 옷의 짧은 소맷자락이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보며 정환의 마음도 조금씩 파도가 일렁인다.
좋아하는 게 맞는 것이라면.
여전히 제가 온 것을 모르고 등을 보이는 도훈의 다리를 톡톡 건드린다. 예상치 못한 인기척에 놀랐는지 움찔하는 어깨. 놀란 얼굴로 돌더니 정환을 보고는 이내 말갛게 웃으며 자연스레 입술로 향하는 시선이 시리다. 그 얼굴을 보고도 마음껏 좋아할 수 없어 정환이 인상을 쓴다. 짜증 나게 잘생겨서. 속삭이듯 작게 움직인 입 모양을 읽지 못했는지 들어 올리는 손에 끝이 녹은 아이스크림을 쥐여주었다.
그가 듣지 못하는 것에 안도하는 마음이 미안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던 날이 있었다. 사물함 가득 쌓인 초콜렛을 한 아름 들고 오거나, 누군가에게 고백의 쪽지를 받았다는 소문이 들리는 날엔 괜한 심술이 나 일부러 피하던 날도 있었다. 귀에 들리지도 않을 노크를 몇 번씩 하는 동안에도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정의 내리지 못한 감정을 억누르려 외면하기도 했다. 너는 동생이니까. 아주 작은 꼬마일 때부터 나보다 훌쩍 더 커버린 지금까지도 내가 지켜줘야 할 동생. 오랫동안 둘 사이를 엮어놓은 사실의 시간 속에서 홀로 마음에 싹을 틔운 감정을 문득 깨달아버렸을 때, 남들도 모두 겪는 그 감정이 정환은 배로 더 무겁게 느껴졌다.
“또이.”
-응?
“너 좋아하는 사람 없어?”
- …….
“나는 있어.”
하루를 온전히 밝힌 해가 저무는 시간. 도훈의 뒤로 붉은 노을이 서서히 하늘을 물들인다. 감정의 파도는 노을을 따라 붉은색을 입고 도훈의 앞에 닿고 싶어 넘실거린다. 서로의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은 마주한 이후로 아무도 먹지 않았다. 끈적함에 불편할 만도 한데, 누구도 방을 나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느새 둘은 앉은 채였다. 늘 그랬듯이. 도훈은 의자 위에, 정환은 도훈과 마주한 바닥에. 아까와는 다르게 천천히 입 모양을 크게 해 질문을 던진 정환과 입 모양을 읽은 도훈의 눈이 허공에서 겹친다. 같은 색으로 물든 눈동자에 어쩌면 비슷한 모양의 마음이 담겨있는 거 같은 착각이 들었다. 조금 전과도 분명 같은 눈인데, 마음속에 숨긴 그 말을 꺼내라고 꼭 재촉하는 것만 같다. 앉을 곳을 찾지 못하고 내내 부유하던 마음의 정착지를 알려주려는 듯, 노을의 붉은 빛이 방 안까지 스며 도훈의 등 뒤로 앉았다.
………이 물든다.
무엇이, 라는 고민은 이제 하지 않기로 한다.
“좋아해.”
입술 위로, 저보다 한참이나 작은 도훈의 손을 올리고 그 어느 때보다 한자 한자 힘주어 말했다. 짧은 세 음절의 말 정도이지만, 진심을 담은 단어 하나는 그 무게가 어느 만큼인지 감히 가늠할 수 없기에. 사랑이라 부르기로 한 감정의 무게까지 닿은 손으로 느껴주길 바랐다. 외면한다면 할 수 없지만. 도망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손을 통해 세상의 소리를 듣는 것이나 다름없는 그를 두고 도망치기엔 정환의 삶에 도훈이, 그리고 도훈의 삶에 정환이 차지하는 시간이 단단한 성벽처럼 쌓인 뒤였다.
좋아해. 한 번 끝낸 그 말을 다시 반복했다. 입술이 모이고, 펴지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며 만들어낸 세상에서 가장 특별하고 평범한 하나의 고백. 한숨 비슷한 숨을 토하면서 끝난 고백을 뒤로 하고 올려놓은 도훈의 손을 당겨 잡은 정환이 대답을 기다린다. 알 수 없는 눈. 말을 하지 않는 대신 시선만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던 도훈의 눈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답을 유추할 수 없다.
“도훈아.”
도훈아. 애타는 마음을 모아 한 번 더 불렀다.
얌전히 잡혀있던 손이 위치를 틀어 정환의 손목을 잡고 제 입술 쪽으로 끌어당겼다. 조금 전 정환이 했던 고백의 순간처럼. 긴장에 잔뜩 젖은 축축한 손이 말릴 새도 없이 도훈의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조금 가까워진 얼굴이 자신과 같아졌다고 느껴지는 건 이제 착각이 아니었다.
-나도.
나도, 좋아해.
서로의 손과 손끝부터, 막 사랑이 물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손과 입으로 다정과 사랑을 말하고
덜덜거리며 돌아가던 톱니바퀴가 멈췄다. 맞물려야 할 짝이 사라져서.
“신정환 소원 이뤘네.”
“뭐가.”
“너 도훈이 크면 연예인 시킨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잖아.”
“내가? 내가 그랬었다고?”
“기억 안 나는 척은 또 잘하네.”
얌전히 빨대가 꽂힌 딸기우유 하나가 정환의 책상 위에 오른다. 도훈이가 너 이거 꼭 챙겨주래. 잔뜩 시든 얼굴로 앉아 있던 정환이 우유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도훈의 이름을 듣자마자 빠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들어 올린다.
“너 도훈이랑 연락돼?”
“어. 그저께 연락 문자 왔던데?”
“아씨….”
“뭐야, 둘이 연락 안 해?”
몰라, 묻지 마. 조금 전까지 환하던 정환의 핸드폰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까맣게 어두워진다. 오늘 아침, 버스 정류장에서 몰래 찍었던 도훈의 사진도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새 핸드폰 배경화면까지 해놨네. 징하다 징해. 옆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애꿎은 투정을 고스란히 뒤집어 쓴 은호가 불만 가득한 정환의 얼굴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피식 웃을 뿐이었다.
하루아침에 도훈이 제 옆에서 없어졌다. 옆집, 같은 학교, 언제나 모든 생활을 같이 해왔기에 등하교도 자연스레 둘이었는데. 어떠한 통보도 없이 짝을 잃고 외로운 기러기 신세가 되었다. 덩그러니 혼자 익숙한 일상을 지내야 하는 정환에게 새로운 줄이어폰이 생겼다. 도훈과 함께 있을 때는 필요하지 않던 것이었다.
여느 때처럼 도훈을 데리러 들어간 방 안도 주인을 잃고 정환과 같은 모습이었다. 방 한편엔 도훈이 두고 간 같은 교복이, 책상 위엔 가지런히 가방이 놓여있었다. 혹시나 남기고 간 쪽지라도 있을까 싶어서 가방을 올렸다가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깨끗하게 정리된 방을 보며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애꿎은 핸드폰만 손에 쥔 채 당황한 표정이던 정환의 뒤로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닿았다.
정환아. 도훈이가 티비에 나오게 되었어.
먼 기억의 어딘가에 잠들어있던 어떤 날을 떠올렸다. 장래 희망을 적어 가는 도훈의 숙제에 제가 대신 연필을 잡고 꿈을 하나하나 적어주던 날을. 아나운서? (도리도리) 사장님? (도리도리) 축구선수? (도리도리) 그럼 뭐? 힘을 주어 꼭 쥔 연필로 하나하나 직업을 적었다 지우고, 적었다 지우길 여러 번. 깨끗했던 종이는 정환이 새겨놓은 글자의 잔재와 지우개로 더러워진 까만 것들이 어지럽게 섞여 쉽게 지워지지 않는 자국이 남았다.
한참 그것을 들여다보고서야 깨달았다. 제 옆에 가만히 앉아 적히는 단어마다 고개를 내젓던 도훈의 마음을.
조용히 일어난 도훈이 방 안으로 쏘옥 들어갔다, 제법 두꺼운 잡지를 품에 안고 나왔다. 정환도 익히 알고 있는 것. 도훈의 집에 놀러 올 때마다 도훈의 어머니가 소파에 앉아 넘기곤 하던 패션잡지. 미안한 마음에 팔자 눈썹으로 눈물이 그렁해진 정환을 두고 도훈이 책장을 넘기다 어느 멋진 남성 모델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거어. 입 모양으로 벙긋. 그 모양새를 본 정환이 맺힌 눈물을 벅벅 닦고, 지우개로 한 번 더 깨끗하게 종이를 지웠다. 그리고 가장 신중하고 조심히.
김도훈 장래 희망
모델
옛 영광을 다 잃어가던 향수 회사가 마지막으로 사활을 걸고 만들어낸 소년의 향수. the boy 라는 이름의 향수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소년은 나타남과 동시에 회사에 새로운 전성기를 가져다주었다. 이름도, 어디에 사는지도 모른 채 갑자기 나타나 한 회사를 살린 김도훈은 대외적으로 ’소년’으로만 불리며 일체 다른 곳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혜성처럼 나타난 존재를 알아내기 위해 연일 향수를 든 광고와 함께 연예 프로그램이 시끄러웠다.
그리고 거리의 곳곳에. 정환과 도훈이 나란히 옆집에 살던 동네의 버스 정류장에도 도훈의 사진이 걸렸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짙은 소년의 얼굴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감은 그의 모습. 함께 버스를 기다리며 시답잖은 손장난을 나누던 곳에서 십 년을 넘게 함께 했던 신정환‘만’의 소년을 세상 사람의 시선을 받는 김도훈으로 만났다. 어색했다. 하얀 이가 드러나도록 환히 웃던 얼굴이 아니다. 저를 보며 반짝반짝 빛나던 눈도, 개구진 표정도 없었다. 신정환이 아는 얼굴인데 아는 얼굴이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두어 걸음 뒷걸음질 치는 사이, 광고판 앞으로 우르르 몰려든 소녀들이 앞다투어 사진을 찍었다. 정환은 뒤에서 한참을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딱 한 장. 가까워지는 버스를 확인하고 도훈의 얼굴을 겨우 사진으로 남겼다.
짧은 쉬는 시간 동안 분주하던 교실의 분위기가 수업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림과 동시에 제 자리를 찾아가며 조용해졌다. 도훈의 부탁에, 은호가 매점으로 달려가 사 들고 온 정환의 딸기우유는 찬 기운을 공기에 빼앗겨 곽 위로 작은 물방울들이 맺힌다. 세상의 대부분이 이름조차 모르는 도훈을 유일하게 다 아는 것은 자신뿐임에도. 좋아야 할 마음이 하나도 좋지 않았다. 꼭 그 물방울들이 지난 며칠간의, 그리고 지금의 정환이 느끼는 기분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
꿈을 꿨다.
평범한 하루하루가 그랬던 것처럼. 집으로 돌아가는 길, 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버스 안. 그 버스 안의 제일 끝자리에 저와 도훈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은 사이로 파고든 것은 사이좋게 나눠 낀 정환의 줄 이어폰이었다.
우리가 언제 이어폰을 나누어 껴본 기억이 있었던가. 없다. 나눠 낀 이어폰은 도훈이 사라진 후 생긴 것이었다. 정환은 그 꿈에서조차 현실을 자각하려 애썼다. 꿈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익숙한 공간과 상황이 꼭 현실인 것 같아서. 제 옆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얼굴은 바깥의 현란한 네온사인의 색에 그대로 노출되어 여러 색으로 변했다. 노란색. 주황색. 붉은색. 그 모습이 마치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던 날의 노을에 물들어가던 도훈인 것 같아서. 온몸을 감싸고 덮쳐오는 긴장과 설렘에 자신의 큰 손에 빼곡히 들어오는 까만 손을 잡았다.
어디선가 작은 흥얼거림이 들려왔다. 나눠 낀 이어폰을 타고 들어오는 소리는 아니었다. 처음 들어보는, 하지만 낯설지 않은 허밍. 도훈의 소리였다.
“도훈아.”
“…….”
“도훈아?”
“응?”
너, 들려?
“응. 형 목소리 잘 들리지.”
그리고 이 노래도. 형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잖아.
도훈의 목소리를 상상해 본 적이 있다. 저와는 또 다른… 낮지만 가볍고 몽글몽글한 느낌. 티비 속 남자 연예인들을 보면서 저 사람의 목소리와 비슷할까, 아니면 다른 저 남자의 목소리와 비슷할까. 귀를 기울이고 상상 속의 목소리와 비슷한 것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정환의 상상 속 목소리를 만족시키진 못했다. 도훈의 목소리니까. 동생이자, 마음을 준 사람의 목소리를 정한다는 일을 이 세상에서 누가 또 할 수 있을까. 자꾸만 떠오르는 생각과 호기심을 이길 수 없어 혼자 고민하고, 이래도 될까, 싶은 마음에 다시 며칠 밤을 뜬눈으로 보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이런 제 모습을 알게 된다면 도훈은 어떤 표정을 할까.
정환이 꿈에서 깼을 땐 역시 같은 버스 안이었다. 아무도 없는 사람들. 늘 앉는 자리. 여러 빛이 들어오는 창가의 옆자리지만 지금은 혼자였다. 주머니 속 잠든 핸드폰을 꺼내어 불을 밝힌다. 매일 잠이 들기 전까지 나누던 다정한 대화로 꽉 찬 화면은 며칠째 확인받지 못한 노란 메시지만 바다 한가운데의 외로운 돛단배처럼 둥둥 떠 있다.
왜인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 연락한다는 것을 알아버렸는데. 그 속에 가장 중요한 저만 쏙 빠져있는지. 바쁜 탓에 직접 하는 연락은 어려울 테니 통해서 연락하라며 건네받은 명함은 이미 정환의 주머니 안에 있었다. 하지만 저를 제외한 사람들은 도훈이 직접 연락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을 통해 도훈에게 정환의 소식이 전해지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건넨 챙김을 대신 받고 있었지만, 성에 찰 리 없었다.
하루는 받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듣지 못하는 도훈을 알기에 정환이 그에게 전화 하는 행동 자체가 급한 상황을 빼면 스스로 정한 금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날은 주체할 수 없이 제멋대로 손이 움직였다. 서운함과 속상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사실은. 걱정스러운 마음이, 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크고 앞서나가서.
종점 직전에 자리한 집 근처의 정류장에 내렸을 때, 정환의 눈에 들어온 것은 며칠 내내 봤던 것과 달라진 도훈의 새로운 사진이었다. 이제는 진짜 익숙한 얼굴. 꼭 저를 보며 웃던 것처럼 예쁘게 올라간 입꼬리가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늦어가는 밤, 상가의 불도 다 꺼진 길가엔 도훈의 사진이 걸린 광고판마저도 빛을 잃고 차게 식어있었지만, 정환의 눈엔 오히려 더욱 또렷하게 와닿았다.
“진짜 밉다, 김도훈.”
잘 지내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불편하지 않을 리 없는 데 그 불편함 속에서 너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답을 받지 못한 대화창 속 질문들이 야속한 시선과 함께 정환을 보고 있는 사진 속의 도훈에게로 전달된다.
아무도 없는 밤. 비록 사진이지만, 오롯하게 지내던 그때처럼 둘만 남은 이 시간 속에서 정환은 사진 속 도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언제쯤 이 얼굴을 직접 볼 수 있을까. 따뜻하고 보드라운 볼에 내 손이 닿을 수 있을까. 한참의 시간이 더 지나야 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제가 감당해야 하는 것의 두 배, 어쩌면 그 이상을 도훈은 혼자 감당하고 있을 거라는 것도. 정환은 사진 속 도훈의 손에 입술을 올렸다. 제가 도훈에게 말을 알려주던 그때처럼. 전하고 싶은 짧은 말을 어느 때보다 천천히, 그 속에 새겨져 떨어져 있는 도훈에게까지 가 닿도록.
보고 싶어.
터질 것 같은 그리움을 또다시 마음에 눌러 담는다.
*
그렇지 않아도 도훈이가 너 보고 싶다고 계속 얘기했는데.
결국은 터진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도훈의 집에 찾아갔다. 주인은 없지만 그 속에 몸이라도 뉘어야 다시 견딜 수 있을 거 같았다. 형제처럼 십 년이 넘게 드나들던 서로의 집이었지만 늦은 시간만큼 문 앞에서 망설이던 정환을 반갑게 맞아준 것은 도훈의 어머니였다. 평소라면 일찍 잠드는 그녀임에도 이 시간까지 깨어있는 것에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물으려던 차에 그녀가 들려준 소식은 정환이 그토록 기다리던 것이었다.
“진짜 도훈이 온대요?”
“응. 늦은 시간이라 너 부를지 말지 고민했는데. 마침 이렇게 딱 맞춰서 왔네.”
도훈이 방에서 기다리고 있어, 곧 올 거야. 말을 마치고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서도 제가 들은 말이 진짜인가 싶어 거실 한가운데에 한참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토록 보고싶다 생각했던 도훈을 마주할 수 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입고 온 옷도 잊은 채 정환은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정환아, 어서 미안하다고 해야지.’
안녕, 하고 내밀었던 내 손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던 작은 아이. 몇 번의 인사에도 같은 안녕- 이라는 인사 없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던 까만 콩 같던 아이는 작은 토끼 인형을 안고 있었다.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 아이에게 심통이 났던 어린 정환은 내민 손을 거두지 않은 채 도훈이 물러난 걸음만큼 더 다가갔다. 그렇게 뒷걸음질과 앞으로의 전진을 서로 번갈아 하던 차에, 뒷걸음치던 발이 꼬여 기어이 도훈이 넘어진 후에야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리며 엄마의 다리에 매달리던 도훈을 보며, 정환은 엉엉 소리 내 한참을 같이 울었다.
‘그런데, 아줌마아.’
‘응?’
‘또이는 왜 나처럼 말을 안 해요?’
‘도훈이는 말이야. 하늘에서 듣지 못하는 천사에게 듣는 방법을 알려주고 와서 그래.’
‘그렇구나아…’.
‘그러니까 정환이가 이제부터 도훈이 잘 보살펴 줘야 해. 알겠지?’
그때는 그 말이 진짜인 줄 알았다. 티비에서 나오는 천사를 믿던 어린 나이. 타이르듯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은 손에 쥐여주는 과자를 받아 들고 그 말을 곱씹었다. 도훈이는 천사에게 듣는 방법을 알려준 아이. 도훈이는 착한 어린이야…. 여전히 그렁그렁 매달린 눈물에 젖은 속눈썹이 가지런히 내려앉은 눈으로 잠든 아이를 바라봤다. 누나만 둘 뿐이었던 집의 막내로 자란 정환에게 지켜줘야 할, 천사에게 귀를 내어준 착한 동생이 생기던 날.
도훈이 제게 동생이 된 그날부터 하루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귀가 되어주고, 대신 목소리를 내주었다. 수화를 배우기 시작하던 그때의 도훈에게 입 모양으로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알려준 것도 정환이었다.
‘손으로 느껴지는 입 모양을 잘 기억해 봐.’
‘천천히 해. 급할 건 하나도 없어. 괜찮아. 다 이해해 줄 거야.’
책상 한쪽에 놓인 액자 속의 어린 저와 도훈. 이 책상 옆에 앉아 제 입술 위에 도훈의 손을 올리고 입 모양으로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가르쳐주던 그때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피어오른다. 그때만 해도 저보다 이리 더 클 줄은 몰랐는데.
“잘생기면 다냐, 진짜…. 오기만 해봐.”
며칠 전, 정류장에서 찍었던 사진을 한 번 더 보고 긴장으로 콩콩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숨을 몰아쉰다. 얼굴을 보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마구 섞이는 문장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느라 절로 인상을 썼다. 왜 미리 알려주지 않았냐 타박부터 할까. 인기 많더라? 하고 심술을 부려볼까. 아니면 보고 싶었다는 진심부터 꺼낼까. 슬슬 빨갛게 달아올라 열감이 느껴지는 얼굴을 벅벅 문지르는 사이. 방문 너머로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환만큼 오래 기다렸는지, 들뜬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도훈 어머니의 소리를 들으며 연신 차오르는 손의 땀을 닦았다. 긴장으로 말라오는 입술을 애꿎게 깨물며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도훈이 본다면 또 입술을 괴롭힌다며 손가락으로 톡톡 칠 것이다. 딱지가 얹은 곳은 없는지, 도훈이 보고 속상해할 만한 것은 없는지 재빨리 거울로 확인했다. 오 분 여의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문이 열렸다.
까만 모자를 깊게 눌러쓴 탓에 보고 싶던 얼굴이 쉬이 드러나지 않았다. 천장의 등이 내는 불빛을 등지고 만들어낸 그림자가 정환을 넘을 만큼 도훈이 제게 가까워져서야 말 대신 먼저 한 것은 얼굴을 가린 까만 모자를 벗겨내는 일. 조금은 피곤해 보이는 기색이 역력한 게 보지 못한 사이에 더 말랐다. 속상하게 진짜…. 제 짐작보다 더 고생했을 도훈을 드디어 마주한 정환이 막 말을 건네려는 순간.
“아, 야, 야…. 문 아직 열려있어!”
손목이 잡힌다 싶더니 그대로 끌어당겨 정환을 안는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 알아들을 수 없는 걸 알면서도 당황함에 제멋대로 나가는 목소리가 실린 말이 튀어나왔다. 마음을 주고받고도 제대로 된 스킨십을 해본 적 없던 탓에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 서둘러 어깨를 밀어내기에 바빴다.
그럼에도 정환을 더 꽉 안고 놓는 단단한 두 팔이, 어깨를 밀어내던 손을 잡아 깍지로 맞물리는 손이. 그리고 조심스레 맞대어지는 입술과 입술이. 그동안 전하지 못하고 쌓아둔 서로의 진심을 대신했다.
언젠가 읽었던 책에.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잡고 있는 손으로, 그 손의 체온으로. 혹은 바라보는 눈빛만으로도 어떤 말보다 더한 진심을 말할 수 있다고. 각자 다른 방향으로 뻗어 이미 길을 정해놓은 손금이지만, 겹친 손과 손이 같은 방향으로, 서로를 향한 운명으로 뻗어가는 느낌. 손과 손끝으로 직접 새긴 둘의 첫사랑이 서툴지만 소중한 첫 키스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마음에 새로운 자국을 남겼다.
숨이 조금 차오른다 싶을 즈음에야 맞댄 입술이 잠시 떨어졌다. 깍지로 맞물린 손은 아직 떨어질 줄 모르고 붙들린 채로. 부끄러움에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잡은 손만 더 꽉 잡으니 다시 입술이 겹쳤다.
보고 싶었어.
손이 아닌 입술에 대고서 하는 도훈이 하는 말. 입술만이 아닌 마음도 닿아있을 정환의 가슴속 깊은 곳까지 간지럽히도록 느리게 전달하는 말에 시간도 속도를 맞추어 느리게 흘러간다. 기다리는 동안 떠올렸던 여러 가지 첫 질문들은 흐르는 시간 속에 그대로 녹아버렸다. 나도. 나도, 도훈아.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환이 똑같이 입술에 입술로 대답했다.
*
비로소 제대로 틈이 맞물려 돌아가는 기분이다.
다시 주인을 찾은 방. 명찰의 색만 다른 도훈의 교복 옆에 걸린 정환의 교복.
한 이불을 덮고도 한참이 남아 눈을 뜨면 서로 등을 돌리고 자고 있던 도훈의 침대. 이제는 나란히 누우면 틈이 없이 몸이 맞물릴 만큼 꽉 찬다. 불편할까 싶어 일부러 끝으로 물러난 몸을 바로 따라붙은 도훈이 자연스레 정환의 허리께에 팔을 올리고 가깝게 끌어당겼다. 어쭈, 안 본 사이에 왜 이렇게 능글맞아졌어. 아직 자유로운 두 손으로 재빨리 글자를 친 정환이 핸드폰 화면을 도훈에게 보인다.
“이번만 봐주는 거야.”
- 미안.
“또 할 말은?”
- 또 미안.
“김도훈 또또복권.”
- … 형 진짜 어디 가서 나한테 하는 개그 치면 안돼.
“안 본 사이에 많이 야박해졌네….”
- 그래서 내가 선물 가져왔지. 형 풀어주려고.
김도훈의 마음에 있는 사랑은 꼭 식물 같다. 사랑을 표현한 만큼 자라고, 준 사랑을 양분 삼아 보지 않는 사이에도 무럭무럭 자랐다. 마치 정환과 눈높이를 같이 하기 위해 올라온 도훈의 키처럼. 봉오리져 틈 없이 모인 마음이 일방적으로 먼저 커졌던 정환의 마음이 서운하지 않도록 결실을 맺을 준비를 한다.
허리에 얹은 팔에 힘을 줬다. 그대로 정환을 아래로 끌어내리며 도훈이 그의 위로 올라탔다. 순식간의 행동에 저항할 새도 없이 자세가 바뀌었다. 줄곧 옆에 붙어있던 도훈이 없으니 좁던 침대가 언제 그랬냐는 듯 널널하다 못해 그새 허전하다 느껴진다. 당황한 눈이 얼굴의 반만 해진 정환을 내려다보며 도훈이 개구지게 웃었다. 형 당황하니까 정말 귀엽다. 입 모양으로만 전하는 말에, 버스에서 꾸었던 꿈 속의 도훈의 목소리가 덧그려진다. 조금 낮고… 가볍고, 몽글몽글한. 상상한 목소리는 그대로 단어가 되어 눈앞에서 불꽃놀이 하듯 팡팡 터졌다. 그 눈부심에 정환이 왈칵, 눈물이 났다.
그리고
도훈의 목에 걸린 채, 정환의 눈앞으로 떨어진 목걸이 두 개.
심플하고 얇은 똑같은 모양의 반지가 펜던트가 되어 도훈이 정환에게 몸을 쏟을 때마다 부딪혔다. 파도처럼 찰랑이며 부딪힘이 만들어낸 소리는 도훈의 목소리를 대신해 정환의 기다림을 어루만져준다. 언제나 자신의 감정은 뒤로 하고, 오로지 도훈을 처음으로 생각하며 챙겨왔던 정환이 이번에도 제가 가진 서운함을 꺼내지 않고 너른 품을 내어준 게 고마워서.
틈 없이 가득 안은 정환을 품에 가두고 다시 입술과 입술이 마주했다. 짙은 밤을 지나 또다시 뜰 해를 기다리며 조금씩 빛을 찾아가는 새벽의 어딘가에서 세차게 뛰는 심장과 심장도 같이 닿았다. 조금은 엇갈린 박자로 쿵쿵. 쿵쿵.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맞대고만 있던 정환의 입술이 떨림을 느끼며 도훈이 웃는다. 말 그대로 푸스스. 기분 좋게 흩어지는 웃음이 정환의 볼에 닿아 따뜻한 열이 되었다. 조심히 닫힌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도훈 역시 잔뜩 열을 머금어 데일 것 같았다.
왜 좋아해?
그냥 형이라서.
같이 있으면 자꾸 무언가가 되고 싶게 만들어주어서.
나를 봐주는 눈에 다정이 가득해서.
다정에 그가 눈을 감는다. 가볍게 내리 앉은 곧은 속눈썹 위로 다시 한번 사랑을 새겼다. 비록 목소리로 전하지 못하는 마음이지만, 마주 잡은 손만으로도 우리 사이에 꽉 찬 감정은 이것으로 괜찮다고.
밤을 새워도 좋을 만큼 마음껏 말해주리라 다짐했다.
온전하도록. 완전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