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대로 love song
듀
정환에게
초여름은
쓰고,
따가운 눈물맛이 났다.
나름대로 love song
실패자, 낙오자. 그 누구도 정환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정환은 스스로를 그렇게 단정 지었다. 입을 꾹 다물고 책상 위 모니터만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문소리가 들리고 형식적인 인사 소리가 들리면 책상엔 그림자가 진다. 마우스를 딸각이는 소리, 흐으음…. 할 말을 정리하는 소리, 타닥타닥 무언가를 입력하는 키보드 소리, 귀로 들리는 소리들을 들으며 눈으로는 깁스를 하고 있는 팔을, 바지에 새겨진 병원 로고들만 빤히 바라본다. 잘 붙고 있네요. 정적을 깨는 소리에 고개를 들면 여전히 의사는 모니터만을 바라보고 있다. 괜히 침이 꼴깍 넘어간다.
저번에 말했던 것처럼 수술은 잘 됐어요. 신경도 괜찮고. 뼈도 잘 붙고 있고. 예정대로 오늘 퇴원하시고, 무릎도 한 번 볼까요? 아직도 아파요? 붓기는 꽤 빠졌네. 이미 한번 수술했던 곳이라 재수술 한다는 게 사실 큰 의미가 없긴 해요. 축구는 이제 이 다리로는 취미 이상으로는 힘들어요. 사실 안 하는 게 제일 좋고. 아직 어리니까 다른 거 해도 늦지 않았죠. 약 잘 챙겨 먹으세요.
왼쪽 귀로 들어와서 심장에 콕콕 박히는 말들. 어떠한 위로도 도움도 되지 않는 이야기들. 목 끝에 바위가 걸린 거 마냥 답답해져서 정환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옆에서 다정하게 잡아오는 손길에 정환은 애써 웃어 보였다. 집에 가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료실을 나선다.
-
“엄마는 정환이가 하고 싶은 대로 했으면 좋겠어.”
“네. 잘 생각해 볼게요.”
백미러 너머로 보이는 걱정스러운 시선이 보인다. 네 잘 생각해 볼게요.라고 대답은 했지만 정환은 사실 잘 모르겠다. 머릿속이 텅 빈 기분. 정환에게 축구는 삶의 전부였었다. 열아홉, 그중 십 년을 축구만 했다. 멋모르고 따라간 축구교실에서 느꼈던 즐거움을 시작으로 십 대 내내 공만 쫓아다녔다. 대회 예선이 코앞이었다. 중요하다면 중요할 경기를 앞두고 진행된 훈련에서 정환이 넘어졌다. 집중을 못 한 탓이었다. 팔꿈치가 골절되고, 이년 전 수술했던 인대를 크게 다쳤다. 하늘이 노랬다.
부족한 것 없는 환경. 좋아하는 축구. 청소년 대표팀의 간판 스트라이커, K리그의 유망주. 미래가 보장되어 있던 신정환에서 슬럼프와 잦은 부상에 축구 선수로는 더 이상 가망이 없는 신정환으로 되기까지는 한순간이었고, 주변인들의 동경은 동정으로 쉽게 바뀌었다. 읽을 엄두가 안 나게 쌓여버린 메시지, 걱정으로 포장된 호기심들에 숨이 막혀와서 정환은 이 모든 현실을 덮어두고 외면하고 싶고, 도망치고 싶었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정환은 근처 지하철역에서 내리기를 택했다.
그러나 슬프게도 정환이 도망칠 곳은 결국 학교뿐이었다. 모두가 대회 가느라 빈 축구장에서 정환은 괜히 널브러진 축구공들을 정리했다가, 한번 차 보았다가, 결국 그늘 밑 벤치에 앉아 조용한 축구장을 바라본다. 바람 좋다. 오늘 같은 날은 별로 덥지도 않아서 훈련도 그렇게 안 힘들 텐데. 다들 잘하고 있겠지? 근데 어쩌면 잘 된 일일지도 몰라. 슬럼프가 꽤 길었잖아. 사실 축구를 계속하는 게 맞나 싶기도 했고. 이참에 다른 진로도 괜찮지. 나는 뭘 잘하지? 공부를 다시 시작하면 재수해야겠지. 그냥 캐나다로 확, 가버릴까? 통장에 모은 돈이 얼마 있더라. 그런데 내가 정말 축구를 안 하고 살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다 결국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다 눈을 뜨면,
“으악”
눈앞의 얼굴에 심장이 쿵, 떨어진 기분이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가만 진정시킨다, 신정환! 불리는 이름에 고개를 들면 그제야 상대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까무잡잡해서는 잔뜩 웃고 있는 익숙한 얼굴. 쟤가 지금 저기 왜 있어?
“김도훈?”
김도훈이다. 엄마 친구 아들, 김도훈. 정환이 10살 때 정환의 아래층으로 이사를 오면서부터 늘 붙어 다녔던 김도훈. 가장 친한 친구로, 매일 같이 붙어 다니다가 갑자기 나 캐나다 갔다가 올게.라면서 떠났던 김도훈. 엉엉 울던 정환과는 다르게 형, 나 까먹지 말고, 다치지도 말고, 잘 커서 올게. 웃으면서 씩씩하게 떠났던 그 김도훈. 생글 웃는 얼굴에 반가움보다 놀랜 괘씸함이 더 커서 괜히 어깨를 찰싹 때린다.
“올, 형 내 얼굴 안 까먹었네?”
“야 넌 무슨. 너 언제 한국 왔어?”
“지난주에 왔지. 학교는 월요일부터.”
도훈이 옆에 털썩 앉는다.
“형 역시 유명하더라? 축구부 에이스 신정환. 모르는 애들이 없던데? 역시 청대 간판.”
“에이스는 무슨.”
“오. 겸손하기까지.”
정환이 습관처럼 뒤로 기대려다 삐끗한다. 깁스 한 팔 쪽으로 휘청이다 도훈이 등을 잡아줘 도로 앉는다.
“수술은 잘 됐어?”
“응? 어, 뭐….”
“다리는 괜찮대?”
“그냥 뭐…. 그나저나 너 나 여기 있는건 어떻게 알았어?”
“으음, 삘? 집에 가려다가 뭔가 여기 있을 것 같아서.”
말 돌리려던 건 아니고 진짜로 정환은 궁금했다. 수술 들어가기 전 도훈과 마지막으로 한 연락에서 부상 얘기니 수술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부러 안 했다. 가족들한테도 당부했다. 도훈이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입원하고서는 핸드폰도 잘 안 봐서 반 아이들도 정환이 퇴원했는지, 했어도 여길 왔을지 몰랐을거다. 근데 내가 여기 있는 건, 다친 건 어떻게 안 거지?
“나 다친 거 엄마가 말해줬어?”
“아니? 형 담임한테 물어봤는데?”
“뭐어?”
그럼 어떡해! 나 한국 왔는데, 형은 전화도 안 받지, 이모한테 물어보려고 하니까 엄마가 말리지. 이유는 엄마도 모른다고 하지. 누나들은 형이 말하지 말라고 그랬다고 하지. 학교 오면 형 있겠지 싶어서 형 반 달려갔더니 형은 또 없지. 축구부 형들은 형 안 나온 지 오래됐다고 하지. 그래서 그냥 물어봤지. 형이 저한테 맡기고 간 게 있어서 줘야 해서요. 살짝 구라 좀 섞어서. 도훈이 와다다 쏟아내는 말에 수십 개의 숫자가 찍혔있던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가 생각이 났다. 미안한 마음에 정환의 눈썹 끝이 쳐진다.
“그래서 너 뭐 맡겼다고 했는데?”
“지갑.”
뭐어? 야, 김도훈. 너어…? 와아. 놀란 표정으로 말하는 정환에 도훈은 결국 울컥한다. 와아? 그러고는 투덜투덜. 아니 난 형한테 서운하거든?
“형 진짜 나한테 말하지 말라고 한 건, 너무 한거 아냐?”
나한테도 말하기 싫었어? 난데? 어? 김도훈인데? 장난반 진담반. 근데 서운한 진담이 훨씬 많이 섞인 말투. 도훈이 걱정할까 봐 라기보다는, 솔직한 마음으로는 도훈에게까지 헐, 어떡해, 괜찮아?라는 말을 듣는 게 싫을 거 같아서 안 했다. 그럼 진짜로 노답일 거 같아서. 이런 얘기는 굳이 할 필욘 없어서 정환은 미안, 사과로 무마한다.
언제까지 연락도 안 하려고 했어? 어쩐지 지난번에 영통도 안 받고, 답장 오는 텀도 길더라니. 내가 한국 온다고 했던 건 결국 아직도 안 읽었더라? 어? 난 형 만날 생각에 신나서 열심히 날아왔는데.
그리고 정환의 사과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그래서 정환은 엄살을 부린다. 아야야 괜히 깁스 한 팔을 만지작거리면 도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져준다. 아우 진짜. 입을 삐죽 내밀었다가 아! 맞아. 손뼉을 치고선 주머니에서 가방에서 초코바를 한 움큼 꺼낸다. 이거 좋아하는 거지? 도훈이 건넨 초코바를 입에 까서 넣으면 금세 입안이 달아진다. 형, 나한테 미안한 거 맞지? 도훈이 어깨를 툭 치며 묻는다. 그래, 미안하다니까. 그럼 이제 나랑 맨날 만나. 알겠지? 그러고는 대답을 종용하듯 눈을 맞춰온다. 알겠어. 오물거리면서 정환이 대답한다. 그러지 않아도 어차피 맨날 볼 거 같은데. 속으로 생각하면서.
“형, 근데 있잖아.”
정환이 초코바를 까 입에 넣으며 도훈을 바라본다.
“그 왜 나 친척 형 중에 지환이 형 기억나?”
“누구?”
“왜 우리 둘째 이모네 아들. 어릴 적에 유도했던 형 있잖아. 중등 대회 나가서 메달도 땄던 형.”
아. 아는 이름이다. 도훈이네 집에 놀러 갔을 때 자랑하듯 말하다가, 정환이도 나중에 유명한 축구선수 되면 이모 잊으면 안 된다? 장난스러운 말에 부끄러워서 웃었던 기억도 떠올랐다. 내가 형한텐 말 안 했는데, 그 형 큰 대회 앞두고 자전거 타고 가다가 혼자 넘어졌잖아. 나 캐나다 가고 얼마 안 돼서. 그때 허리 완전 나가서 유도 그만뒀거든. 병원에서 수술하고 절대로 유도하면 안 된다고 그래서. 근데 한국 와서 만났는데, 그 형 유도관 차렸더라고. 도복 입고 애들 가르쳐. 하진 못해도 애들 가르치고 애들이 하는 거 보고 이런게 너무 좋대. 너무 사랑하면 그냥 그 안에 담겨만 있어도 좋다고. 근데 진짜 좋아 보였어. 걱정한 게 무색할 정도로.
무슨 말 하나 싶었다. 정환은 아무 대답도 못하고 그저 바닥만 봤다. 형. 정환이 고개를 돌려 도훈을 바라본다. 마주쳐오는 눈을 마주 보면서 가만 웃는 도훈의 눈동자엔 걱정은 있지만 동정은 없다. 이전과 다를 것 없이 있는 그대로의 신정환을 바라보는 김도훈의 눈. 목 안의 큰 바위가 잘게 쪼개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유도 모르게 웃음이 나서 웃어버렸다. 정환의 눈치만 살피던 도훈도 정환의 웃음에 따라 웃는다.
“나는 그냥 형이 너무 절망적이지만 않았으면 좋겠어.”
도훈의 말에 결국 정환은 코 끝이 찡해진다.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잘근 깨물다 괜히 허벅지만 팍팍 두어 번 쳤다. 손끝을 만지작거리다 김도훈 너 진짜 많이 컸다? 기특한데? 할 말이 없어서 이런 얘기나 해서 도훈이 또 웃는다. 형 나 한국에 오니까 좋지. 글쎄에. 좋을 텐데? 텐데에? 좋지 않나? 않나아? 의미 없는 말장난이 이어졌다. 사실 정환은 도훈이 옆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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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은 아직도 안 읽었다. 이 형은 핸드폰을 왜 들고 다니지? 답답한 마음에 전화를 할까 하다가 좀 더 기다려보기로 한다. 한참을 본관 입구 화단에 걸터앉아 다리만 흔들고 있으면 보이는 익숙한 머리통에 폴짝 뛰어내린다. 힘 하나 없는 맹한 표정. 형! 도훈은 부러 큰 목소리로 정환을 부른다. 그럼 정환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게 재밌어서. 정환의 옆에 선 도훈이 뭐야, 아침에도 봐놓고. 너무 반가워하는 거 아냐? 장난을 치면 정환이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정말로 매일같이 도훈과 붙어 다녔다. 정환이 한층 걸어 내려와 도훈을 기다렸다 같이 등교하고, 수업이 다 끝나면 도훈이 정환의 반 앞이나 본관 입구 앞에서 기다려서 같이 하교한다. 매미 소리가 울리는 운동장을 같이 걸어 내려오다 보면 축구장이 보인다. 그럼 정환은 길을 걸으면서 옆을 힐끗 쳐다본다. 축구장만 보면 도훈이 열심히 쪼개놓은 돌덩이들이 다시 뭉치고 뭉쳐서 바위가 되는 기분이다. 그럼 도훈은 그런 정환의 어깨에 팔을 올린다. 형. 배고프지 않아? 떡볶이 먹을까? 정환의 시야를 가리면서.
교문까지 걸어가면서 오늘 뭐 할까? 물으면 정환은 잘 정하질 못한다. 맨날 공만 차서 뭘 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면서 도훈이 하자는 대로 했다. 소독할 땐 병원도 같이 갔다. 처음 같이 병원에 갔을 때, 병원 근처에 떡볶이집을 갔다. 도훈은 여전히 매운 걸 잘 먹지 못해서 떡보다 물을 더 많이 마셨다. 매우니까 단 걸 먹어야 한다고 옆 탕후루 집에서 탕후루 하나씩 사서 먹고 나면 옆 피씨방이 보였다. 간만에 피씨방이나 갈까? 하고서 들어갔다. 키보드를 만지면서 하다 보니 팔이 불편해서 깁스 풀면 가기로 하고 그 후엔 게임은 도훈의 방에서 핸드폰이나 닌텐도 게임을 했다.
“깁스 답답하지 않아? 되게 오래 한다.”
나 알지, 형. 작년에 팔 삐어가지고 깁스했었잖아. 그때 캐나다는 또 우기여가지고 나 그때 버섯이라도 필까 봐 걱정했었다? 그래도 형은 한여름 전에 깁스 풀어서 다행이다. 한여름에 깁스는 진짜. 와 그건 진짜 아니다. 상상만 해도 으…. 고개까지 저어가며 말하는 도훈의 표정이 웃겼다. 정환은 게임에 집중하면서도, 도훈이 하는 이야기들 사이사이 으응, 아하, 오옹. 대답을 곧잘 한다. 그 사이에 게임은 또 정환의 승이었다. 아 또 졌다. 형은 한 손으로 하는데도 왜 이렇게 잘해. 도훈은 여전히 승부욕만 쎗지 게임은 잘 못했다.
학교 끝나면 게임만 한창 하다가 갑자기 정환이 공부를 해야겠다고 선언을 했다. 시험기간 핑계를 대면서 도서관엘 갔다. 교과서나 참고서 잔뜩 들고 가서는 둘 다 소설책만 실컷 읽었다. 야외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서 한참 책을 읽다가 시선이 느껴지면 빤히 바라보는 도훈이 있었다. 정환이 책을 덮는다. 순간 눈동자가 반짝인다.
“도훈아. 너라면 이런 상황에 어떻게 할 거야?”
“어떤 상황?”
“형이 자고 일어났더니 바퀴벌레가 되어있는 거야.”
한동안 유행이었던 질문. 그 당시 도훈은 이 질문엔 늘 이렇게 답했다.
“사람이 어떻게 바퀴벌레로 변해?”
정환이 답답하단 표정을 짓는다.
“아니, 만약이잖아.”
“그럴 리가 없을 거 같은데….”
“야.”
“아, 알겠어, 알겠어. 만약 형이 바퀴벌레로 변한다면…. 그럼 내가 잘 키워줄게.”
바퀴벌레는 뭘 먹고 자라지?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하는 도훈을 보면서 정환은 아 됐어, 책이나 봐. 도훈이 읽던 책을 밀어준다. 도훈이 웃으면서 정환의 팔목을 잡는다. 아, 진짜로 알겠어, 알겠어. 내가 사랑으로 보살펴줄게. 형이 다시 사람이 될 때까지. 맨날 말도 걸어줄게. 정환이 형 잘 잤어? 오늘은 뭐 했어? 하고. 도훈의 말에 어이없다고 하면서도 정환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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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집에 가는 길엔 버스를 한번 갈아타야 한다. 도훈과 정환은 갈아타는 대신 이십여 분 거리를 걷는다. 최대한 가로수 그늘 쪽으로 붙어서 걷다가 중간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려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아이스크림은 정환이 살 때도 있었고 도훈이 살 때도 있었다. 게임 내기를 해서 지는 사람이 사기도 하고 먼저 먹자는 사람이 사기도 하고. 오늘은 정환이 사기로 했다. 아침에 늦잠을 자서 지각할 뻔했다는 게 이유였다. 뭘 먹을까아. 아 오늘은 그거 없네 요거트맛. 들어선 가게에서 평소 먹던 대로 하나씩 고르는데 순간 하늘이 번쩍한다. 쾅쾅 천둥이 요란하게 치더니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동시에 바라본다. 헐. 망했다.
“형 우산 없지.”
“없지. 아 그냥 집에 바로 갈걸.”
후회스러운 말을 하면서도 아이스크림 결제는 한다. 그냥 먹고 가자. 문밖을 바라보던 도훈이 말한다. 아이스크림 먹다 보면 그치겠지 뭐. 무인 가게는 작아서 있을 곳이 마땅치 않아 가게 앞에 털썩 앉는다. 길게 빠진 차양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요란하다.
“꼭 물속에서 먹는 거 같다. 그치.”
“응. 동해 간거 같다….”
“그게 뭐야”
“뭐긴 뭐야. 모기지.”
“와, 진짜 노잼.”
“형은 잼 있어. 딸기잼.”
“아 형 그만해 진짜.”
“웅.”
아무 얘기나 하면서 먹다가 별안간 정환이 아 맞다. 박 터지는 소리를 낸다. 남은 아이스크림을 한 입에 털어놓고는 정환이 가방을 뒤적인다. 가방 속에서 노란 삼단 우산이 나온다. 와, 이거 이제 생각남. 가게 안으로 들어가 쓰레기를 버리고서는 우산을 펼친다. 둘이 쓰기엔 턱도 없이 작아서 둘 다 가방을 앞으로 메고서 몸을 바짝 붙인다. 형이 이쪽으로 와. 팔을 최대한 안으로 넣어. 아니다 이걸로 감싸자. 도훈이 벗고 있던 하복 셔츠를 정환의 팔 위로 돌돌 말아준다.
물속을 걷는 기분. 발걸음마다 물이 튄다. 우산을 때리는 빗소리에 귀가 먹먹한 와중에 정환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오랜만에 맞으니까, 재밌다. 그치. 도훈은 딱히 재밌지 않았지만 정환의 웃음소리 따라 웃음이 나왔다.
“어릴 때 생각난다.”
우산을 써도 잔뜩 젖은 몰골로 집에 도착해서 한다는 소리였다. 우리 어릴 때 비 맞으면서 축구 많이 했잖아. 여름에 이렇게 비가 많이 오면 도훈과 같이 잘 안 입는 옷들 입고서 땀인지 빗물인지 모를 정도로 젖을 정도로 뛰어놀았다. 엄마한테 혼나기도 혼나고 한번은 심하게 열감기에 들어서 고생했던 적도 있었다.
도훈이 수건을 가져다주면 한 손으로 열심히 물기를 털어낸다. 줘봐봐. 도훈이 정환의 머리랑 몸을 대충 닦아준다. 잔뜩 젖은 셔츠 밑으로 깁스는 뽀송하다. 다행이다. 안 젖어서. 그렇게 말하는 도훈의 어깨가 잔뜩 젖어있다. 뚝뚝 티셔츠 밑단으로 물방울이 떨어진다. 정환이 들고 있던 수건으로 도훈의 옷을 꾸욱 잡아 누른다. 둘의 주변에 물이 흥건하다.
일단 씻자. 옷 줄게. 도훈이 정환의 등을 욕실 쪽으로 떠민다. 내가 씻는 거 도와줄까? 했다가 됐거든. 괜히 팔 한 대 맞는다. 대신 이것 좀 도와줘. 젖은 셔츠 벗는 걸 도와주고, 젖은 바지도 내려주는 도훈의 귀가 빨갛다. 서둘러 정환을 욕실에 보내놓고 큰 숨을 내쉰다. 바닥의 물기를 대충 닦고서 도훈도 급한 대로 안방 화장실로 향한다. 아 찝찝하다. 젖은 발이 끈적이게 바닥에 붙었다 떨어진다.
“형 옷 여기 앞에 둘게.”
“웅.”
“멀었어?”
“어어, 아니. 다 끝났어.”
말소리가 물소리에 섞여 들려온다. 문 앞 바닥에 옷을 내려놓고 뒤돌아서는데 쿠당탕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놀란 도훈이 문을 열면 정환이 욕조 안에 쭈그려 앉아있다.
“야, 놀랬잖아. 노크도 안 하고.”
“아 미안, 넘어진 줄 알고.”
바닥에 떨어진 샤워헤드가 요란하게 물을 뿜고 있다. 정환이 안 다친 팔로 물을 끄면 움직임이 멈춘다. 머리 감다가 떨어졌어. 불편해 보이는 정환의 팔. 그니까, 내가 도와준다니까. 여기 기대봐봐. 도훈의 말에 정환의 귀가 빨개진다.
“야. 됐거든.”
“아, 이래서 언제 씻어. 감기 걸려 그러다가.”
하는 수없이 욕조에 기댄다. 그냥 집에 가서 씻고 올 걸 그랬나 싶다. 도훈이 캐나다 가기 전엔 줄곧 같이 씻었는데 몇 년 됐다고 민망하다. 도훈은 옷을 입고 있고 저는 홀딱 벗고 있어서 더. 정환의 머리 위에 앉은 도훈이 물 온도를 체크한다.
“집에선 대체 어떻게 씻어.”
“방수팩 팔아. 그거 씌우고 씻지.”
“진작 말하지. 봉투라도 해줄걸.”
정환이 피식 웃는다.
“나 첫날에 그렇게 씻었는데 그게 그거야. 어차피 내일 병원 가니까 좀 젖어도 괜찮아.”
“안 추워?”
“응. 괜찮아.”
“물 온도는. 괜찮으세요, 손님?”
“네. 아주 좋아요.”
“네, 손님 눈 감아보세요. 이제 샴푸 들어갑니다.”
“네에. 안 아프게 해주세요.”
정환이 두 눈을 질끈 감는다. 거품을 잔뜩 내서 머리를 감겨주면서 도훈은 샴푸로 온갖 장난을 다 친다. 뾰족 머리, 오대오 머리, 이대팔 머리, 어린애도 아니고 머리 하나 감으면서 한참을 웃는다. 나 이러다 머리 다 빠질 것 같애. 정환의 말에 도훈이 물을 튼다. 이제 헹굴게. 웅. 정환이 목을 더 뒤로 젖힌다. 헤드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가 부드럽게 머릿속으로 파고든다. 그리고 간지러운 도훈의 손길. 뒤통수를 쓸어내릴 땐 못 참고 목이 움츠러들었다. 어어, 힘 빼봐. 도훈의 손이 목덜미에 묻은 거품도 부드럽게 닦아간다. 습하고 물소리만 잔뜩 들리는 게 의식이 돼서 정환은 아무 말이라도 해야 할 기분이 들었다.
“바다 가고 싶다.”
“갑자기?”
“응. 도훈이 너 회 먹나?”
“아니. 안 먹어봤지.”
“와. 그 맛있는걸. 우럭이랑, 개불 먹고 싶다. 매운탕에 라면이랑 수제비 넣어서.”
“그거 우리 아빠 술안준데. 아저씨같애.”
뭐? 도훈의 말에 발끈하다 얼굴에 물이 쏟아진다. 아이, 움직이지 마세요. 손님. 도훈의 손이 얼굴을 전체적으로 훑고 지나간다. 세수 시켜주는 것처럼. 아 예쁘다. 코도 킁. 씁. 까분다. 진짜. 결국 정환이 손을 뒤로 빼네 흔든다. 그 손을 잡아 도로 욕조 안에 넣어준다. 아, 미안 미안. 하나도 안 미안한 얼굴로 말하면서 도훈이 웃는다.
“형 앉아봐봐.”
도훈이 의자에 정환을 앉힌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한참을 털어준다. 드라이기 들어갑니다, 손님. 정환이 네에. 대답을 하고서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는 도훈의 손이, 따듯한 바람이 부드러워 노곤해진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다 이내 꾸벅꾸벅 존다. 거울로 조는 얼굴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드라이기를 끄고서도 한참을 바라본다. 잘 말려진 머리카락을 만지다가 도훈이 고개를 내린다. 여전히 정환은 졸고 있고, 짧게 닿았던 정환에게서는 평소 도훈에게서 나던 샴푸향과 바디워시향이 났다.
-
요 며칠 내내 비가 내렸다. 주말에 한강에 가자고 어디로 갈까. 열심히 찾아보고 고민한 게 허무해졌다. 도훈의 방 안에서 각자 핸드폰이나 보다가 만화책이나 잔뜩 빌려서 읽기로 했다. 우와 여긴 아직도 있네. 도훈이 캐나다로 떠난 이후론 잘 가지 않았던 만화방에 오랜만에 갔다. 어릴 때 보던 만화 그대로 빌려서 무겁다고 툴툴거리면서도 잘도 들고 왔다. 비가 마침 그쳐서 다행이었다.
정환은 도훈의 침대에 앉아 벽에 기댔고, 도훈은 그런 정환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사이좋게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만화책을 읽는다. 한참 동안 종이 넘기는 소리만 나다가 갑자기 또 빗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정환이 만화책을 읽다 말고 창밖을 바라본다. 또 비 온다. 작게 중얼거리면 그러게, 도훈이 답한다.
“형 나 첨에 이거 읽었을 때 말야. 히로가 이해가 안 갔었다.”
“왜?”
“어떻게 좋아하는 걸 모를 수가 있어.”
다 읽은 걸 내려놓고선 마침 다 먹어 정환이 물고만 있는 아이스크림 막대를 빼 옆 탁상 위에 올려놓는다. 나는 좋아한다는 감정은 너무 확실히 느껴졌거든. 그렇게 어렸는데도. 다음 편을 뒤적이는 도훈의 손에 정환이 찾아 쥐여준다.
“넌 어떻게 알았는데?”
“그냥, 같이 있으면 즐겁고, 생각하면 보고 싶고. 특히 웃는 얼굴이 너무 좋아서 웃게 해주고 싶었어.”
“오. 첫사랑이 있으셨나 봐.”
볼을 쿡 찌르면서 하는 말에 도훈이 미간을 찌푸린다.
“하. 형 진짜 가끔 의도적이지 않게 눈치 없는 거 알아?”
“아니? 몰라.”
“아, 얄미워.”
도훈이 만화책을 펼쳐서 이어 읽기 시작한다. 정환이 그런 도훈을 흘긋 본다. 이해가 안 가는 말이다. 내가 눈치가 없었나? 평소에? 무슨, 어떤 의미인 거지? 생각하다 보니 더 모르겠다. 뭔가 이상한 감정이 든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려운 느낌.
“근데, 이젠 좀 알 것 같애.”
“뭐를?”
“좋아하는 걸 깨닫는 데에도 늦을 수 있다는 거 말야.”
다 지나고 나서 알 수 있는 마음도 있는 거구나. 그런 거. 그래서 이젠 좀 덜 조급해지기로 했어. 다 지나기 전에 알 수 있게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도훈의 말 하나하나가 귀에 콕콕 와서 박힌다. 여전히 형용할 수 없는 낯선 감정에 괜히 도훈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다 컸네 김도훈. 도훈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어이없어. 도훈이 중얼거리다 다시 만화책을 본다.
같이 있으면 즐겁고, 생각하면 보고 싶고. 특히 웃는 얼굴이 너무 좋아서 웃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라면 정환도 어쩐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아. 아까 좀 떠오르지, 공감 좀 해주게. 쓸데없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구나. 좋아한다는 게 그런 거구나. 이해하고 나니 어쩐지 어색하다. 왜냐면 그 생각의 끝에 왜인지 도훈의 얼굴이 떠올라서.
만화책을 읽다가도 집중이 안 돼서 도훈의 얼굴만 힐끔거리다 눈이 마주쳤을 땐 무겁단 핑계로 머리 및 다리를 빼낸다. 도훈은 아무 말 없이 베개를 끌어안고 엎드린다. 창밖으로 들리는 빗소리가 거세진다. 동글동글한 뒤통수를 빤히 바라보는데 갑자기 천둥이 친다. 몸이 살짝 튈 정도로 놀라서 심장이 쿵쾅거렸다. 꼭 뭐에 들킨 것 같은 기분에 귀에 열이 올라 빨개진다. 멋쩍은 기분에 이불만 툭툭 치다가 도훈의 옆에 눕는다. 도훈의 시선이 느껴져서 눈을 감았다. 이럴 땐 눈 감고 자는 게 상책이다.
그런데, 왜 도훈의 얼굴이 떠올랐을까? 가만 생각하다 신기하게도 도훈과 요즘 함께 있다 보면 축구 생각이 한 번도 안 난다는 걸 깨달았다. 슬프지도 않다는 걸 알았다. 이상하다. 뭐가 이상한 거지? 여전히 알 수 없는 감정의 흐름에 맡겨 둥둥 떠다니다 보면 어느샌가 잠에 든다.
-
“자, 마셔.”
이온음료에 얼음 세 개. 그새 눅눅해진 종이컵을 들어 한 모금 마신다. 한 달 만이다. 축구장은. 대회를 마치고 돌아와 북적 해진 축구장에서 하나같이 정환을 걱정하며 안부를 물었다. 정신없이 둘러싸여 쏟아지는 질문에 대답을 겨우 하면서 정환은 주말에 올걸, 후회했다. 한참을 붙잡혀 있다가 감독님의 등장에 겨우 정리가 되었다.
“몸은 괜찮고? 깁스는 언제 풀어?”
“다음 주요.”
“그래, 고생했네. 날도 더운데.”
“아닙니다. 그래도 아직까진 덜 더웠어요.”
“그래.”
“네에….”
“그, 정환아. 미안하다. 감독님이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일인데, 따지자면 굳이 뛰겠다고 우긴 정환의 잘못일 텐데. 정환은 저 사과의 말이 이전에 쏟아지는 걱정보다 더 버겁다. 애써 웃으면서 깁스를 만지작거렸다. 종종 놀러 와. 애들이 너 걱정 많이 했어. 어깨를 다독여주며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짐 정리는 직접 하겠다고 해서 나는 손 안 댔어. 버릴 건 두고 챙길 것만 가져가.”
“넵. 감사합니다.”
락커를 열면 축구화, 축구공, 보호대, 유니폼들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괜히 미련이 남아서 하나하나 다 챙기려다 이내 다시 락커에 넣는다. 축구공 마그넷, 무릎 보호대, 헤어밴드. 다 도훈이 사줬던 것들. 사진들과 종종 꺼내봤던 편지들을 꺼내 가방에 넣고 미련 없이 락커문을 닫는다. 짧게 인사를 하고서 축구장을 빠져나온 정환은 도훈이 생각났다. 괜히 먼저 가라고 했나.
늘 도훈과 같이 걸어 내려갔던 길을 혼자 걸어내려가고, 같이 타던 버스를 혼자 탄다. 도훈이 돌아오기 전엔 혼자서 줄곧 했던 건데, 요 몇 주 같이 다녔다고 벌써 허전한 게 웃겼다. 버스에서 내려 걸어갈까, 버스를 갈아타고 갈까 고민하다 도훈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도후이]
[뭐해] 17:20
1이 사라짐과 동시에 울리는 전화. 여보세요? 받으면 형 끝났어? 어디야? 말소리가 쏟아진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지 않아? 물으면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웃음소리. 괜히 귀가 간지러워지는 기분에 정환도 웃었다. 운동화 앞코로 바닥을 툭툭 치면서 나 지금 사거린데, 올래? 물었다. 좀 피곤하려나. 걱정하면서.
-그러네, 사거리네.
“응?”
그런데 들리는 대답은 응, 아니가 아닌 생각도 못 한 대답이라 정환은 잠시 얼었다. 시인정화아아아아안. 핸드폰으로 들리는 건지, 길 건너 들리는 건지 헷갈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정환은 핸드폰을 보다 다시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형, 여기 봐봐. 길 건너에.
길 건너를 보면 도훈이 손을 흔들며 서있다. 전혀 생각도 못 한 상황이었다. 뭐야. 너? 때마침 신호가 바뀐다. 형이 건너와. 도훈의 말에 길을 건넌다.
“야, 김도훈. 너 어떻게 알고 왔어?”
“이때쯤이면, 끝나겠지 하고 나왔지. 딱이지.”
“응, 완전.”
조금은 감동받은 얼굴. 도훈이 뿌듯한 얼굴로 브이자를 그려 보인다. 배고프니까 일단 밥 먼저 먹자. 여기 맥날 가자. 햄버거 먹고 싶어. 형. 멀뚱히 서서 웃기만 하는 정환을 끌고 간다.
“먹고 뭐 할까?”
트레이 가득 부은 감자튀김을 밀어주면서 묻는다. 시험 끝났으니까 실컷 놀자. 들뜬 목소리에 덩달아 따라 들떠서 정환이 웃으며 한입 가득 햄버거를 밀어 넣는다.
오늘 집 가는데 자리가 빈 거야. 오오. 그래서 냅다 앉았거든? 으응. 근데 그다음 정거장에서 할아버지가 타는 거야. 근데 나 오늘 가방 진짜 무거웠단 말야. 어엉. 그리고 시험 끝나서 너무 피곤하기도 하고. 그래서 고민을 엄청 엄청 했잖아. 그랬어? 응. 근데 어떻게 해, 비켜줬지. 그래서 어깨가 진짜 대박 아파. 키가 한 이센치는 준 거 같아. 그게 뭐야. 진짜야. 형보다 더 커야 하는데. 암튼 그리고 서서 졸다가 못 내릴 뻔했잖아.
쉴 새 없이 떠드는 목소리. 그 목소리가 좋아서 정환은 먹던 것도 멈추고 도훈의 말에 대답을 해주며 계속 웃느냐고 둘이서 햄버거 하나 먹는 데 한참이 걸렸다.
“와, 형 무슨 햄버거를 한 시간을 먹어. 형 너무 늦게 먹는 거 아냐?”
“그렇게 말을 많이 하면서도 빨리 먹는 게 더 대단하다, 김도훈아.”
“그래서 그런가. 형 나 좀 소화된 거 같아.”
손에 아이스크림 하나 들고서는 그런다. 많이 먹어서 그런가, 도훈이가. 분명 어깨에나 닿았던 머리였는데. 이제는 시선이 잘 맞는다. 가끔은 올려다보는 기분도 들고. 이러다 진짜 나 따라잡으려나. 상가 유리에 비친 걸 보면서 대충 눈으로 키를 재본다. 엇비슷해 보인다. 또 기분이 이상해져서 허리를 펴본다.
“와, 날씨 좋다. 형 한강 가자”
“한강?”
“그때 못 갔잖아. 내가 돗자리도 챙겨옴.”
지도를 켜서 버스를 찾는 도훈을 따라 충동적으로 한강으로 향한다. 평일 세시의 한강공원은 한적하다. 앉을 곳을 찾아 걷다가 자전거 대여소에서 충동적으로 자전거를 빌린다. 정환이 아직 팔이 아프니까 이인용 자전거.
“너 자전거 탈 줄 알아?”
“아 형 당연하지. 베스트 드라이버임.”
그래도 자전거 타본 경험은 정환이 더 많아서, 정환이 앞에 앉았다. 출발! 뒤에서 들려오는 신난 목소리에 출발해 본다. 한쪽 팔로 핸들을 돌리는 게 쉽지가 않아서 얼마 못 가 순서가 바뀐다. 형 나만 믿어. 당당하게 말해놓고는 또 얼마 못 가서 자전거가 멈춘다.
“야 너 잘 탄다며.”
“아니. 나 분명히 잘 타는데. 이인용은 또 처음이라 그래.”
캐나다에서도 자전거 타고 다녔어. 다시 다시 가보자. 도훈이 앞을 보고 출발하면 또 휘청휘청. 그게 또 재밌다고 둘이 야. 조심해. 와, 형 잠깐만. 한참을 웃는다. 몇 번 넘어질 뻔하고서야 익숙해졌는지 제법 안정적이다. 무더운 바람이 잔뜩 지나간다. 안정적으로 달리는 자전거에 시야가 넓어진다. 맑은 하늘과 함께 앞에 보이는 도훈의 등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볼을 간지럽히는 바람에 땀이 뚝 떨어진다. 큼 헛기침을 한 정환이 강을 바라보다 다시 도훈의 등을 본다.
“형 저기 앉자.”
자전거 반납하고 멀지 않은 곳에 돗자리를 편다. 가방을 내려놓고서는 그대로 누우면 도훈이 그 옆에 따라 눕는다. 나란히 누우니 눈앞에 보이는 하늘이 푸르다. 손으로 네모를 만들어 본다. 아 카메라 가져올걸. 도훈은 캐나다에서 사진 찍는 취미가 생겼다. 급하게 나온다고 생각도 못 한 카메라가 아쉽다.
“형. 짐은 잘 챙겼어?”
“응.”
“근데 왜 이렇게 가방이 가벼워 보여? 다 버린 거 아니지?”
“필요 없는 건 버리고, 중요한 것만 몇 개 챙겨왔지 뭐.”
그거 다 바리바리 싸 들고 와서 뭐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더니 노래를 튼다. 이어폰을 한쪽 씩 나눠 끼고서는 노래를 듣는다. 흘러나오는 멜로디에 맞춰 둘의 발이 좌우로 움직인다. 이 노래 좋다. 그치. 형이 요즘 자주 듣는 노래야. 제목이 뭐야? 오랜만이야. 좋다. 형 한 번만 더 듣자. 그래. 또 발이 까딱까딱.
“형 다음 주에 깁스 풀지.”
“응.”
“와 그다음 주면 방학이야.”
방학 때 뭐 하지? 나 한국 와서 처음 맞는 방학이잖아. 나 진짜로 재밌게 놀거야. 들뜬 목소리가 귀엽다. 그래라. 대답하면 형이랑 놀거라고. 형이랑. 도훈이 몸을 옆으로 돌려 정환을 바라본다.
“형 방학 땐 나랑 놀아야 해, 무조건.”
“무조건?”
“응. 형이랑 하고 싶은게 너무 많아.”
“뭐가 그렇게 많아.”
“있어, 그런 게. 캐나다에서 하나하나 적어놨어.”
진짜 웃기지도 않지. 정환이 웃으면 아 진짜라고, 알겠냐고. 옆구리를 찔러온다. 간지러움에 몸을 틀면서 피해도 따라오면서 간지럽힌다. 아 알겠어, 진짜로. 형 팔 아파 진짜. 그제야 멈추는 장난. 어느새 도훈의 얼굴이 정환의 얼굴 위에 올라와 있다. 새까만 눈동자 뒤로 보이는 새파란 하늘. 마주친 시선이 한참이다. 형. 도훈의 손이 정환의 이마께로 올라온다. 부드럽게 스쳐가는 손가락에 눈이 감긴다. 머리카락에 나뭇잎 묻었다. 도훈의 몸이 떨어지면 정환이 숨을 작게 내뱉었다. 나 화장실 좀. 정환이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향한다. 도훈은 구겨진 돗자리를 다시 편다.
장난의 여파로 정환의 가방이 활짝 열려있다. 칫솔이랑 필통이 떨어져 나왔길래 가방에 집어넣고서 지퍼를 잠그려는데 보이는 건 도훈에게 익숙한 것들. 캐나다에서 축구 경기 보러 갔을 때 정환에게 주려고 샀던 축구공 마그넷. 형이 쓰면 좋을 것 같아서 산 보호대와 헤어밴드. 도훈이 캐나다에서 찍어 보내줬던 사진 몇 장과 도훈이 쓴 편지 여러 장. 중요한 것만 챙겼지 뭐. 정환의 말이 떠오르면 자꾸 새어 나오는 웃음은 막을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조급해지지 말아야지. 혼자 다짐을 한다.
버스에 나란히 앉아 돌아가는 길 어깨로 툭 떨어지는 머리에 옆을 바라보면 살짝 입을 벌린 정환이 곤히 자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정환이 기댄 어깨로 힘이 들어간다. 불편해져오지만 굳이 자세를 고치진 않았다. 하필 퇴근시간이랑 겹쳐서 차가 막힌다. 그게 도훈은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목덜미에서 숨결이 옅게 느껴져 간지럽다. 온 신경이 다 몰리는 기분에 도훈은 그저 앞만 바라본다.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 그리고 열린 창문으로 살랑 불어오는 바람. 도훈에게 온통 간지러운 것들 투성이인 오후.
-
갑자기 환해지는 시야에 눈이 부시다. 눈도 못 뜨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는 걸 막아내는 손길에 미간을 찌푸린다. 형. 일어나 봐. 도훈이다. 정환이 한 쪽 눈을 겨우 뜬다. 웃고 있는 얼굴. 뭐야 너, 아침부터.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으면서도 몸을 움직여 도훈을 등지고 눕는다. 한 손으로 이불을 잡아끌길래 막으니까 금방 포기하고는 손으로 눈가를 가린다.
“아침 아니고 벌써 두시야.”
“뻥치지 마….”
“맞아 뻥이야. 형, 일어나 봐.”
“응…. 5분만”
“아니 지금 일어나 봐.”
“알겠어….”
“빨리.”
“응….”
“우리 바다 가자.”
“알게…. 뭐?”
드디어 정환이 눈뜬다. 바다 가자. 얼른 일어나. 응? 도훈이 놓치지 않고 정환의 등에 손을 넣어 일으킨다. 아아 도훈아아…. 겨우 앉은 정환이 한 손으로 마른 세수를 한다.
“몇 시야.”
“지금? 여섯시 십칠분.”
미안 미안. 근데 일단 세수 먼저 해주면 안 될까? 우리 일곱시 반 기차다? 도훈의 성화에 정신없이 세수하고 준비하고 정신 차려보면 기차 안이었다. 도훈이 부스럭거리면서 봉지를 꺼내들었다. 아직 김이 서려있는 봉지 안엔 삶은 계란 네 개가 들어있었다. 까서 먹는 맛이라는게 있대. 테이블에 내리치는데 조용한 객실 안에서 퍽 소리가 제법 크게 나 민망해 웃었다. 목 멜까 봐 이것도 가져옴. 꺼내든 포카리스웨트. 정환은 아직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꼭꼭 씹어 먹었다.
도착한 바닷가는 하늘이 너무 예뻤다. 파란 하늘 아래 끝없는 수평선이 좋았다. 사람도 별로 없어서 맘껏 뛰어다니는 도훈을 보면서 정환은 웃었다. 진짜 똥개 같다. 핸드폰을 꺼내서 소리 지르며 달리는 도훈을 찍었다. 파도랑 몇 번 실랑이를 하다 정환의 곁에 온 도훈이 정환의 손을 잡아끈다. 파도가 찰싹이는 소리, 파란 하늘. 내리쬐는 태양. 끈적이는 피부 한여름의 바닷가. 정환은 기분이 좋아졌다. 도훈과 함께 파도와 실랑이를 한참 했다. 형 들어갈까? 갈까? 가자. 가자 둘이 손을 잡고 갔다가 팔을 잡고 뒤로 물러나기도 했다. 한참을 웃다 보니 배가 고파져서 도훈을 끌고 횟집으로 향했다.
이게 다 뭐야. 캐나다는 회 안 먹어? 안 먹는 거 같은데? 난 안 먹어봤어. 이건 광어고, 이건 우럭. 이건 멍게고 이건 전복 먹어봐. 이건 개불. 개불? 어 개불. 아 맛 없을 거 같애. 아니야 진짜 형 믿고 먹어봐. 아 이상한데. 잔뜩 인상을 쓰면서도 주면 또 곧잘 받아먹는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지 이것저것 더 주워 먹는다. 정환은 문득 이 순간이 너무 즐거웠다. 그래서 앞에 앉은 도훈을 바라보며 내내 웃는다.
매운탕에 라면 사리까지 넣어 먹고서야 더 이상 못 먹겠다며 식당을 나섰다. 옆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 하나씩 물면서 다시 바닷가를 거닌다.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에 멀미가 날 거 같다며 정환은 그냥 털썩 주저앉았다. 파도가 발끝까지 치고 빠지길래 엉덩이를 좀 더 뒤로 밀어 앉으면 그 옆에 도훈이 나란히 앉는다.
좀 전까지만 해도 푸르르던 바다는 노을빛을 받아 어느새 붉어져간다. 예쁘다. 정환이 중얼거리면서 사진을 찍는다. 한참 하늘을 찍다가 갑자기 카메라를 옆으로 돌려 도훈을 찍는다. 정환을 바라보던 얼굴. 너 표정 바보 같다. 아닌데도 그냥 놀려본다. 별것도 아닌 걸로 한참을 웃는다.
“형, 있잖아. 이런 것도 나름대로 괜찮게 사는 것 같지 않아?”
“나름대로 괜찮은 건 또 뭐야.”
“그냥. 이런 거. 축구 못해도, 나랑 같이 공부도 하고, 게임도 하고, 여름엔 이렇게 바다도 오고. 겨울엔 스키도 타러 가고. 이런 거 말야.”
“그런가.”
응. 생각해 보면 형은 뭐든 다 잘했잖아. 게임도 잘하고, 우리 둘이 달리기 시합을 해도, 축구를 해도, 물속에서 숨참기 게임을 해도, 탁구를 쳐도, 나 맨날 형한테 다 졌잖아. 근데 나 사실 알고 있었다. 형이 한 번씩 져주기도 한 거. 그런 형이 진짜 좋았거든 난.
정환도 기억난다. 두 번 연달아 이기면 입을 삐죽이던 도훈의 얼굴. 그럼 세 번째엔 꼭 져줘야 했다. 단순하게도 바로 웃는 그 얼굴이 귀여웠는데.
“그때 도훈이 진짜 귀여웠는데.”
“지금은?”
“지금은 너무 컸지. 너 진짜 왜 이렇게 커서 왔어. 응?”
김도훈 어딨어, 어? 옆구리를 콕콕 찌르면서 장난치면 도훈이 그 손을 잡아온다. 정환은 그 손을 굳이 빼지 않는다.
“근데 이제 다 잘하는 신정환은 없네. 도훈이 아쉬워서 어떡해.”
“아 형. 그게 무슨 말이야. 바보야? 난 형이 잘해서, 져줘서 좋은 것도 있지만, 나랑 같이 해줬던 형이 좋았단 얘길 하는 거야.”
“그으러냐.”
“그래. 형이랑 하는 거면 뭐든 다 좋았다고. 지금도 좋고.”
파도가 철썩, 철썩. 형. 형이 좋아 난. 도훈의 말에 정환의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다 괜히 가슴께가 간질거려서 잡은 손을 꼼질거리면 도훈이 그 손을 끌어가 꽉, 깍지를 껴온다.
“형. 내가 형 얼마나 좋아하는지, 오래 좋아했는지 몰랐지.”
“뭐야.”
“진짜야. 형 재작년에 나갔던 축구 대회. 나 사실 갔었다?”
“뭐? 진짜? 왜 말 안 했어.”
잠깐 한국에 들어왔다고 얘긴 들었는데 대회 합숙 때문에 보지도 못하고, 그때도 영통으로나 잠깐 인사를 했었다. 보고 싶었는데, 하필 타이밍이 이래서 아쉽다 못해 슬프기까지 했었는데. 경기장까지 왔으면 인사하고 갔어야지. 말하는 정환의 목소리가 잔뜩 서운하다.
“그러려고 했는데, 전반전 중간에 갔고, 후반 중간에 공항 갔어.”
“그래도….”
진짜 서운한지 입을 삐죽인다. 미안. 웃으면서 정환의 어깨에 이마를 짧게 비비다 떨어진다.
“근데 있잖아. 그날 비 엄청 왔잖아.”
“맞아. 그랬지.”
“기억나지. 그때 골 넣고 웃던 형이 너무 멋있어 보여서, 내가 무슨 다짐을 했는지 형 알아?”
비 오던 날. 그날 미끄러져서 무릎을 다쳤었다. 유독 너무 재밌었던 경기여서 들어가기 싫어서 괜찮은 척했던 게 화근이 돼서, 몇 달 후 결국 수술하게 됐던 부상이었다. 정환에겐 후회가 되는 몇 안 되는 날 중 하루였던 날. 도훈은 그날 정환을 보고 형만큼 멋진 사람이 돼서 돌아오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형한테 보란 듯이 고백해야지. 다짐했다고. 도훈의 고백을 듣고 난 후 정환은 이상하게 그날이 다르게 그려진다.
비가 오는 날 축구하는 걸 원래도 좋아했는데, 그날은 골도 두골이나 넣었다. 중요한 슈팅을 날려줘서 친구도 한 골을 넣을 수 있었다. 세레머니를 하던 순간 입안에 들어가던 빗물조차 달았던 날. 다친 것 따윈 아무렇지 않아졌고, 이제 와서는 그래, 그때 그것도 낭만이었겠다. 싶어지는 마음이 든다. 동시에 후회가 하나 빠지니 그 틈으로 새로운 감정이 채워진다. 저를 바라보는 도훈의 눈동자를 보다 보니 이젠 목 안엔 모래조차 없는 듯한 기분이 든다. 도훈과 함께 하면서 흐려졌던 절망이 지워진다. 도훈의 말대로 이런 것도 나름대로 괜찮게 사는 것 같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에 정환이 웃으면 도훈이 빤히 바라본다.
“좋다, 형.”
“뭐가 그렇게 좋아.”
“그냥 하늘도 예쁘고, 바다는 넓고, 형도 잘 웃고.”
“뭐야 그게.”
“나는 형 웃는 게 좋아. 캐나다에 있는 동안 형 웃는 모습이 제일 많이 그리웠어.”
도훈이 잡은 손을 놓고선 정환의 볼을 쿡 찌른다. 웃을 때 입꼬리가 이렇게 올라가는 게 보기 좋아.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위로 쭉, 당기면 입꼬리가 올라간다. 정환이 그 손을 잡아내린다.
“도훈아.”
“응?”
키스해도 돼?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엔 부끄러워서 그냥 입술을 맞붙였다. 쪽, 짧게 닿았다 떨어진 입술, 그리고 놀란 눈동자. 그 눈동자 안엔 여전히 동정이 없다. 언제부턴지 모르게 차올라있던 애정만이 가득했다. 아마 도훈의 눈에도 이젠 정환의 눈동자가 그렇게 비칠 것이다. 웃으며 볼을 감싸 안은 도훈이 다시 쪽, 하고 입술을 맞붙인다. 떨리는 손이 볼에 그대로 느껴져서 정환은 살짝 웃었다. 웃느라고 벌어진 틈으로 혀가 들어온다. 고개를 틀며 서투르게 따라오는 입술이 간지럽다. 도훈아. 살짝 떨어졌을 때 이름을 부르면, 볼에 툭 떨어지는 물방울. 어라. 순식간에 투두둑 쏟아지는 빗방울에도 한참을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젖은 입술이 쪽쪽쪽 세 번은 연달아 닿고 나서야 고개가 떨어진다.
“형, 비 온다.”
“망했다.”
그러면서도 뭐가 즐겁다고 웃고 있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선 도훈이 손을 내밀면 정환이 그 손을 잡고 일어선다. 손을 맞잡고서 비 내리는 모래사장을 달려나간다.
정환에게
한여름의 첫 키스는
숨이 막히고,
짭짜름한 빗물 맛이 났다.